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 할아버지 댁에서 깊은 생각에 잠긴 규진이.


신 형 보세요.

아침엔 아직 봄이 멀었나싶게 추워서 산들을 휘휘 둘러보았습니다. 아직 꽃기운은 없고 겨우 음침한 테를 좀 벗어나는 듯한 산들이었지만 우리는 알지요. 저러다 어느날 하루 일어나면 온 산에 진달래가 잎도 없이 저 혼자 붉게 물들어 있을 것을.

봄은 늘 그렇게 갑자기 피어나는 꽃으로 오지요. 물론 그 사이 겨울과 둘이서 보이지 않는 많은 다툼들이 있었을테지만요.

망중한.
담배 한 대 폼나게 물고 여유를 가져봅니다.

산적한 숙제와 두서없는 일거리들...두서없는 삶. 그리고 두서없는 기쁨과 우울. 

기어이 전쟁을 하고 말겠다는 미국이 밉고 착하고 검사스러운 검사들이 386세대라고 우기는 것도 밉고, 영어 못하는 나와 영어를 해야하는 현실이 함께 밉고, 책 사갔다가 교수가 수업시간에 책을 많이 안본다고 환불해달라고 가져오는 학생이 밉고...

다행이지요? 그래도 일상적인 미움들을 극복할 수 있는 내성이 내게 있다는 것이. 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시시각각 생겨나는 증오와 미움들을 어떻게 삭일 줄 모르고 난감해하던 예전의 나에 비하면 참 많이도 좋아졌지요. 풍상을 겪은 탓일까요 아니면 체념을 배운 탓일까요?

무당벌레 모양의 연필깎이가 있어요.
뭉텅해진 연필을 꽂고 몇 번 돌리면 샤프한 연필심이 되어나오는...연필 깎는 재미로 요즘 연필을 많이 쓰는데 오늘은 유심히 들여다봤더니 태국산 모나미 연필인데 피카츄가 그려져 있어요. 

문득 아들 규진이가 보고싶어지네요. 피카츄 사달라고 장난감 가게 앞에 드러누운 적이 있었는데 그날 어린 규진이를 향해서 생기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제법 진지하고 논리적인 이야기를 했어요. 뭔 이야기인지 생각은 안나는데 장난감을 사면 안되는 이유와 아빠가 오늘 피카츄를 사줄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규진이는 내 이야기를 알아듣고 포기를 했어요. 어린 아이가 그러기가 쉽지가 않았을텐데...그래서 다음날 퇴근길에 그 피카츄를 사다주었지요. 규진이는 타협과 양보를, 나는 똘레랑스를 실천한 셈인데 그날부터 아마 우리 둘이 남자로 통하지가 않았나 싶네요.

그런데 어느날 목욕을 하다가 규진이가 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더군요. 아빠는 어른이고 자기는 어린이인데 대화를 하자고 하면 무조건 아빠가 이기지 어떻게 자기가 이길 수 있냐는 거지요. 그러고보니 사실 규진이는 나와 대화를 하고부터 나를 이기기 위해 많은 논리들을 계발하고 말빨을 키워왔던 것 같아요. 적어도 자기가 진다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내가 제시한, 그리고 내가 선호하는 방법대로 해보겠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며칠 전에 규진이와 통화를 하다가 내가 투정을 부렸어요. 난 규진이가 보고싶은데 규진이는 아빠가 안보고 싶은가보다고....그랬더니 규진이가 한참 침묵하다가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자기도 생각을 많이 해봤대요. 그런데 방법이 없더라는 거지요. 보고싶은데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갈 수도 없고, 아빠도 일 때문에 못 오실거고, 결국은 방학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지 않느냐는 거예요. 나보다 생각이 더 깊지요?

별 좋아하지도 않을 아들 이야기가 너무 길었군요. 청명한 하늘 탓인가봐요. 화장실 다녀오는 길에 하늘을 보았는데 봄기운이 막 내려오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자주 하늘을 보며 살 수 있기를 바래요.
자주, 그리움과 가슴 아득한 설레임으로 살 수 있었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