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랜만이다.
아이들 손을 잡고 영화관에 간 것이.
바빴다는 핑계도 있겠지만 아이들과 함께 보아도 좋을 영화가 없었던 탓이다. 그리고 '백만 관객 돌파'라는 문구 때문이 아니라 할머니와 아이가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포스터에 끌린 까닭이다.

열 아홉에 집을 나가 일곱 살 베기 아들을 맡기러 처음 고향으로 가는 엄마는 아무런 생각도 없어 보였다. 외할머니에 대한 어떤 애틋한 기억도 말해주지 않은 채, 속옷 한 통과 영양제, 그리고 아들을 남기고 떠나 버린 엄마.....
이제 그들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직 같이 산다고 할 수는 없다. 아이는 햄과, 로봇, 그리고 오락기와 함께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

어느 날, 오락기 밧데리가 나가 버리고 아이와 외할머니는 진정한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 나물을 팔아 신발 한 켤레와 자장면, 그리고 초코파이를 사 준 외할머니는 손자를 버스에 태워 먼저 보내고 걷기 시작한다.말을 못하는 할머니가 가슴을 쓰다듬는다. 바보, 병신이라고 외치던 아이가 아픈 할머니 머리에 물수건을 얹고, 밥상을 차린다. 엄마에게서 데리러 온다는 편지를 받은 아이는 할머니에게 '아프다' '보고십다' 란 단어를 가르치고 따라하지 못하는 것에 마음이 급해지자
"그냥 백지로 보내면 내가 할머니가 보낸 건 줄 알고 만나러 오께"한다. 아이는 떠나면서 할머니를 향해 가슴을 쓸어내린다.

작정이 있었던 것도, 어디 한 곳 거창한 클라이막스가 있었던 것도 아니건만 나란히 앉은 딸아이와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마도 그 영화관을 반 이상 채운 그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으리라.

만약 외할머니가 손자의 '집으로' 갔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그들은 서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었을까?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가는 날, 손자는 할머니의 언어로 자기표현을 할 수 있었을까?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그 곳에는 자연이 있었다. 오락기가 죽어 버린 순간, 아이는 그 자연과 인사를 텄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는 것들과 대면한 것이다. 텔레비전조차 없었기에 할머니를 자세히 볼 수 있었고 자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받아들일 수 있었으리라. 

빨개진 눈으로 거리에 나와 아이들과 저녁을 먹었다.
"그 아이 참 못됐다."
"할머니가 너무 불쌍하다." 둘이 논의가 분분하더니 
"근데 제일 나쁜 건 그 엄마야." 한다. 
"자기는 옷도 좋은 것 입고 있으면서 저거 엄마한테도 좀 사다 주면 될 것을. 보러 오지도 않고... 힘드니까 아 맡기러나 오고, 그럼 와서 아이만 데려가지 말고 엄마도 데리고 가든가 아님 외할머니랑 살라고 하고 용돈을 주든가....." 영화 평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다 갑자기 
"외할머니한테 전화하자, 엄마!" 한다. 참 고마운 아이들이다.

자본주의의 발달은 대가족을 해체했다. 평생 어른들 모시고 아이들 기르면서 '그것만이 내 세상'인줄 알고 살았던 것이 우리 부모세대다. 그렇다면 세대를 단절시킨 것은 우리들이다.
내 아이와 배우자만을 끌어안고 주위로 눈 돌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는 영화 속의 상우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은 아닐까? 아마도 이 영화의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건 이것이 아니었을까?

열두 시를 넘겼으니 어버이 날이다. 
"엄마, 가지도 못하고 어떻게 해, 이번에는 선물도 못 샀네."하는 딸에게
"니가 잘 있는 게 엄마한텐 선물이지. 사랑해." 하시는 우리 엄마가 무진장 보고싶은 날이다. 
나도 집으로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