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노무현 
                      - 노무현 정부의 과거청산 작업과 퇴계의 교훈



노무현 정부의 공헌 중 하나는 과거사 정리를 분명히 한 데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반쪽의 성공일 뿐이었다. 
해방 이후 60여 년 해묵은 과제를 이제사 집행한 것이지만 덕분에 집권 기간 내내 ‘친북좌파’ 정권이라는 딱지에 시달려야 했다. 
청산작업이 역사 정의를 회복하는 데 일조하였음에도 현실적으로는 역풍이 더 우세하여 정치적 소득은 적자 상태를 면치 못했다. 
“정의의 깃발로 승리하는 역사를 만들고 싶다”던 대통령의 호언도 이젠 무색해져 버렸다. 
그들은 왜 이리 손해보는 장사를 했을까.

과거청산은 사실 굉장히 민감한 주제이다. 
왜냐하면 현 주류 기득권층의 뿌리가 바로 과거에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들의 반발을 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힘이 있다. 
언론과 재벌, 정치, 법조 등 힘이 있는 곳이면 그들은 다 관계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정치 권력만 없을 뿐(참여정부 당시 기준), 그들은 막강하다. 
그들은 대체로 학벌도 우수하며 전략적 두뇌도 굉장히 발달한 사람들이다. 
이것을 일러 ‘개혁대상은 개혁세력보다 강하다’고 하는 것이며, 성리학의 리기론(理氣論)으로는 ‘기강리약(氣强理弱 기는 강하고 리는 약하다)이라고 하는 것이다. ..註1)

“氣는 비록 理에서 나온 것이지만, 氣가 일단 생(生)한 이후에는 理가 氣를 관제(管制)할 수 없게 된다. 理는 氣 속에 머물고, 일용간의 운용도 모두 氣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이니, 氣가 강하고 理는 약할 수밖에 없다.”

단순히 정치권력 하나를 장악했다고 해서 과거청산의 성공과 현실 정치에서의 승리를 동시에 일굴 수 있다고 한다면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과거청산을 위해서는 치밀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세련된 철학 이 필요하다. 
이것을 환기시키는 사람이 바로 퇴계이다.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오늘날의 386과 비슷한 세력을 만날 수 있다. 
조선의 386이라 할 16세기의 조광조와 기묘사림들이 그들이다. ..註2)
그들은 임금(중종)의 신임을 얻고 있었지만 역시 막강한 훈구파들에 비하면 소수파였다. 
그들은 과거청산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위훈삭제’(가짜 공훈 박탈)가 결정적인 카드였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은 역풍을 불러오고 그들의 실패로 이어졌다. 

우리는 퇴계가 조광조의 실패를 목격한 사람이라는 걸 놓쳐서는 안된다. 
그가 19세 때 일어난 기묘사화는 평생의 화두가 되었다. 
왜 조광조는 실패하였는가. 
퇴계는 조광조의 방향은 옳다고 보았다. 
64세 때 쓴 조광조 일대기(조정암선생행장)에 보이는 바와 같이 퇴계는 전환기 조선의 나아갈 바를 제시한 사람으로서 조광조를 높이 평가하였다. 
퇴계가 아쉽게 생각한 것은 그 성급함과 무모함이었다. 

조광조는 막강한 훈구파 세력을 상대로 단지 임금의 신임 하나 믿고 거침없는 개혁 드라이브를 전개했다. 마치 ‘맨손으로 범을 때려잡으며, 걸어서 황하를 건너려다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사람’처럼. ...註3)
조광조는 용기는 있었으나 공자가 말한 바 ‘반드시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고 조심하며 충분히 계획을 세우고 신중히 행동하여 일을 성취하는’ 그런 敬의 정신이 부족했고, 그것이 결국 실패를 낳았다고 퇴계는 보았다. 
아무리 뜻이 높고 이상이 좋다고 하더라도 敬의 내공이 부족하면 인간의 노력이 힘을 발휘할 수 없다. 
필자는 퇴계가 敬의 사상을 특별히 강조한 것은 조광조의 실패에 대한 반성적 성찰에서 힘입은 것이라고 본다. 

그는 조광조의 포부와 방향은 옳다고 보면서도 막강한 훈구파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신중하고 사려 깊은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조광조의 성급한 액션을 비판하고 있는 그의 글을 보자.

“조정암은 타고난 바탕이 뛰어났지만 학문의 힘이 가득차지 못하고 그가 하는 바가 지나침이 있었기에 마침내 일을 그르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만일 학문이 충실하고 덕기(德器)가 이루어진 다음에 세상에 나가서 일을 담당하였더라면 그 성공은 쉽게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여기서 정치적 실천에 앞서 ‘학문’과 ‘덕기’의 배양을 강조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정치적인 힘만으로는 보수 기득권 세력에게 당할 수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퇴계가 중년 이후 철학적 작업에 매진하게 되는 것은 조광조의 실패에 대한 반성에서였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미완의 새벽을 위해서였고 보다 철저한 승리를 위해서였다. 

그는 철학을 세움으로써 시대정신이 바로 사림세력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그것은 정신적인 기선 제압이요, 철학을 통한 과거 청산 작업이었다. 
그가 주자학을 선택한 것은 주자학이 그러한 실천적 목적에 적합한 논리를 제공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자학이 담고 있는 ('도덕과 정의' 를 표상하는) 理 우위의 논리가 그것이다.  

퇴계는 더 나아가 理의 능동성(理動-理發-理到)까지 주장한다. 
이는 사림세력의 적극적인 역할을 환기하고자 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와 더불어 敬의 정신을 강조한 점이다. 註4)
敬은 조광조의 실패를 거울 삼아 적극적인 액션에 앞서 ‘내공’을 기르고 ‘덕기’를 함양해야 함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理의 능동성과 敬은 실천적 맥락에서는 ‘적극성’과 ‘소극성’이라는 상호 모순된 의미를 우리에게 준다. 
'理의 능동성’과 ‘敬’의 동시적 강조, 이걸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아마 퇴계의 메시지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이 아닐까 싶다.

“혼돈의 시대엔 이론은 좌경적으로, 실천은 우경적일 필요가 있다.”

이는 16세기 사화(士禍)의 시대를 살아간 퇴계의 전략을 생각케 한다. 
퇴계의 이론은 치열했고, 실천은 물러나서 이루는 역발상의 신중하고 온건한 방식이었다.
‘치밀한 프로그램 없이 독선적 도덕주의와 비현실적 이상주의, 실속 없는 해체주의에 빠져 파괴와 해체만 했을 뿐 창조와 건설에 실패했다’고 일각에서 비판받고 있는 노무현 정권과 386, 다음과 같은 퇴계의 말은 모름지기 시대의 거악과 싸우는 개혁세력이라면 새겨들어야 할 경고의 메시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개혁세력이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라는 것, 
퇴계는 『성학십도』에서 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만약 잠시라도 틈이 나면 만 가지 사욕이 일어나, 불길 없이도 뜨거워지고 얼음 없이도 차가워진다. 털끝 만큼이라도 틀림이 있으면 하늘과 땅이 바뀌게 되니, 삼강(三綱)이 침몰하고 구법(九法)도 썩어버린다.”

이는 바로 오늘 대한민국의 비극적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노무현 정부 최대의 실패는 한나라당에 정권을 넘겨준 것이다.
우리는 그 실패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기 전에 내부에서 먼저 살필 필요가 있다.
미래의 성공을 위해서.



<참고>

1) 『논어』의「술이(述而)」편에서, 자로가 공자에게 ‘선생님께서 삼군(三軍)을 통솔하게 되신다면 누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맨손으로 범을 때려잡으며, 걸어서 황하를 건너려다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는 사람과는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고 조심하며 충분히 계획을 세우고 신중히 행동하여 일을 성취하는 사람과 함께 할 것이다.’ 

2) 기묘8인 (기묘사림들 중 급진파 핵심 인물)
- 기묘사화(1519) 당시 최초로 체포된 인물들

ㆍ조광조 (38세) ; 대사헌
ㆍ김식 (38세) ; 대사성 &#8211; 대동법의 김육의 고조부
ㆍ박훈 (36세) ; 승지
ㆍ김정 (34세) ; 형조판서
ㆍ김구 (32세) ; 부제학 &#8211; 조선시대 4대 명필의 한 사람
ㆍ윤자임 (32세) ; 승지
ㆍ박세희 (29세) ; 승지
ㆍ기준 (28세) ; 홍문관 응교 &#8211; 퇴계와 사단칠정논변을 펼친 기대승의 숙부

3) 리와 기의 두 측면

         천즉리(天卽理) … 만물의 근원, 원리, 원칙, 법칙,
*리(理)
         성즉리(性卽理) … 인의예지(도덕과 정의, 진리). 공(公), 이념

         음양&#8729;오행 … 물질적인 재료, 기운, 작용, 생명력
*기(氣)
          몸… 욕망, 사(私), 현실

4) 경(敬)에 대하여

① 주일무적(主一無適) ; 정신을 집중하고 다른 곳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② 정재엄숙(整齋嚴肅) ; 몸가짐을 단정하고 가지런하게 하며 마음을 엄숙하게 유지한다.
③ 상성성법(常惺惺法) ; 언제나 맑은 상태로 깨어 있는다.
④ 기심수렴(其心收斂) ; 마음을 잘 거두어들여서 잡념이 생기지 않도록 한다.
⑤ 외(畏) ; 마음을 항상 두려운 듯 간직한다.
⑥ 수사검점(隨事檢點) ; 마음이 일에 따라 어떻게 움직이나 점검한다


                ............이상 <<헌법의 눈으로 퇴계를 본다>>, 미래를 여는 책, 2008, 229-231쪽에서 
                                    <<퇴계혁명>>, 미래를 여는 책, 200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