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입춘굿-


  언제부터인지 제주도는 우리들에게 환상의 섬으로 각인되어 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여서 들뜬 마음으로 비행기에 몸을 의지했다. 바람과 돌과 인정많은 아가씨가 많다는 제주도, 그곳에 평생 처음으로 발을 딛게 된 것이다. 제주도의 입춘굿을 답사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처음 밟아보는 제주도의 풍경은 자못 나를 설레이게 했다. 야자수 길을 따라 입춘굿이 시작되는 시청으로 향했다. 벌써 100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낭쉐(나무로 만든 소) 고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제주시의 각 동마다 30-40명의 풍물패를 조직해서 여기에 참가하였고, 많은 제주시민들과 관광객이 참여하였다.
  
  ‘낭쉐’의 길을 따라 
  
  흔히들 농담으로 제주도를 이를 때 ‘외국’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제주도를 다녀와서는 ‘물 건너갔다 왔다’고 하기도 한다. 탐라국이라는 옛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주도는 그만큼 독립적인 운영과 독특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는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옛날 탐라왕은 ‘낭쉐’를 끌고 시가를 행진하고 관덕정 앞에서 선농제를 지냈다. 선농제는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이다. 이 선농제가 끝나고 나서는 관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굿이 벌어졌다. 여기에는 제주도의 심방(무당)들과 광대들도 참여하여 온갖 탐라국민들의 안녕과 농업의 풍요를 기원했으며, 온갖 놀이와 탈춤 등도 벌어냈던 것이다. 
  낭쉐는 바퀴가 달린 대형 조형물로 제작되었고 20여명의 사람들에 의해 시가 행진에 들어갔다. 이 낭쉐의 길놀이에는 풍물패와 시민들이 뒤를 이었고, 길거리의 시민들은 낭쉐의 길놀이에 자신들의 한해 소원을 담아내고 있었다. 약 1시간 30분 정도 걸린 길놀이는 드디어 옛 관아를 복원한 제주목 관아가 있는 관덕정 앞에 도착하였고, 선농제를 거행하였다. 유교식 독축고사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제주 사람들의 진지한 풍요기원을 담아내었다. 한글로 된 축문에 이러한 소망이 잘 나타나 있다.

<선농제 축문>

유세차
...... 시청에서 낭쉐를 몰아 광양로를 지나고 남문한질 내려와 중앙로 배부른 동산을 지나 여기 무근성 관덕정에 이르렀나이다 ...... 탐라국의 풍습대로라면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와 같은 나라의 풍농굿이며 탐라왕이 친경적전하던 풍습이 전해 내려온 것에 연유하여 2003년 계미년 입춘 전날에 흑우를 희생으로 풍농을 기원하던 선농제를 본으로 하여 반만년 역사의 탐라국 입춘대제를 복원 계승하고자 하나이다 ...... 바람과 비 순조롭게 하시어 농사풍년, 육축번성하고 탐라국 아이들 무럭무럭 자라게 하여 주시고 탐라국 제주시민들의 가내 모두 평안하게 하시옵고, 나랏일 잘되고, 학교나 관공서, 사회 시민단체 모두 하는 일 다 잘되도록 궂은 액운을 막아주시옵소서 그리고 2003년 새해 새날을 아름답게 열어 주시옵소서
차린 제물 비록 변변치 못하오나 많이 드시옵소서
상향

위 제문에는 입춘을 맞이한 제주도민의 새해 소망이 가득 담겨 있다. 관민이 함께 기원하여 적극적으로 풍요와 안녕을 얻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육지에서는 별로 쓰지 않는 표현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배부른 동산’ 같은 경우이다. 제주도에서는 평상시의 말을 그대로 명사로 활용하는 용례가 많다. 

제주의 봄축제로 거듭나길

입춘날에는 제주도 심방들이 연행하는 본격적인 굿과 여러 예술단체들이 선보이는 공연이 펼쳐졌다. 여느 굿판이나 매한가지이겠지만 제주의 역사를 고스란히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할머니들이 역시 굿판의 주인공이었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못 알아 들었지만 심방(제주도 무당)과 할머니들은 서로 묻고 화답하면서 입춘굿을 펼쳐나갔다. 또한 여무들의 고깔춤, 강태공서목시놀음(목수가 집을 짓는 과정을 극화함), 새 쫓는 마당, 영감할미놀음 등 갖가지 굿놀이들이 연행되었고 각 예술단체들의 공연도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700여명에 이르는 풍물패들이 길놀이만 수동적으로 참여하고, 정작 입춘굿 본마당에는 함께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의 길놀이를 보다 가치있게 만드는 작업과 함께, 입춘굿 내내 함께 할 수 있는 방안 모색이 절실하다. 제주 입춘굿의 가장 큰 동력원인 그들을 본 마당에 세워낼 때 진정한 제주 사람들의 봄축제로서 위상이 갖추어질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날인 5일에는 열린정보센터 6층 영상실에서 ‘탐라국 입춘굿놀이 발전방향 세미나’가 발표자 주강현, 한양명, 황루시, 토론자 이애주, 문무병, 김수현, 김동전, 심규호 등 관련 분야 학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띤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제주도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점은 사투리나 자연경관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사람들이었다. 전통적으로 행해져 온 여러 핍박과 고난, 4.3과 같이 현대사에서 받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제주 사람들은 낙천적이었고, 남을 위할 줄 알았다. 사람이 중심이 되고 사람이 먼저 고려되는 그들의 언행 속에서, 또한 말 끝에 붙는 ‘수까’와 ‘마시’의 부드러움 속에서 제주도의 참된 가치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