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새삼스러운 것이 아닐 정도로 우리 시대의 인문학은 무기력하기 그지 없습니다. 
인문학자들이 우리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무시하고 상아탑 속에서 고답적인 원리만 좇아왔던 데에 큰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우리 인문학이 처한 현실에 대해 고뇌해왔던 한 인문학자의 글을 소개할까 합니다. 
재작년에 세상을 뜨신 국민대 최종욱 교수의 글입니다.
다음은 故 최종욱 국민대 교수의 유고집 " 이 땅에서 철학하는 자의 변명"(사회평론, 2002)의 서문의 글입니다.
최종욱교수는 1949년 경남 남해에서 출생하였고, 2001년 8월 22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땅에서 철학하는 자의 변명"


인문과학이 위기에 빠져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경우, 학부제 실시와 특히 IMF 이후 문학, 역사, 철학 등과 같은 학과들에 지원하는 학생들의 수가 격감하고 있거나 아예 지원자가 없는 상황 속에서 현실성을 갖고 표출되고 있다. 교육부는 수요자 중심으로 교육체계를 바꾸겠다는 의지를 개혁의 의지로 승화시키면서 인문과학의 위기를 호소하는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다. 오히려 교육부는 <신자유주의>라는 기치를 들고 대학의 구조조정을 강요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앞에서 우리의 인문과학자들은 학부제와 IMF 그리고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기 전에 스스로 지금까지의 관행에 대해 스스로 반성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수요자들이 인문과학을 외면하는 이유는 한국의 인문과학자들이 수요자들의 욕구와 관심을 외면하거나 도외시한 결과이며 그것에 대한 수요자들의 보복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문과학은 수요자들의 수적 과잉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없었다.

한국의 인문과학자들은 이러한 현실에 안주하면서 치열한 문제의식과 성실한 연구자세도 없이 자신들의 전공으로 간주되는 사상가에 대한 독점권을 행사하면서 그들의 사변적인 사상과 이론에만 매달려 왔다. 서양학을 하는 연구자들은 서구의 현실과 괴리된 서구 사상의 추상적 관념과 논리 속에서, 동양학을 전공하는 연구자들 또한 우리의 현실과의 연관성은 물론이고 고전 사상을 배태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의 연관성을 상실한 채 고전의 폐쇄적인 훈고학적 해석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이러한 탈맥락적이고 탈역사적인 연구와 교육은 전문화라는 미명 아래 스스로에 대한 자기반성의 길을 봉쇄하고 관행화되었다. 이런 관행은 급기야 학문과 현실, 학문과 실천의 합일을 목표로 하는 동양학의 이념마저 해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점에서 한국 사회에서 인문과학은 철두철미 현실과 괴리된 사변적 학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물론 현실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려는 학문의 성격상 피할 수 없는 사변성과 추상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그러한 수준을 넘어서 아예 현실을 무시하거나 현실을 거론하는 것을 <비학문적인> 태도 혹은 정치적 의도를 가진 <불온한 것>으로 터부시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터부는 <가치중립>이라는 미명하에 또는 <반공>이라는 허울 아래 정당화되었다. 이러한 정당화된 터부는 <비판>을 생명으로 하는 인문과학의 자기존립의 토대 자체를 해체하였고 <시대비판>을 철학의 임무로 규정한 헤겔의 주장을 사문화시켰다. 현실의 외면 내지 암묵적인 침묵을 통해 억압적 현실을 호도하거나 정당화하는 데 앞장섰던 한국의 인문과학이 한국의 현실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겨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상은 철학자들의 목소리가 당당한 현실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서구의 경우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예컨대 하버마스의 독일이나, 소위 포스트모더니스트로 자처하는 데리다와 리오타르의 프랑스, 신실용주의저인 로티나 롤스의 미국에서는 철학자들이 현실 속에서 제 목소리를 가지고 있고 또 사회가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피드백 구조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이런 피드백이 있는가? 우리 사회에 현실적인 힘과 호소력을 가진 강단의 철학자, 역사학자, 문학자가 과연 몇이나 되는가?

이러한 왜곡된 분위기 속에서 한국의 인문과학은 먼저 인문과학의 수요자들로부터 소외당하고 또 외면했던 한국사회로부터 소외당하는 이중적 소외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소외는 <신자유주의>에 의한 한국사회 전체에 대한 구조조정과 그 파급효과로 나타나는 취업난을 통해서 더욱더 심화되었다. 신자유주의는 <효용성> 또는 <실용성>을 기치로 걸고 모든 지식을 상품화 한다. 지식의 중상주의화라는 신자유주의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채 아무런 대응 수단을 갖지 못한 한국의 인문과학은 이제 그 존립마저 위협받는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이러한 급변한 상황 앞에서 한국의 인문과학자들은 스스로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나 바기비판 없이 모든 잘못을 <신자유주의>에 전가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상황이 인문과학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인문과학의 위기는 동서를 넘어선 보편적 현상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위기는 현대성의 원리를 <실용성>으로 파악한 헤겔로부터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정보의 사업화를 경고한 리오타르에 이르기까지 서구적 지성 속에 공통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리오타르의 경고는 무시된 채 지적 상품화된 형태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했고, 강단의 인문과학자들은 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상품이 유행하고 상품화되는 동안 아무런 문제 없이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인문과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문화상품의 유행을 방관하거나 아니면 적극적으로 유포시키면서 자신들의 활동 공간을 확장할 수 있고 또 자신들의 목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기회로 착각하는 동안, <포스트모더니즘>이 자신들의 토대를 해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한국의 인문과학자들이 우상시했던 푸코는 그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인문과학의 기율적 성격을 폭로하면서 "인간학적 사유와 인본주의적 근본확신"에 기초하고 있다는 서구 인문과학 자체의 신화를 해체하는 데 전력을 쏟고 있었고 또 데리다는 정보사회에서는 정보의 상업성이 지배적인 패러다임으로 변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인문과학자들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해 수준이 얼마나 피상적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피상적인 이해와 소외된 현실에 대한 학문적 소외, 소외시킨 현실과 수요자들부터의 이중적 소외로 인하여 한국의 인문과학은 스스로 위기를 자초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초한 위기에 대한 한국 인문과학자들의 진지한 반성과 비판은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반성과 자아비판 대신에 그들은 오히려 신자유주의의 상업화에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희생양으로 삼아 자신들의 과오를 은폐하고 호도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방어 전략으로 자신들의 과오를 면제받으려는 얄팍한 속셈은 위기를 해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위기를 더욱더 심화시킬 뿐이다. 잘못된 관행을 그대로 온존시킨 채 모든 비난을 신자유주의에 전가시킨다고 해서 우리의 인문과학이 직면해 있는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신자유주의의 위협을 호도하거나 방관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문제의 역점은 먼저 고착되고 왜곡된 관행의 벽을 해체하고 나서, 즉 이중적 소외에 대한 진지한 자기 반성과 비판을 수행한 후, 신자유주의에 대항할 때 비로소 인문과학 위기에 대항할 수 있는 계기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사회과학도 이러한 현실로부터 이중적 소외와 신자유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결코 아니다. 한국의 사회과학도 자신의 연구대상인 한국 현실을 외면하고 왜곡된 현실을 정당화하는 데 일조한 바 있다. 그러나 사회과학은 그 성격상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고 또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도 없다. 그것은 사회과학의 성격이 비판적이냐 아니냐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사회과학 자체의 존재론적 이유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문과학은 그 성격상 현실과의 연계점은 사회과학처럼 강하지 못하다... (최종욱 교수는 이 시론을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 끝-

<참고> 최종욱 교수는...

연세대학과 동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였고, 독일 보쿰대학교 철학과에서 "딜타이(W. Dilthey)의 역사이성비판의 과제"란 몬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독일 뮌스터대학교에서 교환교수를, 국민대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또한 월간지 <<사회평론 길>>과 계간지 <<이론>> 등에서 편집위원을, 학술단체협의회, 철학사상연구회 각각에서 공동대표를 맡는 등, 상아탑 속의 이론가보다 실천하는 철학자에 중점을 둔 삶을 살았습니다. 


이상 조사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