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퇴계의 부활을 위하여



퇴계는 20세기 내내 안개에 쌓여 있었다. ‘식민사관’과 ‘서구중심주의’라는 이름의, 우리 역사와 사상에 대한 멸시와 곡해를 조장해온 아주 불순한 안개였다. 때때로 저 안개 너머엔 놀라운 모습의 퇴계가 있다는 풍문이 떠돌기는 했다. 하지만 안개로 굳어진 고정관념이 너무나도 완강하여 그 풍문은 쉽사리 묻혀버렸다. 퇴계는 많은 사람들에겐 여전히 고리타분한 옛 사람일 뿐이었다. 보수와 소극, 은둔, 도피, 공리공담, 사대, 모방 등의 이미지로 연상되는, 다만 천원짜리 지폐 속 얼굴만이 익숙할 뿐 현실적으로는 이 시대에 별 의미 없는 존재였다.

그 안개가 바야흐로 걷혀가고 있다. 식민사관과 서구중심주의에 맞선 일단의 
역사학자들과 동양철학 연구자들의 피땀어린 노력이 빛을 발하면서였다. 이제 적어도 조선시대가 식민사관이 주장하듯 그토록 형편없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과 조선의 성리학사상 역시 단순한 공리공담에 불과한 게 아님은 분명해지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학술’ 차원에서는.

더불어 조선의 대표적 사상가인 퇴계에 대한 관심도 늘어나고 연구 수준도 질적 양적으로 크게 성장하여 그 동안 안개 속에 감추어졌던 퇴계의 면모들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다. 근래의 통계에 의하면 지금까지 발표된 퇴계에 대한 연구논저는 무려 1,400여 편에 달한다고 한다. 하여 어느 역사학자는 “퇴계에 대한 연구는 그 미세한 분야까지 좁고 깊게 천착되어 이제는 더 구명해야 할 곳이 없을 정도로 손대지 않은 부분이 거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동양철학전공 학자 한 분도 “퇴계의 사상에 관해서 나온 논문이 이미 가위 한우충동(汗牛充棟)이라 할 만하다”고 증언하고 있다. 덕분에 우리는 전문 연구자들의 글을 통해서 고리타분하고 볼품없는 퇴계가 아니라 조선의 정신문화를 대표하는 장려(壯麗)한 모습의 퇴계를 그려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오랫동안 퇴계를 둘러싸고 있던 짙은 안개가 걷히고 참신한 퇴계의 모습이 드러나면서 새로운 과제가 우리 앞에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는 퇴계학의 현대화 작업이요,
둘째는 그 성과를 학계 밖으로 널리 확산시키는 작업이다.


(1) 퇴계의 현대화

지금까지는 식민사관과 서구중심주의라는 안개를 헤치고 퇴계가 어떤 사람이며 그의 사상이 어떠한 것인가를 구명하고 해석해내는 일 자체가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음과 같은 시비조의 반문에도 진지하게 응답해야 할 때이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이냐”

“퇴계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그래봐야 왕조시대의 인물에 불과하지 않느냐”

“21세기 첨단 과학기술의 시대에 전근대 농업경제시대의 퇴계가 무슨 가치가 있느냐” 

“지역 화합이 과제인 시대에 소위 ‘영남학파’의 원조인 퇴계를 내세워서 뭘 하자는 것이냐”

사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정당한 것이다. 우리가 5백년 전의 퇴계를 오늘에 논하는 이유를 근본에서부터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즉,
‘왜 이 시대에 퇴계인가.’ 
역시 관건은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이라는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퇴계를 논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느냐이다. 퇴계학 연구자들의 앞선 작업을 토대로 해서 퇴계의 ‘현대적 의미’를 포착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퇴계의 정신이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의식과 실천에 영향을 주고, 나아가 바람직한 미래를 열어가는 데 의미 있는 메시지로 살아나도록 해야 한다. 
요컨대 새로운 퇴계상이 5백년 세월의 강을 뛰어넘어 21세기 오늘의 현실에 생생한 실천적 메시지를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첫째는, 퇴계에게 현대적인 옷을 입히고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업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퇴계의 사상을 오늘날의 언어와 문맥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그의 대표적 학설인 리발설(理發說)과 사단칠정론, 대표작인『성학십도』 등이 오늘과 같은 민주와 법치, 과학과 자본의 시대엔 어떤 의미로 표현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인다. 

둘째는, 퇴계 사상을 대중 지향으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시다시피 퇴계는 왕조시대의 인물이다. 그의 철학은 당시 정치의 중심이었던 ‘임금’과 ‘사림’(士林)이라고 하는 지식인 집단을 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모든 사람들이 임금인 민주(民主)의 시대이며, 지식 정보화 사회의 도래와 함께 모든 사람이 지식인인 시대이다. 그러므로 퇴계의 사상은 이러한 시대 대중들을 위한 사상으로 재구성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셋째는, 퇴계학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퇴계는 주로 문학, 역사, 철학 등 인문학의 울타리 내에서 논의되어 왔다. 퇴계는 오늘날의 학자들처럼 전공이라는 걸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아니다. 인간과 사회, 그리고 우주ㆍ`자연을 두루 통찰했던 사람이다. 그는 또 상아탑 속 이론가가 아니었다. 시대 현실에 고민하였고 그 현실의 변화를 기획하였던 실천철학자였다. 이러한 퇴계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분과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의 울타리에서 퇴계를 해방시킬 필요가 있다. 어쩌면 법학과 정치학, 행정학, 경영학 등 사회과학과 공학, 의학 등 자연과학과 같은 현실과 직접 맞닿아 있는 실용 학문의 영역이야말로 퇴계학의 메시지가 더욱 절실한지 모른다. 법도, 정치도, 행정도, 경영도, 과학도 모두 ‘인간’이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관여하는 어느 분야이든지 퇴계는 다가갈 수 있다.3)


(2) 퇴계를 세상 밖으로  -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글쓰기

변변한 논문 한편 없던 1970년대 이전과 비교해보면 그동안 이룩한 퇴계학계의 연구성과는 경탄할 일이지만 이는 퇴계학계 내에서의 성취일 뿐이라는 사실도 냉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퇴계에 대한 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세상 사람들의 퇴계에 대한 관심도를 조사해본 결과 학계 밖 현실은 학계의 넘치는 연구 성과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학계 밖에서의 퇴계에 대한 인식은 한숨이 나올 정도로 빈곤했다. 대중들의 관심은 거의 무관심, 하기는 인문학 위기 시대에 퇴계만이 홀대받고 있는 것은 아니니 그렇다 치자. 

문제는 퇴계학계 밖, 자신의 전공과 관련하여 퇴계를 읽고 논하는 학자급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의 퇴계관에는 근래 퇴계학계의 넘치는 연구성과가 거의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 식민사관 이래 퇴계에 대한 뿌리 깊은 고정관념은 여전히 완강한 듯 했다. 퇴계는 여전히 보수와, 소극, 관념, 모방, 사대 등등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요즈음 학문간의 소통과 대화, 경계 허물기, 통섭이라는 말이 학계의 화두가 되고 있다지만 적어도 퇴계에 관한 한, 퇴계연구자와 기타 철학연구자와 역사학자, 문학자, 정치학자, 법학자들의 퇴계관은 따로 놀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을 돌아 볼 때, 무엇보다 퇴계학연구자들 스스로의 학문 태도에 대한 반성이 절실히 요청된다고 하겠다. 즉 연구자들은 세상 사람들이야 퇴계를 어떻게 생각하든 퇴계학 연구 목록에 새로운 논문을 하나 추가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는가. 
이제는 자신의 주장이 퇴계학계 밖으로 제대로 침투될 수 있도록 여론을 환기하는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글쓰기가 필요한 때이다. 퇴계학계 밖의 사람들, 예를 들면 역사학자들, 문학자들, 정치학자들, 법학자들의 퇴계관에 대해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리하여 퇴계학계 밖에 만연해 있는 퇴계에 대한 부정적 여론과의 일대 투쟁이 필요하다. 몰(沒)퇴계, 반(反)퇴계적 분위기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퇴계의 부활은 사실 공염불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삼봉 정도전의 『불씨잡변』과 같은 작업이 퇴계학계에도 요청된다고 할까.

퇴계 자신의 학문에 대한 태도를 통해서도 우리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퇴계는 온화하고 인자하고 조용한 성품의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그의 학문적 태도는 뜻밖에도 매우 공격적이고 비판적이어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퇴계는 현실과 거리를 둔 상아탑 속 초연하고 한가로운 이론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학문 행위는 전투 행위와 같았다. 

퇴계의 비판 대상은 중국과 조선을 가리지 않았다. 양명학이 조선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게 퇴계 탓이라고 할 정도로 중국의 왕수인에 대한 혹독한 비판은 유명한 예이다. 퇴계는 그 밖에 나흠순, 진헌장, 오징 등 중국의 저명 학자들을 비판하였고, 조선에 있어서도 화담 서경덕을 비롯해서 많은 학자들이 그가 세운 비판의 칼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4) 이처럼 학문적 영역에서 그는 매우 전투 지향적인 사람이었다. 온화한 성품과 달리 퇴계는 왜 학문에 있어서 만큼은 그토록 치열했던가. 

퇴계의 이와 같은 학문 태도를 두고 사람들은 그를 ‘편협한 사상가’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는 퇴계가 오늘날의 한가한 지식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실천적 지식인임을 간과한 비판이다. 퇴계는 이른바 ‘우환의식(憂患意識)’5)을 가진 전형적인 유학자였다. 퇴계의 학문은 훈구-척신의 시대를 극복하고 사림의 시대를 열기 위한 실천적 목적에 집중되어 있었다. 퇴계에게 이론은 실천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론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감이 없이는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지식인 대중(士林)들의 지지와 공감을 얻어 내는 방법이 무엇이었는가. 바로 이론 투쟁이었다. 그러므로 퇴계의 태도는 관용을 모르는 ‘편협한 지성’의 표현이 아니라 실천을 지향하는 ‘적극적 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