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4강 진출.
꿈에서도 상상해 보지 않았다는 그 신화로 인해 전국은 온통 폭발 직전의 용광로다.
그 각본 없었던 드라마에 있어 엑스트라라고 하기엔 너무나 실감나는 감동을 일궈낸 주인공들이 있다. 바로 붉은 물결이다. 그냥 단순히 운동 경기와 그것을 응원한 군중들이라고 생각하자고 다짐을 하고 봐도 밀려오는 감회를 어찌할 수가 없다.

나는 대학에 들어 온 1985년 봄, 광주 민주화 항쟁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광주사진전》이라 쓰인 전시장을 들어서면서 내가 받은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머리를 맞고 피 흘리며 쓰러진 사람들의 행렬, 머리띠에, 차 앞에 "살인마 전두환은 물러가라!!" 피로 쓰여진 플랜카드를 붙이고, 태극기를 목에 두르고 절규하는 사람들, 거적에 덮여 주인을 기다리는 주검들.......

구역질을 하면서 그곳을 빠져 나와 1980년에 나는 무엇을 했는지 되짚어 보았다. 중간고사 시험 때문에 친구 집에서 밤새기를 한 새벽,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이 라디오를 타고 울리고 있었고 나는 하늘이 무너진 듯 오열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오월 광주가 온통 피로 물드는 그 시간 나는 태연히 밥을 먹었고 학교에 갔다.

독재자의 죽음을 슬퍼한 내가, 조국의 한 쪽에서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살았던 내가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때부터 그 장본인들이 읽지 못하게 한 책들을 골라 읽으며 눈가림으로 어린 내 눈물을 뺏어갔던 사람들에 대해 정확히 알기 위해 노력했다. 오늘 그 금남로에 붉은 옷을 입고 태극기를 두른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연호하고 있다. 

또 하나 내 대학생활에 전환점이 되었던 것은 1986년 있었던 인천 민주화 항쟁이다. 
민주당 현판식이 있던 날, 인천 시가지를 점령한 사람들의 물결 속에 나는 있었다. 단상이 세워지고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올라가 자기 주장을 이야기하고 금방 단이 철거되고, 사람들은 전진하고 후퇴하며 군부독재를 타도하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오직 사람이 사람다운 세상을 위해 자신의 안위 따윈 버린 사람들. 그 속으로 돌진해 오던 페프포그와 퍼부어지던 지랄탄, 최루탄들. 흩어져 골목으로 들어갔을 때 눈가에 치약을 발라주던 사람들. 지금 그 거리에서도 사람들이 모여 오- 필승코리아를 외치고 있다.

우리 민족에게 빨갱이라는 말처럼 무서운 단어가 있었을까? 육이오의 와중에서 총보다 더 무서운 단어는 빨갱이였고, 민주화 투쟁의 과정 속에 좌경 용공이라는 서슬아래 민주투사는 모두 빨간 색 그 자체였다. 아직도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상논쟁을 들이대는 구태의연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80만 명 아니, 전 국민들이 붉은 색 옷을 입고 이 땅 방방곡곡을 메우고 있는 광경은 나로서는 눈물 없이 마주 할 수 없는 풍경이다.

그 장엄한 행진은 끝나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함께 이긴 경험이 남았다. 생면부지의 사람과 어깨동무를 하고 그것이 사람을 강하게 한다는 걸 알아버린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이제 그 기억을 가지고 더 문제가 있는 곳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려야 한다.

아직은 마주 잡은 손은 풀어야 할 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