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열 다섯 평 주공 아파트에 산다. 5층 건물이라 그 흔한 엘리베이터도 없어 시장을 본 날이면 헉헉대며 계단을 올라와야 하고, 경비가 없어서 아이들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닌가 가슴을 졸여야 한다. 우리 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한 명이 차지하고 있는 땅의 면적이 98평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돌아보면 참 어처구니없는 평수다. 

그러나 나같이 살림에 소질 없는 사람이 살기엔 너무 넉넉한 집이다. 또 우리 아파트 앞 화단에는 끊임없이 꽃이 핀다. 일층 할머니가 겨울에도 물을 주고 이른 아침이면 일어나 행여 무슨 일이 있을까 염려하고 가꾼 덕분에 햇살이 살포시 웃음 짓기 시작하는 이른봄이면 목련이 제일 먼저 꽃봉오리를 연다. 지금은 작약이 한창이다.
"이거 작약이죠? 너무 이쁘다." 하면
"그렇지? 밤이면 축 쳐졌다가도 아침이면 또 생생해지고 아주 신기하다니까. 이뻐 죽겠어."하시는 할머니의 사랑을 온통 다 받고 사는 그 꽃들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그리고 우리 아파트 옆 텃밭에는 온갖 나물들이 자라고 있다. 그것도 다 일층 할머니들의 공이다. 왔다 갔다 보면 언제나 그 밭에서 나물들을 돌보고 있다. 물을 주고 풀을 뽑고 고추 받침대를 세우고.... 끝이 없다.
"새댁, 오늘 상추 좀 뜯어다 먹어." 그 넉넉한 말 한마디에 일상의 무게를 벗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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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해 올라오다 가끔 마주치는 삼층 할머니는 당신도 다리가 불편해 계단 내려가기도 힘드실텐데 꼭 더운데 힘들었지 하신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올라오다가도 저절로 얼굴 색을 바꾸고 반갑게 인사할 수밖에 없게 만드시는 것이다. 그것으로 또 웃음을 담고 씩씩하게 오층 문을 열 수 있다. 

늦은 시간 아이들만 두고 학교를 가야할 때 앞집 문을 쾅쾅 두드리고 
"우리 집에 무슨 소리 나면 좀 봐줘. 혹시 애들이 전화 안 받으면 자기네 집으로 전화해도 되지" 하면 
"그집에 일 생길 게 뭐 있나. 아이들 우리 집에 와 있어도 되고, 걱정하지 말고 갔다 와요."하는 아주 이쁜 새댁과 한 층에 산다는 건 멋진 일이다.

또 우리 아파트에는 얼굴 꼴이 도대체 그게 뭐냐고, 밥 좀 챙겨 먹고 다니라고, 애들 시험이 언젠데 문제집 사주고 풀리라고 날마다 잔소리를 해대는 선배가 있다. 자기는 퉁퉁거리는 것밖에 못한다지만 어느 날은 꿀에 재운 인삼도 가져다 놓고, 방금 끓인 닭계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도 한다. 언니의 그 마음을 알기에 열심히 살고 싶어진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아파트 앞 정자에는 늘 사람들로 만원이다. 심심풀이 화투도 치고, 가끔 삼겹살에 소주가 오가기도 하고 과자를 드시다가 지나가던 아이들을 불러 하나씩 나누어 주기도 한다. 가끔 그 아이에 내가 낄 수 있어 무진장 좋다.


아는 언니가 아이도 다 크고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신문에다 아기 봐준다는 광고를 냈단다. 그 날 바로 전화가 왔는데 굳이 그 집으로 와서 아이를 봐달라고 하더란다. 자기 집에는 떠드는 아이도 없고 하니 그냥 데려와서 보면 안되겠냐고 했더니 그 코딱지 만한 집에 어떻게 자기 아이를 맡기느냐고 전화를 끊더라나. 

열이 올라 한참을 씩씩거리다보니 그 사람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것을 나누며 느끼는 넉넉함이야말로 삶이 주는 가장 큰 보너스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아파트 평수에다 삶의 의미를 걸고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행한 사람들인가?

나에게는 열 다섯 평 공간에 따라 온 너무도 넉넉한 이웃들이 있다. 그것으로 때때로 삶의 무게를 잊고, 나만 편하고 잘살고 싶은 이기심을 잠재우며, 오늘도 목련 나무 꼭대기에 앉아 이른 하루를 시작하는 새들의 재잘거림을 듣고 있다. 많이 느낄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란 것을 새삼 느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