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친정에 갔다. 이름 모를 새소리와 함께 눈 뜬 아침, 언제나 그랬듯이 청소를 시작했다. 문화재 보수 공사를 한 지 얼마 안된 탓으로 마루는 온통 뿌연 먼지에 눌려 있었다. 그렇게 예순 여섯 간 집을 쓸고 닦고 나니 어느새 온 몸은 땀으로 범벅이다. "집 청소는 우리 딸이 젤로 잘 하네." 내 어머니의 칭찬 한 마디에 나는 그냥 어린아이가 되어 버렸다.

매주를 쑤시는 어머니 옆에서 불장난을 했다. "엄마, 나 어릴 때는 메주콩 디게 많이 주워 먹었는데...... 그치?" "언젠가 콩 주워 먹고 밤에 화장실 가다 똥 산 거 기억 나나?" 그랬다. 아주 어렸던 날이었다. 그 땐 화장실이 집 뒤 안에 있었는데 문이라곤 거적 한 장 막아둔 그런 곳이었다. 삶은 콩을 얼마나 먹었던지 자려고 누웠는데 배가 아팠다. 무서워서 혼자는 못 가고 오빠한테 가자고 졸라도 놀리느라 모른 척 한 그 저녁, 결국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안 뜨럭을 따라 걷고 있었는데 중간도 못 가서 나는 그만 바지에다 실례를 했다. 하하 호호 신나게 이야기 하다보니 아차! 내 딸이 옆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의 비화를 듣고 말았다.

다 삶아진 콩을 안방으로 가져와 메주틀에 넣고 꼭꼭 밟았다. "가를 꼭꼭 눌러 밟아야지, 나와 봐." "경력이 차이가 나는데 잘하는 게 더 이상하지." 어머니와 나는 번갈아 가면서 메주를 만들었다. 새끼로 묶어서 천장에 달아 놓고는 어머니가 말씀하신다. "가족 사진이 많제?" "다 엄마 사진이네 뭐. 저건 서른 살 때, 저건 그 다음 해 찍은 거고, 와 엄마 사진 정말 많다." 한도 끝도 없이 둘이만 재미있는 게 배가 아팠던지 작은아이가 "엄만 외할머니하고 노는 게 그렇게 재미있나?" 불만을 드러낸다. 

메주를 만드느라 허리가 아팠던지라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웠는데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나가보니 목욕탕 앞에서 콩을 까불고 계셨다. 내일 끓일 것을 장만하시는 거란다. 또 그 옆에 앉아 치로도 걸러 내지 못한 뿍데기를 골라냈다. 어머니는 햇빛을 따라 자꾸만 내 자리를 옮겨 놓으셨다. 한참을 모녀는 그렇게 앉아 한 가마니의 콩을 뒤집어 노랗고 이쁜 알곡만 찾아냈다. "엄마, 딸이 옆에 있으니까 덜 심심하지?" 물었더니 " 그럼 그걸 말이라고 해." 하신다. "그럼 묻기 전에 말을 해야지. 표현하는 사랑이 아름답다잖아." 코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아양을 떨었는데, 덩치가 작기를 하나, 그렇다고 나이가 작나, 그래도 어머니는 '아이고 귀여워라' 하는 표정으로 나를 봐 주셨다.

초등학교 삼 학년 때 까진 엄마 등에 붙어야 잠을 잤다. 그러다 대구로 전학을 가면서 엄마와 떨어져야 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그 날까지 난 한 번도 엄마한테 어리광이란 걸 부리지 않았다. 내 아이를 받아들고 그렇게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난 그저 엄마에겐 어린아이일 뿐이란 것을 알았다. 저 혼자 큰 줄 알고, 집에 가면 늘 혼자 이불을 똘똘 말고 잠들었던 사춘기 시절, 그때도 어머니는 그냥 묵묵히 그 자리에 계셨을 뿐이다. 섭섭하셨을텐데 단 한번도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아이를 낳고 적당히 나이가 들어 엄마 앞에서 미주알 고주알 떠들고 있는 딸에게 야단스럽지 않지만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신다.

무등을 태워 학교에 데려다 주시던 아버지가, 겨울 내 냇가에 나가 얼음 배를 타고 빠져 들어와도 가마솥에 신발을 말려 주시던 어머니가 계시던 곳, 로봇이 없어도 컴퓨터가 없어도 '자연'이란 무궁무진한 놀이감이 있었던 곳, 아무런 걱정도 삶의 무게도 존재하지 않는 그 곳은 언제나 내 무릉도원이다. 나는 삶에 지치고 힘이 들면 고향에 간다. 누구에게나 고향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한 해가 가고 있다. 저마다 아이들 손을 잡고 고향에 갔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도 유년의 신나는 기억 한 두 가지는 있어야 세상이 힘들다는 것을 아는 나이에 떠올리며 자신을 돌아 볼 수 있을 같아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