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달변이었다. 그 ‘말빨’은 기자의 질문이 던져지기 오래 전에 진지하게 성찰하고 결론 내려 자기화하는 공정을 거쳐 일구어 낸 자기 철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완전히 동의할 수 없는 어떤 이야기에도 우리들은 그 설득성에 한 치의 의심을 가질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봉만대 감독과의 긴 대화를 위해 세 기자가 각개 전투로 덤빈 건 잘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세 기자 모두 그의 빈틈없는 달변과 설득의 전략에 나가 떨어졌다. 치밀한(?) 논의를 거쳐 준비해간 질문지는 삼분의 일을 채 넘기기도 전에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개똥 철학에 쎈 편이죠. 그래서 나중에 사교(私敎) 집단 만들어 교주해 먹을까 하는 생각까지 한다니까” 라고 농담할 때에도 그에겐 희화화된 자조의 기운이 없었다. 자신이 거하고 있는 곳에 대한 명징한 이해와 그를 토대로 치밀한 계산과 흔들림 없는 열정에 따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고 이루어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내공이다. 그래, 그는 한참 회자되고 있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에 대한 뭇 언론의 선정주의 선호증은 물론이고 영화에 대한 정치적 혐의와 의심 앞에서도 전혀 동요 없는 언술로 무장하고 있었다. 멋진 사람이었다. 

영주: 바쁘겠다. 요즘 여기저기 당신의 이름이 안 나오는 데가 없다. 인터뷰는 많이 했나?

바쁜 게 뭔가? 나는 바쁘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는데 그런 말들을 많이 한다. 
(부연 격으로 뉘앙스를 살려주자면 이건 시비조의 반문이 전혀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궁금한 듯 되물었다. 인터뷰 내내 이런 식이었다. 의미의 석화에 맞서기 위해선 그 근본부터 파헤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듯.) 

세희: 이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선입견이 우려되지는 않나.

글쎄. 에로 영화는 장르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고려할 때 비로소 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영화다. 그것은 공개되어 있지 않고 숨겨져 있다. 비디오 샵에 가서 맨 처음 에로 비디오 섹션으로 직행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개 에로 섹션은 뒤 켠에 있기 마련인데 그곳 까지 가기 위해서는 일종의 자신감이 필요하다. 그래서 대개는 들어가서 다른 쪽을 돌다가 그 쪽을 힐끔 응시하고 그러다가 정면으로 보는 과정을 요한다. 자연스럽게, 낯선 경험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려면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만든 에로 영화들을 볼 필요가 있다. 

영주: 주요 작품인 <연어> <이천년> 모두 [클릭(제작사)] 소속 작품이다. 클릭은 이른바 ‘B급 에로 걸작 생산소’로 알려져 있다. 클릭에서만 했나?

클릭에서는 세 작품만 했다. 다들 내가 클릭 소속인줄 아는데 아니다. 

영주: <연어> 재미있게 보았다. 그런데 주연인 정희빈이 연기를 너무 못하더라. 케이스엔 ‘정희빈의 데뷔작’ 이라고 박스처리까지 되어 있던데(웃음)

정희빈은 연기자가 아니다. 그 이야기하려면 긴데. 비디오 영화계는 상업 영화계보다 훨씬 많은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다. 상업 영화는 문화적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논하게 되는 과정이 공개화되어 있는데 비디오 영화가 그렇지 못해서일거다. 말하지 않음 모르지. <연어>의 경우 제작사와 배우간의 트러블이 생겨 잡음이 많았는데 그 과정에서 작품이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하루 촬영분이 남았는데 배우가 증발해 버린거다. 대체할 수도 없고. 하는 수 없이 무작정 기다리다 일주일 후에 현장에 나간 그 날 정희빈이 나타났다. 급조한 거지. 배우가 아니라 나름대로 다른 커리어가 있는 사람을 데리고 에로 영화를 찍어야 하다니. 그것도 현장에서 만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했다. 말도 안되는 과정 속에서 어떻게서 든지 영화적인 모습을 연출해야 하니까. 부자연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일례로 정희빈은 에로의 언어와도 같은 ‘호흡’의 소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영화가 어설퍼 졌다. 

세희: 비디오 영화 시장과 충무로간의 시스템의 차이가 느껴지는 이야기다. 둘을 다 경험한 흔치 않은 장본인으로 감회가 어떤가? 

내 몸이 다른 데를 가면 거기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망의 지름길’이란 게 있는데 자꾸 과거를 운운하면 노망이 빨리 온다는 소리다. 비디오 영화의 경우 저예산 시스템에 대중적 정보에 공개된 현장도 아니라서 그 한계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한다. 그 덕에 대중을 고려하지 않고 내가 하고싶은, 나 혼자만의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 와중에 내 영화의 매니아가 생겨나기도 했고. 더불어 엄청난 전투력을 요하는 곳이다. 3, 4일만에 한 영화를 찍어내야 하니까. 또 관객을 생각하는 입지가 다르다. 비디오계에선 관객이란 말 보다 ‘고객’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한다. 상품화의 기준이 어디에나 적용되며 그 기준은 관객의 입장에서 출발하고 끝난다. 

반면 영화는 뿌리가 깊은 역사를 가진 문화로 DIY로 돌진할 수 없는 곳이다. 예전처럼 혼자서 이것 저것 해 나가선 안 된다. 내 주관을 가지고 있되 주변의 도움을 받아 조화를 이루어가야 한다. 영화 음악을 예로 들면 예전 비디오 시절엔 그 장면에 맞겠다 싶으면 제한 없이 마음대로 갖다 썼다. 그러나 이제는 ‘저작권’ 문제부터 접근해야 한다. 촬영 기간도 비할 바 없이 길고. 그런 기본적 차이가 있다. 

(잠시, <이천 년>의 배경 음악으로 등장했던 레니 크래비츠와 스매싱 펌킨스에 대한 이야기로 새 나갔다.) 

영주: 어느 쪽이 더 편하냐고 묻는다면 우문인가. 

편하다는 의미를 잘 모르겠다. ‘16 mm 비디오할 때에도 하고싶은 걸 한다’가 중요하고 그렇게 했다. 영화도 다르지 않다. 영화에 왔으니 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16mm 에서 35mm로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보여주고, 그 다음엔 세계 시장으로, 이렇게 사고한다. 그때마다 다른 상황 논리와 어려움이 존재하겠지만.

영주: 기획시대와의 인연에 대해 말해 달라. 

어떻게 헤어질 거냐고 묻는 것 같다. 
(노망의 지름길에 빠지지 않는 그)

세희: (웃음) 아니다. 어떻게 시작했는지를 묻는거다.

<이천 년> <연어> 만들고 있을 때 박정덕 피디와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내 작품을 보고 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던 거다. 그렇게 만나 좋은 관계를 유지하다가 지금은 기획 시대이사지만 당시 피디였던 이수남과의 인연까지 이어졌다. 박정덕 피디의 이야기를 듣고 내 비디오를 본 후 ‘특별난 사람, 비디오계의 이단아’로 작은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기획 시대에서 영화를 하게 된거다. 

세희: 시나리오는 그 이후에 들어갔나.

그렇다. 2002년 4월에 시작, 4개월 동안 썼다. 

세희: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을 여성 시점으로 잡게 된 이유는?

개인적으로 여자를 좋아한다. 여자의 입장에서 써 보려고 노력했다. 무엇보다 대중과의 만남에 있어서 기존의 성을 다루는 영화들이 남성의 전유물처럼 그려내는 게 문제적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섹스 영화의 기본 모토는 ‘남녀가 함께 보는 것이 섹스 영화’다. 그래서 여성의 시점이 필요했다. 여성의 시각으로 접근하되 감독의 입장은 남자와 여자의 중간자로 설정했다.

영주: 그런데 카메라의 시선은 남성적이다. 모순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섹스에 대해 경험치가 많지 않거나, 섹스물을 제대로 보지 못한 사람들은 내 영화의 카메라의 시점에 문제 의식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굽히지 마라, 영주!) 영화에서 보면 알겠지만 카메라의 시선은 때로 깊이 들어가기도 하지만 때로 더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머물기도 한다. 관음증과 같은, 뭇 남자들이 원하는 시선하고는 거리가 멀다. 

남자들은 이 영화를 보면 검색엔진에 섹스를 쳐서 얻게 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무엇을 느낄 것이다. 이 영화는 보고 있으면 카메라가 자신의 몸을 만지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내 말은 선정적 감각이 아닌, 만든 사람과 보는 사람이 가까워질 수 있는 영화라는 의미다. 

세희: 그렇다면 카메라가 여성의 감정과 입장에 충실해서라고 해석해야 하나. 

그렇다. 섹스가 영화의 구조와 이야기에서 벗어나 있으면 절대로 안 된다. 그게 제일 어려웠다. 섹스를 통해서 이야기를 풀어 가야 하는데 너무 가학적이거나 관음증 적인 게 가미 되면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몫이 적어 지겠다는 우려가 생겼다. 그리고 섹스를 통해서 봤을 때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체위나 자세는 없다. 보통 남자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은 그런 것 보다 은밀하다. 특정 속옷이나 상황 등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든다. 몰카가 유행하는 건 그래서다. 따지고 보면 남자는 참 치졸할 정도로 단순하다. 

그렇다면 여자 관객들은 무엇을 보고 싶어할까. 여자는 남자를 보지 않는다. 여자는 여자를 본다. 여자 감독이 나와서 섹스 영화를 다루면 틀리긴 틀리다. 그래서 <밀애>를 재미있게 봤다. 아주 잘 만든 영화다.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의 스타일로 밖에 찍을 수 밖에 없겠더라. 그러나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은 남자 감독으로서, 피카소의 큐비즘 같은 비전을 만들고 싶었다. 감독은 이때 아수라 백작처럼 양성구유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을 것. 이것이 내가 의도한 것이었다. 

희경: 기존 에로 영화보다 상당히 사실적이어서 좋았다. 다른 영화들의 섹스 장면은 매우 암시적인데 반해 거침없고 솔직하달까, 특히 성기 삽입 시 소리가 들린 것에도 놀랬다. 염두한 건가. 

실제 세계는 우리의 오감을 단 한 곳에 편중 시키는 곳이 아니다. 다른 영화보다 이 영화에서 소리가 민감하게 작용했다면 이전에 시도가 안됐다거나 신경을 안 썼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상대성의 문제라기 보다는…일례를 들어보자. 액션 영화를 보면 발 차기를 할 때 소리가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