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dictee@empal.com) 
 
첫눈이 내린 날 소주를 마시며 첫사랑을 떠올린다니 어쩐지 수상쩍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며 술잔을 기울이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익히 알던 ‘홍상수 영화’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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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이 내린 날 오랜만에 만나 중국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헌준(김태우)과 문호(유지태)는 창밖의 여자를 보며 각자 선화(성현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그것은 아련한 첫사랑의 상처와는 거리가 먼 두 남자가 경험한 한 여자에 관한 지극히 통속적인 기억의 삽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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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선화와 헌준은 사랑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홍상수의 영화는 사랑의 애틋한 기억이 아니라 사랑의 낭만을 무너뜨리는 통속적인 장면들을 보여준다. ‘오! 수정’에서 여성의 순결에 대한 남성의 판타지를 집요하게 보여줬듯이 여관에서 펼쳐지는 남녀의 정사는 욕망의 부산물과 집착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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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을 당했다는 선화에게 괜찮냐고 물으며 여관으로 데리고 가는 장면을 보면 실소가 흘러나온다. 홍상수의 영화는 언제나 그렇듯이 남자들의 위선과 사랑의 낭만을 무너뜨리는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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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흘러 헌준은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문호는 선화를 만나러 간다.(왜 그랬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약속 장소에서 마주한 두 사람은 달라진 모습에 묘한 감정을 느낀다. 머리를 새로 하고 나타난 선화는 어딘가 이상해 보이고, 문호의 얼굴은 부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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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은 약속을 한 날 무언가 일이 벌어질 거라는 기대감을 주면서도 동시에 기대감의 초반부를 슬쩍 무너뜨린다. 선화는 문호의 집으로 따라가면서 묻는다. “집에 누가 계세요? 아무도 없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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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말 황당한 것은 두 남자가 중국집에서 행한 이후의 상황이다. 헌준은 문호에게 선화가 있는 곳을 묻기 시작하고 부천에 있다는 말에 함께 가자고 졸라댄다. 두 사람은 방금까지 떠올린 기억 속의 여인을 찾아 택시를 잡아탄다. 전반부가 두 남자의 사랑에 대한 기억이었다면 후반부는 그 기억을 현실화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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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지리멸렬해지는 것은 이때부터다. 선화를 기다리거나 선화를 만나서 그들이 행하는 것은 7년 전의 상황과 엇비슷하다. 선화와 헌준은 첫사랑의 기억으로 다시 해후하고, 문호는 헌준이 잠든 사이 선화와 섹스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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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오늘은 헌준이 형보다 내가 더 오고 싶었다”며 말이다. 영화는 이렇게 이전 영화들이 가진 날카로움보다 훨씬 더 힘없이 뒤로 물러나 통속적인 세상의 풍경 속으로 침잠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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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내용을 설명했지만 홍상수의 영화는 줄거리 요약으로 설명되지 않는 면모들이 많다. 두 사람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대화가 이뤄지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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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냉정히 따져보면, 우리의 현실적인 대화들도 그렇지 않은가. 서로 다른 생각을 품은 두 사람이 ‘한글’을 사용해 대화를 나눈다고 해서 소통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헌준과 문호 사이의 대화뿐만 아니라 선화와의 관계를 통해서도 그들은 사랑의 밀어를 나누지만 홍상수가 보기에는 통속적인 것의 조금 다른 모양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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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홍상수의 영화는 항상 이렇게 말해지곤 했다. “세상의 위선과의 귀여운 입맞춤이다.” 축하할 일은 오는 5월12일 열리는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받았다는 사실이다.(5월5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