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면, 아니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사람이 있다.
내가 언니를 만난 건 2001년 11월쯤이었다. 대학원에 입학원서를 내놓고 국학부 학술대회에 왔을 때였으니까. 까만 밍크코트에 파묻혀, 키는 자그마하고 얼굴이 예뻤는데,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길에 보니 까만 색 그랜저를 타고 있었다. 그냥 우리 또래려니 생각하고 보니 밍크코트도 그랜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휴 저 사람이 대학원에 들어와 자발머리 없이 딸랑거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앞섰다.

학기가 시작됐고, 언니 집이 점촌인 탓에 가는 길에 나 좀 실어 가라고 했더니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처음 한 차를 타고 학교에 가던 날, 신상명세를 파악하다가 나보다 열 살이나 많다는 것을 알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언니네 얘들은 다 컸겠네요?" 했더니 "아이 없어요." 하는데 '이 사람이 평생 꼴불견으로 군데도 다 봐주어야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사회에서 이름 있는 가문에 맏며느리가 되어, 아이를 낳지 못하고 산 여자의 일생이 보지 않았어도 가슴으로 밀려 든 탓이었다.

그러나 자발머리니 꼴불견이니 하는 것은 순전히 내가 가진 선입견이었다는 것을 아는데는 한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솔직했고, 말에는 따스함이 베어 있었으니까. 그 때부터 언니랑 일년이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얼굴 예쁘고 마음이 아름답기도 어렵고, 돈이 있어도 티 안 나게 잘 쓰기는 어려운데, 그것을 다 할 줄 아는 사람도 있구나' 생각하게 된다.

더 아름다운 것은 언니네 부부가 사는 모습이다. 학교에 도착하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전화가 울리고 "어 자기야, 잘 도착했어." 보고가 이어진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면 반대로 전화를 건다. 의무적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직도 떨리는 목소리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그들을 나는 닭살 부부라고 부른다. 그 닭살 부부를 만나면서 나는 산다는 것에 대해 보다 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고만고만하게 서로를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는 주변 모습으로 결혼의 힘든 면만 많이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나 반성도 했다. 

서로가 하고 싶은 일들을 지켜봐 준다는 것, 그것이 세월 때문에 포기한 것이 아니라 정말 사랑해서 이해하고 사는 모습은 그저 보고 있는 것으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일이다. 내가 언니를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이기고 서로를 인정한 그 세월 때문이다. 그것은 적당히 자신을 버릴 수 있어야 하고, 버린다는 것은 서로에 대한 확신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테니까. 어디 그뿐인가? 서로를 사랑으로 배려하며 몇 십 년의 세월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모습을 잃지 않고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난 그 닭살 부부가 사는 모습이 너무 좋다.

사람은 저마다 다 다른 모습을 하고, 다른 삶을 살아가지만 누구나 꿈꾸는 것은 행복일 것이다. 나는 언니를 보면서 행복도, 사랑도, 가정도 모두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누구나 만들어 가는 삶을 살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 동안 나는 불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올 한해 흙이 되어 사는 법을 배우고 싶다. 그래서 많은 나무들과 화해하고 싶다. 불이었던 동안 내가 태워 없앤 것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고 싶다. 그래서 나도 누군가에게 만나면, 아니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