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칠정논변에 대한 새로운 이해 
-법치주의의 관점에서

                    
중년의 나이인 43세 때『주자대전』을 처음 만났다는 퇴계, 이후 주희의  인격과 학문에 매료되어 주자학의 세계에 거침없이 빠져 들었던 그가 주자학을 완전히 소화하고 이제 그의 학문을 ‘퇴계학’이라고 이름할 만한 독자적 색깔을 드러낸 것이 언제였을까?『주자대전』을 만난 해로부터 치자면 16년이 지나 그의 나이 59세 때 시작된 고봉 기대승(1527-1572)과의   사단칠정논변의 과정에서였다. 퇴계 사상을 대표하는 학설인 ‘理發說(理의 운동성 인정)’이 바로 여기서 등장한다. 이렇게 보면 이 사단칠정논변이야말로 사상가로서 퇴계의 생애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건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사단칠정논변은 그리 호감가는 사연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 같다. 실생활과 무관한 ‘공리공담’에 불과하다는 견해가 대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퇴계 하면 어지러운 현실과는 담을 쌓고 형이상학적 사변만을 일삼았던 한가로운 관념론자 정도로 인식하는 데에는 이 사단칠정논변에 대한 피상적 이해도 크게 한 몫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퇴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위해서는 이 사단칠정논변을 어떻게 새롭게 해석해내느냐가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 논변은 사상사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목차>

1.사단칠정논변의 배경(1) -『주자대전』의 보급

2.사단칠정논변의 배경(2) - 16세기 사화(士禍)의 시대

3.무엇을 위한 논쟁이었나

4.사단칠정논변의 쟁점 - 퇴계와 고봉의 차이
(1)논쟁의 발단
(2)쟁점 - 퇴계와 고봉의 차이를 중심으로
(3)사단칠정논변의 실천적 의미 ① - 퇴계의 경우
(4) 사단칠정논변의 실천적 의미 ② - 고봉에서 율곡으로

5. 사단칠정논변에 대한 현대적 의미 
(1)‘공법과 사법’ 관계의 비유를 통해서
(2)다양성과 감성의 시대 ; 퇴계의 한계 - 고봉의 장점
(3)자본주의 시대의 퇴계-퇴계와 삼성




1. 사단칠정논변의 배경(1) -『주자대전』의 보급


퇴계 개인의 학문역정을 넘어 한국사상사 차원에서도 사단칠정논변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외래사상인 주자학이 바야흐로 ‘조선의’ 사상으로서 개성을 드러내면서 조선 전역에 광범위하게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실천 면에서만 보면 주자학은 조선 건국을 이끈 이념 역할을 함으로써 14세기 말에 이미 불교를 제치고 지배사상의 지위를 획득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론 면에서는 아직 ‘주자학의 조선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6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16세기 조선의 학자들은 ‘사화’(士禍)가 빗발치던 시대 ‘인간’의 문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주자학자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영역을 논쟁을 통해 개척함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길을 열었다. 그 선봉에 선 것이 바로 사단칠정논변이었다. 

그 논변은 영남의 퇴계와 호남의 고봉 간에 무려 8년(1559-1566)에 걸쳐 이루어졌고 이후 조선의 전지식인들이 그들의 논변에 주목했던 것이며 그 파급력은 성리학 정신을 명실공히 조선의 시대정신으로 도약케 했다. (이는 오늘날 서양철학의 처지와 비교된다. 서양철학계는 이 땅에서의 토착화를 위해 조선시대와 같은 뜻깊은 논변을 남긴 바 있는지).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 논변이 16세기 중후반에 이루어졌던 배경은 무엇일까? 필자는 이 시기 주자학에 대한 이해의 심화가 ‘주자학 텍스트의 광범위한 보급’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이러한 측면에서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16세기는 아시다시피 사화의 시대였고, 그 질곡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사림들 사이에서 사상적 노력이 왕성하게 전개되던 때였다. 그들 사유의 밑천이 된 사상서들이 『성리대전』『사서집주』『오경대전』『근사록』『소학』등이었다. 그런데 정암 조광조가 화를 당한 기묘사화 이후인 중종대 후반에 중요한 텍스트 하나가 등장하게 된다. 바로 『주자대전』이라는 책이었다.
흔히들 ‘조선왕조 5백년은 주자학이 지배한 시대’라고 말하지만, 적어도 텍스트의 보급면에서 보면 16세기 중반까지는 주자학이 지배적이었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주자학’ 하면 무엇보다 주자학의 집대성자 주희(회암, 1130-1200)의 학설체계가 중심이 됨은 물론이다. 그런데 정작 주희의 언설 전모가 수록된 『주자대전』이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쇄, 반포된 것은 16세기 중종년간이었던 것이다. 주자대전은 본문만 해도 무려 100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고려말의 안향을 위시하여 여러 사람들에 의해 주희의 저술이 수입, 유포되었다고 하나 대전의 전부는 아니었고 읽어 본 사람도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대다수 지식인들은 『성리대전』이나『사서집주』『근사록』등을 통해 주희의 학문을 부분적, 간접적으로 접할 수 밖에 없었다.

퇴계가 『주자대전』을 처음 만난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의 나이 어느덧 중년에 접어든 43세 때였다. 퇴계에 의하면 “주자대전은 우리나라에 유통되는 것이 거의 없고, 있어도 겨우 있는 것으로 본 사람 역시 아주 드문 책이었다.” 후세에 ‘동방의 주자’라고 불린 퇴계도 중종 38년(1543)에 교서관에서 인출, 반포되기 까지는 그러한 책이 있는 줄도 몰랐다고 술회하고 있는 것이다.
주자대전과의 만남은 퇴계의 생애에 있어서 일대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퇴계가 ‘본격적인’ 주자학자의 길로 접어든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퇴계는 주자대전을 통해 주희의 인격과 학문에 매료되었으며, 이후 주자학의 세계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게 된다. 주자대전을 읽기 시작하던 때의 퇴계의 모습을 제자인 학봉 김성일은 이렇게 전해 주고 있다.

“선생이 일찍이 서울에서 『주자대전』을 구해 오셨는데, 문을 닫고 들어 앉아 읽기 시작하시더니 여름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으셨다. 주변에서 더위에 몸을 상할 수 있다고 걱정하면, 선생은 말씀하시기를, ‘이 책을 읽으면 문득 가슴 속에서 서늘한 기운이 일어나서 저절로 더위를 잊어버리는데, 무슨 병이 나겠는가’ 하셨다.”

퇴계가 40대 후반에 관직에서 은퇴를 결심하고 이후 사퇴를 반복하게 되는 것은 45세 때 일어난 을사사화(1545)로 인한 정치적 환멸감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주자대전』과의 만남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퇴계의 은퇴는 도피가 아니었다. 그에겐 계획이 있었다. 향리로 은퇴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바로 이 방대한『주자대전』을 연구할 계획이었다.
그는 사화의 시대를 극복하는 데 정치적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고 있던 차에 이 주자대전을 만났고 바로 이 주자대전이야말로 난국을 돌파하는 데 적절한 처방을 담고 있는 빛나는 교범이라고 판단했음에 틀림없다. 말하자면 주자대전의 내용을 소화하여 전환시대의 이념으로 이 땅에 토착화하는 것, 이것이 훈구-척신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사림의 시대를 여는 효과적인 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는 주자대전을 읽고 또 읽었다. 제자의 전언에 의하면 하도 읽어서 책이 너덜너덜해져 자획이 거의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고 한다. 마침내 그는 주자대전을 완전히 소화하게 된다. 다음 퇴계 자신의 말에서 보듯이. “이로부터 차츰 그 말이 매우 맛이 있고 그 이치가 참으로 무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 중에 특히 편지가 더욱 감동을 느끼게 하는 바가 많았다.”
그리고 퇴계는 후학들이 방대한 주자대전을 요령 있게 깨칠 수 있도록 자신이 감동을 받은 편지글들을 가려 뽑아 『주자서절요』를 편찬해내었다. 이 때가 퇴계가 주자대전을 만난 지 13년이 되는 1556년(퇴계 56세)이었다. 거기다 서문을 붙인 것은 2년 후 1558년(58세), 사단칠정논변이 시작되기 바로 1년 전이었다.

한편, 주자대전이 간행되고 영남 지역에서 이처럼 퇴계가 주자학 대가의 길을 걷고 있을 때 호남 지역에서도 한 사람의 주자학 고수가 성장하고 있었다. 그는 퇴계 보다 무려 26살이나 어린 새파란 젊은이였다. 바로 고봉 기대승(1527-1572)이었다.
고봉이 주자대전을 언제 처음 보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어쨌거나 그가 주자대전을 집중적으로 탐구한 때는 20대 후반의 일로 보인다. 고봉은 25세 때 대과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권에 들었으나 당시 시험관이었던 윤원형의 농간으로 (고봉은 정암 조광조와 함께 대표적인 기묘사림인 복재 기준의 조카였기 때문) 낙방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 부친상을 겪게 되는데 이 기간에 주자대전에 깊이 빠져들었다고 한다.

31세 되는 1557년에 부친상을 벗으면서 그는 한 의미 있는 연구 결과물을 내놓게 된다. 방대한 주자대전을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3권으로 요약한 『주자문록』이라는 저술이었다. 이는 퇴계의『주자서절요』와 비견되는 작업이었다. 『주자서절요』가 중요한 편지글들을 가려 뽑은 것이라면, 『주자문록』은 주자대전에서 중요한 논설과 편지, 차자(箚子, 상소문), 기문(記文) 등을 골고루 선별, 발췌한 명실공히 ‘주자대전 요약본’이라 할 만한 것으로, 내용적으로도 우주론, 심성론 뿐만 아니라 정치, 현실의 개선에 관한 경세론을 아우르는 것이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특별한 스승도 없이 독학으로 그 방대하고 난해한 주자대전을 독파하여 3권으로 압축하다니, 고봉은 놀라운 재능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것도 오늘로 말하자면 고시생(考試生)의 처지에서. 그야말로 인문학 천재라고 할 만한 인물이 고봉 기대승이었다. 윤사순 전 고려대 교수도 고봉의『주자문록』편찬 작업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