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는 이론편향의-소극적-현실도피적 인물이었는가" 
 - 기당 현상윤의 <조선유학사>에 나타난 퇴계관의 비판적 검토 -


논자는 퇴계를 본질적으로 실천철학자로 본다.
아니 보다 엄밀히 말하면 이론과 실천의 조화를 추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퇴계는 이론(知)과 실천(行)의 관계에 대하여 "지행병진知行竝進"이라는 말로 자신의 신념을 표현했다. "수레의 두 바퀴요 새의 두 날개이다"라는 비유로 知와 行의 관계를 설명하기도 했다. 그만큼 퇴계는 이론만큼이나 실천적 측면에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의 대다수 사람들은 퇴계를 "이론에만" 깊이 천착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 현실 정치에서는 소극적이요, 난국에 처해서는 도피적 태도를 취했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아마도 퇴계에 대한 이런 인식은 뿌리깊은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 최초의 근대적 유학 통서로 평가받고 있는 기당 현상윤(호 기당; 1893~?)의 "조선유학사"(1949년刊)에도 보면 정암 조광조의 실천적 태도와 비교해서 퇴계를 이론중심적-소극적-현실도피적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기당이 가진 학계에서의 신망과 위치(독립운동가-초대 고려대 총장) 그리고 그의 저서 "조선유학사"가 당시로서는 기념비적인 저술이었다는 점 등에서 볼 때 이러한 견해가 퇴계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에 미친 상당한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논자는 기당 현상윤의 "조선유학사"에 나타난 퇴계관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서 퇴계의 사상 경향을 새롭게 인식해보고자 한다.

1949년에 출간된 현상윤의 <<조선유학사>>는 성리학이나 실학은 물론이고, 조선 유학 전체에 대하여 편견과 선입견 없이 객관적 변별력을 가지고, 역사적 흐름을 학문체계로 정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기당 현상윤은 3.1운동에 가담하여 결정적인 업적을 이루어 '48인의 하나'로 지목받아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인 동시에, 고려대 초대 총장으로 재임하다가 납북되었다. 그는 광복 후 조선의 유학사를 누구보다도 먼저 집필하여 간행하였고, 그것은 체계적인 조선 유학사의 효시라는 것만으로도 이것은 획기적인 저술이었다.

거기서 그는 퇴계에 대해서 한마디로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퇴계는 이론유학理論儒學의 대표자요 종장이며 정주학의 충실한 후계자이다."(80쪽) 
그러면서 그는 뒷부분에다 이렇게 쓰고 있다.

"퇴계에 관하여 또 한마디 부기附記할 것은 퇴계의 진퇴와 사풍에 관한 것이다. 대개 퇴계는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기묘사화에 징懲하여 삼읍이진三揖而進하고 일양이퇴日讓而退하여 나아가기에는 겁怯하고 물러가기에는 용勇하였던 관계로 당시의 사풍士風은 그 영향을 받아, 크게 변한 것이 있었다. 즉 퇴계 이전에는 士子가 독서수업하는 것은 제세안민濟世安民을 위하는 것이라 하야 <내가 아니면 그 뉘가 창생蒼生을 구하리요> 하는 태도와 기개로, 다투어 조정에 서기를 힘썼으나, 퇴계 이후에는 학자들이 산림山林에 은둔하여 오직 고답자수高踏自守와 독선기신獨善其身을 일삼고, 비록 징소徵召가 있다 할지라도 용이히 출마치 않는 것을 도리어 명예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퇴계의 영향이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진실로 학문상으로 보아서는 퇴계의 공헌이 막대하고 또한 우리가 퇴계에게 계유를 받은 것이 많으나, 그러나 정암(조광조) 당시의 사류士類들에게서 볼 수 있던 시국을 자임自任하는 열성과 용기를 퇴계 이후에는 다시 사류들에게서 볼 수 없게 된 데 대하여는 우리는 이것을 퇴계의 소극적 태도에 십분 관련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현상윤, "조선유학사", 현음사, 1949년 초판 - 1982, 99쪽>  

기당 현상윤이 "朝光"지(1941년 8월)에서 소설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1888~1968)와 나눈 대담 속에서도 보면 역시 정암 조광조를 함께 거론하면서 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다.

"글쎄 말이오. 내가 졸업 논문에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란 것을 썼는데 나는 이렇게 봅니다. 조선유학을 네 단계로 본다면, 첫째로 문장유학文障儒學 점필재 김종직을 중심으로 해서 그 문인들의 문장 숭상하던 때, 다음으로 실천유학 정암 조광조의 영기발랄해서 자기네 학문을 직접 사군택민事君澤民하는 실천 수단으로 옮기던 때, 그 다음에 퇴계 중심으로 일어난 이론 유학, 그 다음은 순전히 당쟁유학이지마는.
이렇게 본다면 조선사상사에 있어서 정암과 퇴계는 양대 대립된 존재로서 그 두 시대에 사풍士風이 전연 다른 것이 있습니다. 정암 때는 정암부터 그렇지만 모두 젊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네들은 그 공부를 가지고 직접 사군택민하는 데 실천을 하려 했지만 퇴계 이후부터는 심心, 성性, 정情 토론만 했지 어디 직접 정치에 공헌한 것이 무엇인가요?"(임형택-강영주 편,"벽초 홍명희와 [임꺽정]의 연구자료", 사계절,1996, 184쪽)

이 글을 통해서 볼 때 기당 현상윤은 이상적 유학정신을 "직접" 현실정치에 뛰어들어 시대를 경륜하는 적극적 실천성에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표상으로서 폭포수와 같은 열정적 실천으로 한 시대 선명한 발자취를 남겼던 정암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 유학정신을 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조선유학사"에도 보면 정암 조광조와 뜻을 같이 했던 젊은 기묘사림들 김정(기묘사화 당시 36세), 김식(38세), 김구(32세),  기준(28세), 김안국(42세), 김정국(35세) 등을 묶어 "至治主義 유학파의 諸人"이라 하여 특별히 기술하고 있는 데서도 그것을 볼 수 있다.

생각컨대 위의 글을 통해서 볼 때 기당은 조선의 멸망에는 조선의 유학정신이 이러한 정암과 기묘사림들에 의해 표출된 적극적 실천성을 상실한 데 사상적 원인이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기는 망국의 설움을 당한 일제치하의 지식인으로서 기당은 특히 이런 점이 유감스러웠는지 모른다. 여기까지는 논자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 하겠다.

그러나 기당이 정암과 퇴계를 절연시키고 사풍士風의 쇄락에 대해 퇴계에게 그 책임을 묻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논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더구나 퇴계가 죽고 17세기 인조반정(1623) 이후 조선의 후반기 250여년을 율곡 계열인 서인-노론 정권이 주도해왔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근거없는 견해가 아닌가 한다. 기당은 퇴계를 부분적, 평면적, 피상적으로만 이해했다는 생각이 든다. 
기당의 발언과 관련하여 논자의 견해를 피력하면 이렇다.

사상과 시대현실과의 밀접한 연관성을 인정하는 논자의 일관된 신념에서 볼 때 기당의 제일의 오류는 시대현실과의 맥락 속에서 퇴계의 세계를 고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기당은 "정치적" 실천을 유교정신의 최우위의 지표로 삼고 있지만 퇴계의 시대는 정암의 경우처럼 정치일선에서의 적극적 실천을 허용하는 시대가 아니었다.
퇴계의 20대 청년 시대만 해도 기묘사화가 일어난 직후라 다수의 사림士林들이 조정에서 퇴출당하고 정국이 아주 경색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성리학의 기본서인 "소학"과 "근사록"을 끼고 다닌다고 "기묘의 무리"라 하여 비웃음을 살 정도였다고 하니, 이 시기의 성리학은 말하자면 불온시되던 사상이었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과거합격해서 입신양명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둔다면 모를까, 뜻을 가진 자의 입장에서는 출사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기묘사화가 일어난지 십수년이 지나 퇴계가 30대에 접어들면서 사림士林에 다시 우호적인 분위가 조성되고 중종은 훈구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역시 사림들을 등용하기 시작하게 된다. 이 때 퇴계도 과거를 통해 출사하게 된다는 것이다(34세).
퇴계가 출사했다는 것은 적어도 퇴계가 현실정치에 뜻을 두었음을 의미한다. 훗날의 퇴계의 학문적 업적에 가려 이 시기의 퇴계의 모습이 제대로 조명되고 있지 않지만 몇몇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퇴계의 정치적 식견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0여년 후 을사사화(1545)가 터지게 된다. 아마도 기묘사림의 정신이 다시 소생하고 있다고 판단되던 시점에서 터진 이 을사사화가 퇴계에게 있어서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지 않았나 싶다. 퇴계는 마침내 현실정치를 통해서는 시대의 변혁을 기획함에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보다 근본적인 차원으로 실천의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는 것이다(49세).
그것이 바로 "학문과 교육"이었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주자학자로서의 퇴계는 50대 이후의 모습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당이 "퇴계 이후는 심心, 성性, 정情 토론만 했지 어디 직접 정치에 공헌한 것이 무엇인가요?"라고 말했을 때, 그 퇴계는 50대 이후의 퇴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봉 기대승과의 사단칠정논변도 바로 이 시기의 일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위의 대담 속의 기당은 퇴계의 일부분만을 알고 있는 셈이다. 그나마도 퇴계가 말년에 헌신한 학문과 교육활동의 실천적 의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퇴계는 정암 조광조의 실패에 대한 반성에서 당대 현실을 장악하고 있는 훈구파 집단의 두터운 벽을 직시하고, 소수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이고 급진적인 방식에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우회적이고 간접적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방향을 모색하였다. 그것이 바로 “교육”이었다. 그는 새로운 철학으로 무장한 신세대 젊은이들을 교육함으로써 다음 시대를 기약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교육을 통해 엘리트들의 저변 확대를 도모한 것이라 하겠다. 
퇴계는 특히 이러한 목적을 위해 교육제도의 개혁도 추진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서원건립운동 이었다. 
흥미있는 것은 퇴계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