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보러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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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아버지들이 비슷해보일때 [조선일보 2004-09-15 10:40]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늦은 밤 ‘가족’ 이란 영화를 봤다. 말 그대로 가족이 함께 하면 좋을 이 영화는 궁색하고 가난한 달동네를 배경으로 아버지와 딸 사이의 갈등을 풀어나간다. 생선가게를 꾸리며 아내 없이 살아가는 한쪽 눈이 안 보이는 아버지와, 축구선수를 꿈꾸는 어린 남동생과, 전과자란 그늘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젊은 딸의 인생을 그리고 있다. 


그들의 일상은 단조롭기도 하고 별반 특별하지도 않지만 내내 묵직한 슬픔으로 펼쳐진다. 부녀간의 대화는 따뜻하지도 섬세하지도 않다. 그저 “밥 잘 챙겨 드세요”라는 절제된 딸의 목소리와 “집에 와서 자라” 라는 담담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오고 갈 뿐이다. 조금은 무미건조하고 바람처럼 스쳐 지나는 일상의 평범함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딸이 힘겹게 나누는 절실한 가족애가 내재된 처절한 표현이다. 


과거와 단절하려는 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약한 가족을 매개로 낭떠러지로 내모는 조직의 폭력과 끔직한 협박이 가슴을 조이게 한다. 약한 가족의 평화를 해체하는 폭력의 고리는 끊어질 듯 하면서도 위태롭게 이어진다. 


자식을 위해 주저하지 않고 무릎을 꿇기도 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코끝이 찡하다. 그 처절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과거로부터 이어진 불행은 끝내 시한부 아버지의 남은 생애를 앞당겨 마감하게 한다.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고단한 볼과 턱을 면도하던 딸의 잔잔한 손놀림은 무척이나 애잔했다. 


고인이 된 아버지의 유품을 챙기며, 당신의 젊고 건강할 때의 사진을 보면서 딸은 비로소 끝내 말하지 못한 말들에 대한 참담함으로 절망한다. 이 땅의 나이 들어가는 아버지들이 거의 비슷해져 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영화 속의 아버지의 표정과 행동 하나하나는 우리 아버지와도 닮아 있었다. 아버지의 그늘이라고 불러도 좋을 법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늙고도 병든 아버지의 정겨운 모습에 목이 멨고, 표현에 인색하고 서툰, 불만 투성이의 딸의 마음이 점점 열리는 장면에선 눈물이 나왔다. 객석 곳곳에서도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화관 입구에 마련된 가족 사랑 나무 박스에는 수많은 가족 이야기가 햇과일처럼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나와 함께 영화를 보고 나온 눈이 부은 사람들도 노란 직사각형 메모지에 뭔가 가족에 대한 염원을 적고 있었다. 두 뼘 반 정도나 될까싶은 인조 나무의 가지는 그 위에 달린 수많은 사연들로 축축 늘어지고 있었다. 


“내가 돈 많이 벌어 올께”, “엄마 아빠 우리 사이 허락해 주세요”, “00야 멋진 남자 만나서 결혼하길 진심으로 바랄게”, “로또 대박 나게 해주세요”, “멋진 차 좋은 집이 필요해요”, “중간 기말 시험 90점 넘게 해주세요”, “이제 행복한 날들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빠 사업 잘 되고 엄마 건강하고 울 오빠 취직하게 해 주세요”, “하늘로 간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사랑을 베풀어주세요”, “우리 가족 이대로 지금만큼만 행복하게 해 주세요”, “여보 곧 취직 할 테니 기다려 주오”, “이쁘고 행복한 가족을 이루자” 등등 애교와 함께 하트를 통과하는 화살촉 그림이 있었다. 그리고, “행복 건강 사랑 화목”, “아자아자 파이팅!”이랄지 결혼 기념을 축하하는 멘트에서 “남자친구 내려 주세요!”라는 귀염성 소원도 많았다. 금박 끈으로 묶은 가족 편지들은 각각 다른 사람 다른 필체지만 결국은 하나의 마음이었다. 


영화를 보고나니 아버지 생각이 간절해졌다. 아버지에게 조금 더 다정한 말로 애교도 부려야 할 것 같고 더 늙으시기 전에 한 번쯤 생크림 같은 거품 잔뜩 묻혀 간지럽게 면도도 해 드리고 싶다. 인색하게 등뒤에서만 몇 번 주물러 드렸던 팔을 내밀어 앞에서 안아드려야 할 것 같다. 한 번 더 실천하는 사랑 표현을 하고 싶다. 가족 그 소중함 속에 꼭꼭 숨겨진 아버지의 든든하고도 인간적인 나약한 그늘을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이 세상 모든 아버지에게 기쁜 일들이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