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나는 친정아버지 제사에 갔었다. 내가 아홉에 돌아가셨으니 벌써 스물 일곱 번의 제사를 지냈다. 서른 둘 꽃 같았던 어머니는 얼굴에 주름이 늘고, 여덟 명의 친 외손자를 둔 할머니가 되어 있었고, 열 살, 아홉 살, 일곱 살, 네 살이던 네 아이는 저마다 가정을 이루고 새로운 아이들의 엄마 아빠가 되어 그렇게 올해도 아버지를 만나러 와 있었다.

어머니는 이제 더 이상 눈물을 보이시지 않으셨다. 스물 몇 해 동안 그리도 서럽게 목놓아 우시더니만 아주 담담히 '너거는 곡해라, 그만 그쳐라' 말씀하고 계셨다. 제사를 마치고 '우리 엄마 다 컸네 울지도 않고' 농담을 하는 딸들을 향해, '뭐 짜들어 잘 해놓고 간 게 있다고 울어' 하신다. '그래도 영감 불쌍하잖아. 이런 자식들 손자 손녀도 못보고' 하니까, '그건 그렇다' 하신다.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랴. 아이들이 올망졸망 네 명, 곳간에 볏가마가 쌓여 있어도 아버지가 찧어다 주지 않으면 그게 쌀이 되도록 할 줄도 몰랐던 어머니가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살았던 그 세월들을 우리가 감히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어머니는 외할아버지 맏딸이다. 열 여덟에 낳으셨단다. 아이 네 명을 낳고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대신해 어릴 때부터 동생들 챙기고 살림을 도맡아 해야했던 당신의 맏따님이 청상이 되었을 때 외할아버지 심정은 또 어땠을까? 그 세월들을 함께 견디며 부녀가 서로를 기렸을 시간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월드컵 4강이 확정되던 날, 외할아버지가 전화를 하셨더란다. '이렇게 좋은 날, 너를 생각하니 내가 가슴이 아프다'하시고는 말씀을 잇지 못하시는데 엄마가 대답했단다. '아버지 저 이제 괜찮아요, 이제 애들 다 커서 시집 장가갔고, 이제 아버지도 제 걱정 고만하세요.' 외할아버지도 이제 괜찮다는 것을 아시니 입 밖으로 가슴이 아프다는 말씀을 내신 것이리라, 그 이전에 한 번도 하시지 않은 말씀을.

그 말을 듣고 있자니 내리 사랑이란 것이 이런 것이지 싶어 가슴이 찡하다. 나는 과연 외할아버지와 어머니처럼 그렇게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겁이 나기도 했다. 호들갑스럽지 않아도 늘 물이 흘러내리듯 자식에게 닿아 있는 마음, 보이지 않아도 그것을 느끼며 부모에게 욕되지 않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우리네 부모 자식들이 산 모습이다.

내가 꾸민 집으로 돌아와 자고 있는 아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을 귀찮아 한 적은 없었나, 내 이기심으로 아이들을 내 몬 적은 없었나 자꾸만 자꾸만 뒤돌아보았다. 

어제는 저녁을 먹고 공부를 하고 있는데 작은아이가 연습장에 그림을 그려와서 열심히 설명을 한다. '이건 내가 살집인데, 이거는 침실이고 이거는 거실이고, 이거는 있잖아 나중에 엄마가 박사님 되고 유명해지면 친구들하고 공부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하는 방이고........'
건성으로 어어 하다가 자판에서 손을 놓고 쳐다 보니, 집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방이 보인다. 차를 마실 수 있는 식탁도 있고, 회의석도 마련되어 있다. 엄마로서 날마다 좌충우돌 하고 있는 동안도 아이는 나를 너무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