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는 사라지고, 미성숙한 소녀들만 남아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은 예술고등학교를 다니는 네 명의 여자아이들의 얘기다. 기숙사로 올라가는 길목 28개의 하얀 계단은 소원을 들어주는 ‘여우계단’이다. 눈을 감고 스물아홉번째 계단을 외치면 스산한 바람이 불며 없던 계단이 나타나고, 소녀들은 두 손을 꼭 쥐고 간절하게 “여우야~ 여우야~ 내 소원을 들어줘”를 외친다. 물론 공포영화인 만큼, 아무 대가 없이 소원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여우계단은 소원을 빈 소녀들에게 소중한 것들을 하나 둘 빼앗아 간다.

여고괴담 첫 번째 이야기가 학교폭력과 억압을, 두 번째 이야기가 소녀들 간의 사랑을 리얼하게 포착해 공포영화라는 장르물 이상의 걸작으로 찬사 받은 과거가 있기에, <여우계단>에 대한 기대는 어쩌면 불공평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전작들의 매력에 눈감더라도, <여우계단>은 장르적 관습에 충실한 범작에 그치고 말았다는 평을 피하기 힘들 것 같다.


소녀들은 서로 사랑해선 안된다

무용과의 진성은 가장 친한 친구이자 무용과 스타인 소희를 질투한다. 선생님은 학생들 앞에서 공정하게 콩쿨 오디션을 볼 거라고 말하지만, 몰래 소희를 불러 이번 콩쿨이 러시아로 유학갈 수 있는 길목인 만큼 꼭 콩쿨에 나가라고 권한다. 냉혹한 예술의 세계는 처음부터 실력에 따라 그 서열이 정해져 있다. 억울한 진성은 그 서열을 딱 한 번만 깨고 싶어, 여우계단에 오른다. 소희 대신 콩쿨에 나가게 해 달라고.

반면 소희는 진성을 사심 없이 좋아한다. 소희는 그런 여자친구다. 천진난만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굴면서 친구에게 ‘영원히 함께 하자’고 말하는 캐릭터. 소희는 진성에게 새 토슈즈를 선물하지만, 진성은 그 토슈즈에 유리조각을 집어넣은 채 돌려준다.

그런데, 이 천진난만한 소희는 유리조각이 든 사실을 알면서도 토슈즈를 신고 오디션을 치른다. 그리고 불행을 암시하듯 토슈즈에는 피가 밴다. 진성에게 엄청난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소희는 진성과의 다툼 끝에 다리를 다쳐 발레를 할 수 없게 되고, 결국 자살하고 만다. 그리고 그녀는 귀신이 되어 학교로 돌아와, 춤을 추며 진성의 곁을 맴돌고, 결국 여우계단에서 진성을 힘껏 껴안아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자신의 사랑을 배신한 친구에 대한 애증이 이 같은 파국을 몰고 온 것이다.

아쉽게도 영화는 진성에 대한 소희의 애증을 밀도 있게 잡아내지 못했다. 그녀들의 감정은 단선적으로 흐른다. 소희는 무조건 진성에게 호감과 우정을 표시하고, 진성은 소희를 그저 질투하기만 한다. 소희가 진성을 사랑했을까? 사랑했을 법 한데, 문제는 소희가 그 같은 자신의 사랑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해 일말의 관심도 없는 미성숙한 소녀로 보여진다는 점이다. 신인인 배우들의 연기를 탓할 수도 있지만, 조금만 더 깊은 호흡으로 그녀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면 소녀들의 내면이 좀더 가까이 전달됐을 것이다. 카메라는 그녀들의 전신을 빠른 호흡으로 잡아낼 뿐 좀처럼 소녀들 내면과의 거리를 좁히지 않는다.

영화는 소희와 진성뿐만이 아니라 소희와 혜주의 관계도 ‘절친한 친구’로 내버려둔다. 소녀들 사이에 흐르는 애정 어린 감정선이 조금만 더 깊어져도 안 된다는 것일까? <여우계단>은 레즈비언 정체성을 부재한 것으로 여기는 듯 하다. 미술과인 혜주는 소희를 몇십 장씩 스케치하고, 토슈즈를 껴안으며 소희를 생각하며, 여우계단을 올라 죽은 소희를 되돌려달라고 소원을 빌 정도로 소희를 사랑한다.

그런데 영화는 이 같은 혜주의 사랑을, 뚱뚱해서 왕따가 된 소녀가 ‘스타’에게 자신의 욕망을 미숙하게 투사하는 것으로 처리하고 만다. 그 결과 진성과 소희, 혜주와 소희의 관계는 여고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겉만 보고 ‘여고생들은 발랄하고 깊이 없다’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과 똑같은 모양새가 됐다.

엄마 때문에 발레를 한다면서도 발레를 사랑하는 소희의 열정이나 여우계단에 오를 정도로 발레를 잘하고픈 진성의 욕심도, 위 아래를 다르게 촬영해 대역을 썼다는 것이 단번에 드러난 어설픈 오디션 장면 때문에 강렬하게 전달되지 못했다.


공포영화의 보수성 그대로 답습해

혜주의 소원에 의해 혜주 곁에 돌아온 소희. 혜주는 점점 소희를 닮아가는데, 이는 일종의 ‘빙의’ 현상인 듯 하다. 혜주는 소희가 되어 진성을 쫓다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피곤하다며 불을 질러 죽음을 맞이한다. 혜주의 죽음은, 그저 죽은 소희를 사랑하고 숭배했기 때문이다. 뚱뚱하고 못생긴 외모, 기묘한 손짓, 과식증세 등 ‘왕따’하면 떠오르는 그 모든 행동패턴을 지닌 혜주는 끝까지 ‘왕따’ 당한 채 미쳐가고, 결국은 자살한다. <여우계단>은 혜주와 같은 소외된 캐릭터의 내면을 끈질기게 따라가지도 못하고 억울하게 ‘왕따’당한 그녀의 위치를 변화시키지도 않아, 결과적으로 공포영화가 내포하기 쉬운 보수성을 그대로 답습하고 만다.

소외되고 불안정한 사람일수록 원한이 있기에 공포를 몰고 오기 좋은 주체가 되며, 공포영화는 그 주체가 풍기는 공포의 이미지를 이용한 다. 여고괴담 전작들의 경우 소녀들의 소외와 불안정을 그녀들 개인 탓으로 돌리지 않고, 소외와 불안을 가져다 주는 배경인 ‘여고’를 적절하게 영화에 담아냈다. 그러나 <여우계단>의 경우 발레와 토슈즈, 구체관절 인형, 그림, 예고와 고풍스런 기숙사처럼 ‘소녀적인’ 소품과 배경을 병렬적으로 화면에 담아냈을 뿐이다.

레즈비언 정체성의 부재, 혐오스런 ‘왕따’의 죽음. 예쁜 소품과 배경의 차용. 어쩌면 <여우계단>은 아름답고 천진하게 보이는 소녀들 내면에 존재하는 깊고 어두운 욕망을 가린 채, 영원히 자라지 않는 ‘미성숙한 소녀’로 묶어두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진성/소희/혜주에게는 공통적으로 전작들이 보여준 여고생 캐릭터의 예민함과 단단함이 없다.

이 같은 '소녀적' 감수성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는 영화 곳곳에서 드러난다. 혜주가 공책에 그린 여우계단은 이애림 일러스트에서 따온 것인데, 이애림 일러스트가 풍기는 징그러우리만큼 직설적인 욕망에 대한 메타포가 구체관절 인형의 곱상한 아름다움과 함께 제시된다. 여기서 이애림의 일러스트는 혜주의 뒤틀린 욕망이며, 구체관절 인형은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을 향한 혜주의 열망을 상징한다. 즉 이애림 일러스트가 풍기는 기괴함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욕망임에도 불구하고 '소녀'라는 체를 통해 걸러져 '왕따' 혜주만의 것이 된다.

요컨대 귀신이 되어 친구들의 곁에 돌아올 만한 강력한 원한이 없기에, <여우계단>이 전달하는 공포는 장르적 법칙을 충실하게 따르는 흔한 공포영화들처럼, 장면 장면의 징그러움과 기괴함에 의지할 뿐이다. 그 간의 여고괴담 두 편은 여고생들의 불안과 공포를 완결성 있게 제시, 피 튀기는 장면이 많지 않아도 충분히 관객들을 소름 끼치게 했다. 그러나 <여우계단>에 등장하는 공포장면은 그 이전 두 편보다 훨씬 많지만 상투적인 공포영화 클리셰에 그쳐 허를 찌르는 공포를 전달하지는 못했다. 거울 속에 등장하는 귀신, 두 다리를 붙잡는 귀신, 핏물 흐르는 무용실 샤워장, 시체를 뒤덮은 구더기 등이 그것(특히 귀신이 된 소희가 창문을 열고 기어오는 장면은 <링> 판박이인데, 왜 베꼈는지 알 수 없다). <여우계단>에서 여고는 사라지고, 그 대신 미성숙한 소녀들과 아름다운 학교만이 남았다.
김윤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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