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초봄 나무들을 깨워 꽃을 피우라고 속삭이던 그 비와는 달리 꽃들을 떨어뜨리고 이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려고 밤을 세워 내린다. 사람들로 인해 망가지고 열이 끓어 예년 체온보다 십도를 웃도는 기온을 보이면서도 자신이 해야하는 임무를 방기하지 않고 어김없이 계절을 만들어 가는 자연의 자기 정화 능력 앞에 고개 숙이며 내리는 비들을 왼종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도 우리가 소수임을 뼈저리게 확인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고민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를 달래며 그렇게 비가 내린다.

지난 두어 달. 학교운영위원회가 어떤 일을 하는 조직인지, 지금까지 어떻게 운영되어 왔는지, 앞으로 가야할 방향은 어디인지 알게 되면서 할 수 있는 모든 정열을 바쳐 그 일에 매달려 달려온 시간.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의 운영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엄마로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더 이상 방관하고 있는 것은 죄악이라는 당위성으로, 생전 처음 자라는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교원위원과 학부모위원이 모여 지역위원을 뽑는 자리에 갔다.

내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처음으로 학교로 가는 발걸음이 즐거웠고 당당할 수 있었다. '운영위원회 회의실을 따로 마련하라는 규정이 있지만 학교에 사정이 있을테니 차차 물어보고 바꿔가야지' 한껏 부드러운 마음을 먹으며 교장실로 들어섰다.

지역위원 추천이 이루어지고 두 명 정원에 네 명이 입후보되었다. 
"후보자가 정원보다 많으니 모셔서 후보자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좋겠습니다." 이 말이 떨어지는 순간 분위기는 가라앉기 시작했고 자기가 누구 편인지 줄서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지켜 봐야했다.
"후보자들 전부가 지역에서 한 자리 하는 사람들인데 불러다 의견을 듣는 것도 실례고, 또 떨어지는 사람은 기분이 안 좋을 거니까 그냥 투표합시다." 

아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학교운영위원회가 지금껏 학교 편의에 따라 구성되고 운영되었다고 해도 올해부터는 원칙에 따라 만들어 보자는 의지가 어느 때보다 높았고, 선거라는 것은 붙을 수도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지역위원을 명함에 파 넣을 경력 하나 더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신의 생각을 교원위원과 학부모위원 앞에서 밝힐 수 있을 것이고 설령 자신이 떨어진다고 하더라고 된 사람에게 악수를 청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랬다. 원칙을 고집하는 것은 아직도 머리가 아픈 일이고, 조목조목 대화를 하자고 하는 것은 학교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감히 아이들을 볼모로 잡히고도 교장실에서 또박또박 자기 의사를 밝히고 있는 것은 명백한 범죄행위(?)라고 마주 앉은 눈들이 말하고 있었다.

"화기 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를 마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교장선생님의 간절한 바램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부분 화기애애하다는 것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각종 폭력으로 더 이상 가족일 수 없는 사람들을 한 울타리로 묶어 가정은 소중하고 따뜻한 곳이라고 강요하고, 학부모와 교사, 학생 그 누구도 옳다고 딱 이거라고 말할 수 없는 교육 현실에 눈감고서 화기애애한 학교를 꿈꾸었다면 이제 누구도 더 이상 화기애애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까지 학교 운영위원회가 개인에겐 교육에도 관심이 많다는 명함을, 학교에는 손쉬운 동조자를 제공하는 필요충분 조건이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늘 그렇게 짜고 쳐온 판을 정당한 규칙에 맞춰 바꿔 가야한다는 것이 내 간절한 바램이다. 썩은 상처를 헝겊으로 싸매고 문제없다고 웃음 짓는다고 흐르는 고름까지 숨길 수는 없을 테니까. 

다시 비를 본다. 이제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나무들이 열매를 맺으리란 믿음을 안고 사라져가고 있는 비들을 바라보고 있다. 나도 저들처럼 포기하지 않고 살고 싶다. 때론 모든 것을 휩쓰는 장마철 폭우처럼 그렇게 살아야 할 때도 있으리라. 가끔은 땅이 타들어 가는 것을 알면서도 내리지 못하는 아픔을 겪어야 하리라. 

그렇다. 우린 소수다. 아직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의미다. 앞으로도 우리는 서로를 너무도 많이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少數' 이 단어가 저 봄비처럼 내 가슴을 적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