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주자의 차이



                                                                           퇴계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주자학과 구별되는 퇴계학은 존재할 수 있는가.
                                                                           퇴계학을 독창적이라고 볼 수 있는가.



                                     <목차>

                      1. 퇴계의 정체성(독창성)을 문제삼는 이유

                      2. 퇴계와 주희의 차이(1) -  12세기 남송과 16세기 조선의 차이

                      3. 퇴계와 주희의 차이(2) - 사상은 흐른다 

                      4. 퇴계와 주희의 차이(3) -  텍스트의 문제, 그리고 '심경부주'(心經附註)

                      5. 퇴계학의 독자성 -  정암 조광조를 통해서




1. 퇴계의 정체성(독창성)을 문제삼는 이유


필자는 어떤 사상이 ‘독창적이냐 모방적이냐’ 라는 문제는 그리 중요한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상은 시대의 고민에 대한 응답이다’ 라는 말에 동의한다면, 그 사상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얼마나 실천력을 가졌느냐 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퇴계의 경우를 보자. 그는 훈구파로 통칭되는 당시 지배 계층의 부패와 전횡, 도덕적 타락이 시대를 어둡게 하고 있던 16세기 ‘사화의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주자학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그 주자학을 주체적으로 소화하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처방으로 제시하였으며, 실제로 그것이 훈구파 시대를 극복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말하자면 퇴계는 ‘사상을 통해’ 훈구파 시대를 청산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필자는 바로 이러한 사실 자체가 퇴계의 특별함을 웅변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지금 퇴계학의 정체성 내지 독창성 문제를 거론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독창성’을 강조하는 우리 학문의 풍토와 이에 편승해서 ‘현실에 대한 처방’이라는 사상의 본질적 측면은 외면한 채 퇴계를 ‘주희의 모방자’요, ‘주희의 아류’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깎아내리는 항간의 속설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속설들이 퇴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조장함으로써 퇴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긴 이러한 항간의 속설이 득세하는 데에는 퇴계 자신이 원인 제공을 한  측면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퇴계 스스로는 독창적이고자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퇴계는 “주자는 내가 스승으로 삼는 분이며 또한 천하고금이 으뜸으로 삼는 분이다”라고 공언할 정도로 주희를 존경하였고, 주희를 표준으로 삼았으며, 주희의 정맥을 잇는 것으로 포부를 삼았던 사람이다. 퇴계의 이런 태도는 외관상 율곡과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율곡은 퇴계에 대해 “모방하는 맛(依樣之味)이 많다”, “하나 같이 주자의 설을 따랐다 (一從朱子之說)”고 하였으며, “퇴도는 성현의 언행을 준수하고 실천하는 사람 같되 그 스스로 발견한 곳은 보이지 않는다.”(退陶似遵行聖賢言語者 而不見其有自見處)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율곡 자신은 스스로의 독창성을 자부했다. 즉,
“성인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내 주장은 바꿀 수가 없다.”
“만일 주자가 참으로 理氣를 호발(互發)한다고 생각했으면 주자도 잘못된 것이니 어찌 주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 
퇴계 자신의 발언에 기초하여 퇴계의 모방성 문제를 악의적으로 이용한 세력도 있었다. 바로 일제 식민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퇴계의 학문 태도를 ‘사상의 종속성’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하면서 퇴계학 나아가 조선 유학 전반을 헐뜯은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핵심 인물인 다카하시 도오루(1878-1967)라는 사람의 글을 보기로 하자.

“퇴계의 힘에 의해 조선 유학은 완전히 주자학파로 귀일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학자들의 사상을 구속하여 학계가 단일평판(單一平板)하게 된 책임도 대부분 퇴계에게 돌리지 않으면 안된다. 퇴계의 학문은 조선 유학자의 사색의 틀이요, 넓게 말하자면 전 조선인의 학문의 틀을 대표한다. 그러나 요컨대 창조적인 생각과 발명에서는 매우 빈약하여 결국에는 주자학의 가장 충실한 조술자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경서의 해석에서도 『주자집주(朱子集註)』를 금과옥조로 했고, 주자 이전의 옛날 뜻을 찾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무릇 사상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백지 상태에서 사유가 전개되어 나오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어떤 사상가든지 앞선 시대 혹은 동시대 사상가의 선행 작업을 실마리로 해서 풀어나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사상의 세계에서는 하늘 아래 전적으로 독창적인 것은 없는 셈이다. 
그것은 퇴계가 스승으로 삼았던 주희(1130-1200)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북송오자’(주돈이, 소옹, 장재, 정호, 정이)의 선행 작업이 없었다면 주자학이 어찌 성립할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본다면 퇴계가 주희를 존경하였고 그리고 많은 것을 주희에 의거하였다는 사실 자체를 가지고 퇴계를 단지 ‘주희의 조술자’요, ‘주희의 아류’에 불과하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만물은 흐른다. 사상도 흐른다. 흐르는 같은 물 속에 우리는 두 번 다시 들어갈 수 없다. 퇴계는 주자학의 물결을 타고 있었지만, 퇴계의 사유는 여러 가지 면에서 주희와는 입장을 달리 하고 있었다. 퇴계학의 정체성을 논하는 학자들의 견해를 참조해서 정리하면 대체로 다음 3가지 측면에서 그 차이를 이야기할 수 있다.

첫째, 문제의식의 차이다. 주희는 12세기 남송의 현실 속에서 이론을 세운 사람이고, 퇴계는 16세기 조선의 현실 속에서 주희의 이론을 받아들인 사람이다. 그들이 비록 같은 개념을 사용하고 있을지라도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이 달랐다면 구체적 메시지와 강조점은 다를 수 있지 않을까?

둘째, 주희와 퇴계 사이에는 350여년의 시차가 존재한다. 그 사이 주자학은 재야의 사상에서 제도권 주류의 사상(관학)으로 도약하면서 비판과 도전(상산학/양명학)도 경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퇴계에 이르기까지 주자학을 둘러싼 사상사적 환경의 변화를 우리는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텍스트의 문제다. 그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생각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음은 물론이다. 퇴계는 주희를 존경했다고 하지만, 전적으로 주희의 저술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다. 만약 퇴계가 중요시한 텍스트 중에 주희의 사유와는 거리가 있는 종류가 포함되어 있다면?




...........이상  김호태 저, <<헌법의 눈으로 퇴계를 본다>>, 미래를 여는 책, 2008,  168-171쪽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