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침내 범종은 지옥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佛音을 울리고
(梵鐘은 악기로 쓰는 일반 종에 비하여 청정한 사찰에서 사용하는 맑은 소리의 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1. (배경과 등장인물 소개) 

자장면 한 그릇으로 빈 속을 속이고서 복주여중으로 나갔다. 아무도 없었다.
토요일 늦은 2시.
'내가 날짜를 잘못 알았나?' 


이윽고 류춘우 선생이 그 로시난테(그가 타는 차는 과연 박물관급이다)에 딸을 태우고서 나타났다. 아니나 다를까 최형석 선생은 학교 음악실 그늘 아래에서 수줍은 듯 나타난다. 소나 탈 차를 세우고서. 그리고 문제의 한 사람. 박 영 오 


그를 잠깐 추적해본다. 언제가 운주사에 대해서 친절한 해설을 붙였던 분. 그 분은 날 보았다 하지만, 그 분에 대한 나의 기억에는 어둠만 묻어날 뿐이다.
현재 안동중학교에서 틈날 때마다 문화답사를 이끄신다는 매력적인 선생님.  4년 동안이나...... 
미안한 마음에 사이버 주택을 들렀다.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거기도 비가 오나요? 
어제 저녁부터 내리는 비가 오늘도 그치지 않고 
내립니다. 
아내는 나보고 몇 가지 심한 병(病)을 가지고 있는 
중환자라고 염려합니다. 
비 내리는 날 떨어지는 빗물이나 먼 산 바라보며 
그리움에 젖는 병, 들꽃만 보면 넋이 빠지는 병, 
낙엽 떨어지는 가을이면 꼭 도지는 계절병...... 
이래저래 따지고 보니 내가 앓고 있는 병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연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빠져 병이 들고,
빗물에 젖어있는 수련에 취해 병이 들고, 
그리움이 못내 깊어 또한 병이 들어,
이래저래 헤어나지 못하고 비 내리는 연못가에서 
심한 합병증을 앓고 있습니다. 
거기도 비가 오고 수련이 피었나요?" 라고 


이런 분과 함께 길을 나선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이렇게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은 네 명이 모두다. 


가자 성혈사를 향해. 늘어진 일상으로부터, 아니 지옥 같은 내 마음으로부터 떠나자. 
                                          '종소리 들리지 않은가?' 


2. 물고기 모양의 목어가 빛 바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는 곳. 
(木魚는 나무로 긴 물고기 모양을 만들어 걸어두고 두드리는 불구로서, 배 부분을 비워 나무 막대기로 배의 양쪽 벽을 두드려서 소리를 내게 한다. 수생계의 미물들을 구제한다고 한다)


聖穴寺.(聖僧이 수도한 토굴)
성혈사는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세웠다고 한다. 지형에 따라 건물을 자연스럽게 배치한 성혈사 나한전은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곳이다.(하기야 의상대사가 세우지 않은 절집 찾기가 더 힘들기도 하지??)
나한은 부처님들 중에서 유일한 인간의 몸으로 현신하신 석가족의 모니(성자)를 직접 모신 제자들이다. 이를테면 엘리트 그룹들이다. 이에 대해 저항하며 대중불교운동을 시작한 것이 보살운동이다. 

우린 지금 나한전의 꽃살(연꽃) 무늬 문짝을 보고 있다. 
이윽고 박 선생님의 말씀이 이어진다. 그의 글이 길지만 옮겨본다. 묘사가 적절하다고 생각되기에..... 

"잎이 무성하고 꽃과 봉오리로 가득한 蓮池에 학이 다리 한쪽을 슬쩍 구부리고 긴 부리로 물고기를 잡고 있고 게는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기어가고 있으며 개구리가 연잎 위에서 두려운 듯 웅크리고 있다. 잉어인 듯한 큼직한 물고기가 학을 아랑곳하지 않고 연잎 밑을 유유히 헤엄치며 돌아다니고 있으며 위쪽에는 또 한 마리의 학이 급히 날아 내려오고 있다. 
자세하게 보면 그리 크지 않은 용 한 마리가 연잎 사이로 슬금슬금 기어가고 있다. 그런데 앞으로 내 딛고 있는 앞발과 슬쩍 들고 있는 뒷발이 역동적이다. 그리고 날카로운 발톱이 비록 작지만 자신이 당당한 용임을 말해주는 듯하다.
머리를 두 갈래로 묶어 앙증스럽게 머리 위에 올려놓은 동자는 연잎을 배로 삼고, 연꽃 봉오리 줄기를 노 삼아 놀고 있는 모습이 여유롭게 느껴진다. 연밥이 다 드러나도록 활짝 핀 연꽃, 알맞게 핀 연꽃, 아직 꽃봉오리인 연꽃이 문 가득 피어있고, 연잎에는 아직 푸른색이 남아 있어 옛 모습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연못 주위에 있을 만한 모든 식 동물을 불러들여 함께 어우러진 모습이 바로 극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누가 이 문살에 목어 소리를 찍어놓았던가?
빛깔은 시간 속으로 스며들었지만, 희미한 푸른 기운과 붉은 기운이 눈길을 오래도록 머물게 한다. 

그리고 돌로 만들었다는 본존과 나한은 신기하기도 하고 천장의 격자 무늬는 고풍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덧칠을 해 아쉬운 점도 있다. 


3. 구름 모양의 운판은 허공을 날아다니는 날짐승을 향하여
(雲板은 구름 모양의 넓은 청동판으로서, 이를 두들겨 맑은 소리를 내게 하는 일종의 타악기이다) 

 그들은 죽어서 새가 되었을까?
도호부에서 면사무소가 된 그 역사의 틈새에서........
나는 지금 순흥면사무소 마당에서 그 날의 핏빛 울음소리를 듣는다.
새들을 쫓아 잠시 그 날을 되새겨보자 

                                                   피끝마을

세종이 병약한 문종을 염려해 김종서와 집현전 학사들에게 문종의 보필을 부탁하나 문종은 재위 2년만에 죽고 12세의 어린 왕세자 단종이 즉위하게 된다. 그러나 믿었던 수양은 배신을 하고, 단종은 영월로 유배를 떠나니.....
1457년 9월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을 비밀리에 만나 단종 복위를 모의한다. 그리고 부근의 토호들의 도움을 받아 격문을 돌리고 고을 군사를 모아 단종 복위를 계획하나 거사를 눈치챈 관아 노비가 풍기 관아로 달려가 밀고함으로써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일설에 의하면 관아 기생과 관계를 가진 관노가 이일이 탄로 나자 처벌받을 것이 겁이나 단종 복위 모의를 밀고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금성대군은 안동으로 암송되어 처형되고 도호부로서 권세를 누리던 순흥은 역모의 땅이 되어 고을 자체가 혁파되어 없어지게 된다. 그리고 복위운동에 개입된 순흥의 세력가와 많은 주민들이 죽계천 청다리 부근에서 참수되는데 붉은 피가 개울 따라 10여 리 밖에 있는 마을까지 흘러가 마을 이름을 '피끝 마을'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런 사실을 알려주려는 듯 지금도 피끝마을이라는 마을 표지석이 길옆에 서있다. 청다리는 지금은 2차선 도로가 지나가는 시멘트 다리지만 그때는 해마다 다시 놓는 나무다리였다. 처형이후 원혼들이 청다리 부근을 떠돌아 밤에 다리를 건널 때는 소꼬리를 잡고 가야 무사하다는 속설이 있다. 


 모두들 도솔천으로 가셨는지. 아니면 새가 되어 부릅뜬 눈으로 오늘을 지켜보고 있는지는 알 길 없으나, 그 때나 지금이나 역사의 순환은 변하지 않는 법인가? 끊임없는 배신.
아니러니컬하게도 한 쪽엔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두 양요를 기억하시라)에 세운 척화비(내용: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 어찌 오늘날의 상황과 비슷한 점은 없는지? 여러분의 선택은 어느 쪽이신지?)가 서 있으나, 그 옆으로 공덕비가 늘어 서 있고, 백성들의 원한처럼 훼철한 자국이 남아 있다. 

자투리 이야기 하나 - 청다리(지금은 제월교라 되어있다. 아마 제월광풍의 준 말이겠지.)
이 다리가 어릴 때 자주 듣던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다리의 원조이다. 소수서원 바로 이웃에 있다. 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과 마을처녀와 정분이 나서 아이를 낳게 되면 "다리 밑에 버리라" 해놓고 우연히 주운 것처럼 해 본가에 데려가서는 다리 밑에서 주운 아이라며 키웠다는 것이다 

왕생하시라는 운판 소리 뒤로하고 부석사 법고 소리를 들으러 간다. 


4. 소가죽으로 만들어진 법고는 축생의 무리를 향하여
(원래 法鼓는 금속으로 만든 북이라는 뜻으로 金鼓라고도 하는데, 평면으로 된 원형에 한쪽은 막히고 한쪽은 터진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막힌 쪽을 방망이로 쳐서 소리를 내게 된다.)

어차피 인간 되기 글렀으면 뱀은 되지 말아야 할텐데, 내 어찌 '소'의 선량한 덕성을 욕심낼까나. 
늘 이리저리 기어다니는 내 일상의 배반들..... 결국 내가 나 자신을 부정할 때는 설 곳도 없겠지. 
에라 모르것다. 오늘은 가슴이나 두드려봐야지, 아니 맞아야지. 

꽃비 내리는 무량수전에서 삼 배 올리고서 안양문을 되짚어 범종각 앞에 우리는 멈추어 섰다. 

마침내 장엄한 일상을 마름질하듯 법신비로자나불인 듯 장엄하게 노을지고 있다. 
북소리 두두둥둥둥 두두둥둥둥 어둠 속에서 이 세상 잠든 모든 것들을 일깨우고 있다. 

돌아오는 길. 류춘우 선생의 가슴팍에는 어린 부처가 잠들어 있다. 반개한 눈빛으로 잠들어 있다. 희주(? 류선생의 딸이름)는 그렇게 안기어 우리를 안고 있다. 

하루가, 그 보잘 것 없는 일상이 저물어 간다. 또다시 아득한 범종 소리. 지옥의 중생들을 제도하고 있다. 

     (이들 사물은 또한 각각 시방세계에 있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의미를 담고 있다.) 


                                 - 피곤한 몸으로 함께 한 秋水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