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철님께 - 퇴계가 <주자대전>을 만나기 전의 학문경향은 어떠했는가


저의 글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안동넷에 글을 올리면서 혹시 잘못된 내용을 전파하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항상 갖고 있습니다. 저의 글이 독단으로 흘러 저에게 특별한 공간을 마련해준 안동넷의 모처럼의 시도에 흠이 가지 않을까 조심스럽습니다.
그래서 저는 퇴계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면서 학계의 여러 의견들을 두루 인용하고 함께 소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각설하고 그럼 질문에 답변을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퇴계는 정통 주자학자로 평가받고 있지만 정작 퇴계의 학문 편력을 살펴보면 주자학의 정수가 담긴 <주자대전>을 처음 만난 것은 그의 나이 중년에 접어든 43세때 였다는 사실을 저는 앞에서 지적하였습니다. 퇴계 자신 주자서절요(朱子書絶要) 서문에서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회암 주부자(晦菴朱夫子)께서는 아성(亞聖)의 자질을 타고 나서 하락(河洛; 정호와 정이의 학문)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그리하여 그 도가 높고 덕이 우뚝해서 그 이룬 공업(功業)이 훌륭하고 위대하였는 바, 경전(經傳)의 지취(旨趣)를 발휘해서 이를 천하 후세의 사람들에게 가르친 것은, 실로 귀신에게 물어보아도 의문이 없을 것이며 후세에 성인이 나오더라도 다른 말을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선생께서 돌아가시자, 두 분 왕씨(王氏)와 여씨(余氏)가 선생의 평소의 시문(詩文)들을 모아서 편찬하고 그 이름을 <<주자대전(朱子大全)>>이라 하였는데 여러 책이 된다.
그 중에는 여러 공경대부와 문인들, 그리고 여러 지구(知舊)들 간에 주고 받은 편지가 무려 48권이나 된다.
그러나 이런 글들이 우리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이를 얻어 볼 수 있는 선비가 자연 적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가정(嘉靖) 계묘년(1543)에 중종대왕이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 이를 인출해서 반포하였다. 그리하여 비로소 신(臣) 황(滉)이 이런 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얻어보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것이 어떤 책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이 책을 싣고 계상(溪上)으로 돌아와서는 날마다 문을 닫고 조용히 들어 앉아서 이를 읽었다.
이로부터 차츰 그 말이 매우 맛이 있고 그 이치가 참으로 무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 중에 특히 편지가 더욱 감동을 느끼게 하는 바가 많았다. ..." 

퇴계의 이 글을 통해서 우리는 흥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즉 흔히들 조선왕조 5백년은 주자학이 지배한 시대라고 합니다만 16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퇴계뿐만 아니라 조선의 지식인 사회 일반에도 주자학의 주요 텍스트라 할 <<주자대전>>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왕조 5백년은 주자학이 지배하던 시대"라는 말은 재고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그건 그렇고, 그럼 서동철님이 질문하신 바 주자대전을 만나기 전의 퇴계의 학문 경향은 어떠했겠습니까?
퇴계의 학문 경향을 파악하는 데는 퇴계가 남긴 당시의 저술을 검토하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퇴계가 성리학에 관한 저작을 남긴 게 50대 이후의 일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자대전>>을 만나기 전의 학문경향을 퇴계 자신의 저술을 통해서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퇴계가 주자대전을 만나기 전에는 주로 어떤 텍스트를 읽고 있었느냐 하는 것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퇴계의 학문경향을 파악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참고로, 비록 퇴계가 남긴 저술을 통해서는 직접적으로 알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 시기의 퇴계의 지성이 남달랐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서 확인해볼 수가 있습니다.
퇴계 선생 연보에 보면 33세 때(연보에는 23세라고 나와 있지만 착오인듯) 성균관에서 만난 하서 김인후(1509~1560; 인촌 김성수의 13대 조부)가 퇴계에 준 작별시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부자(夫子)는 영남의 수재요, 이두(李杜; 이백과 두보)의 문장에 왕조(王趙; 왕희지와 조맹부)의 글씨로다.
(夫子嶺之秀 李杜文章 王趙筆)"

여기서 하서 김인후는 "夫子"라는 극촌칭을 써서 30대 청년 퇴계의 인품과 학문의 탁월함을 칭송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 당시 퇴계가 읽은 주요 텍스트를 통해서 <주자대전>을 접하기 전 퇴계의 사유 경향을 간접적으로 추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학자들은 퇴계 사유의 근간이 된 3대 텍스트로 "주자대전" 외에 "성리대전"과 "심경부주"를 들고 있습니다 (이상은, 퇴계의 생애와 학문, 예문서원, 1999, 83∼107쪽 참조).
성리대전은 퇴계가 19세 때 처음 접한 책으로서 퇴계를 성리학의 세계로 인도한 책이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주희철학과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즉 성리대전은 주희의 학설도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지만 송대의 여러 성리학자들의 학설을 망라한 책으로서 성리학에 관한 백과전서식 텍스트라고 해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텍스트는 퇴계가 33세(23세라는 설도 있습니다) 때 성균관 유학시 접했다고 하는 "심경부주"라는 책입니다.
퇴계언행록에 제자인 간재 이덕홍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선생이 일찍이 성균관에 유학했을 적(1533)에 황씨 성을 가진 상사를 방문하여 처음 <심경부주>를 보았다. 그 주석은 모두 정주어록이어서 다른 사람은 구둣점조차 떼지 못하였으나, 선생은 문을 걸어 닫고 여러 달 동안 연구를 거듭하였더니 저절로 알 수 있었다." 

저는 이 심경부주라는 책이 퇴계의 퇴계의 학문 경향을 파악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심경부주는 <心經>에 부주를 가한 책을 말합니다. 즉 중국 송나라 때 학자인 진덕수(1178∼1235)가  사서삼경, 정주(程朱) 등의 글에서 <마음>에 관한 격언을 뽑아 모아 편찬한 책이 "심경"인데, 다시 명나라 때 정민정(1445∼1499)이 보충을 하고 상세한 주를 단 것이 <<心經附註>>라고 합니다.
이 <<심경부주>>의 내용상의 특징은 주자의 해석을 모범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주자의 특징적인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理氣論적인 방법론을 쓰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경부주>>에는 理學, 道學, 혹은 性理學이란 용어를 쓰지 않고 오직 心學이라는 용어만 사용한 것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심경부주를 퇴계는 아주 높이 평가했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퇴계는 이 책을 "神明과 같이 믿고 嚴父와 같이 존경하였다"(信此書如神明, 敬此書如嚴父)고 밝히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생을 마칠 때까지 퇴계는 이 책을 연구하고 실천에 옮겼다고합니다.
그러니까 퇴계는 우리가 상식적인 차원에서 짐작하듯이 理氣論적 측면에서부터 성리학에 몰입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철학>으로서의 성리학에 먼저 경도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심경부주는 주희 사후 세월이 흐르면서 모두들 입으로만 天理를 외칠 뿐, 주자학의 가르침은 형해화한 현실에 대한 반성적 흐름 속에서 등장했다고 합니다. <<심경부주>> 서문에도 보면 附註를 가한 정민정의 이런 글이 있습니다.
"性學에 밝지 아니하고 인심은 타락에 빠져서 천명을 이목에만 맡기고 이치를 입으로만 지껄이니, 바로 이 점이 선생(진덕수)께서 깊이 슬퍼한 바이며 <심경>을 저술한 까닭이다."
무릇 올바른 행동은 올바른 마음에서 나온다고 할 때,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중요시한다는 것은 곧 실천성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주희 사후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중요시하는 흐름이 나타나게 되는데 학자들은 이를 "심학화"(心學化) 경향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심학화는 실천성을 강조하는 경향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이야기하는 양명학이 바로 심학화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심경부주는 바로 주자학과 양명학의 과도기의 산물이라는 견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久留米 대학의 佐藤仁 교수의 견해가 그것입니다 (퇴계학보 제68집, 1990).

"<심경부주>는 신유학사상이 주자학에서 양명학으로 전개되어 가는 과도기의 산물이며, 양명심학이 성립됨과 동시에 역사적 역할을 끝내고, 그 후 중국의 사상계에서는 거의 돌이켜 보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일본에 있어서도 2번에 걸쳐 간행된 것에 비하여는 애독자는 별로 없었던 듯하다."

그런데 왜 이 <심경부주>를 "주자학에서 양명학으로 전개되어가는 과도기의 산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附註>를 찬한 정민정의 학문 경향과 관련이 있습니다.
진덕수가 편찬한 <심경> 부분은 주자학의 교의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민정의 <附註> 부분에서는 朱陸절충적 논리가 다분히 깔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정민정은 물론 그것이 주자의 본지라고 주장했지만 객관적 입장에서는 이미 陸王學적 주장에 가까운 것이라는 것이지요. 또 마음을 다스리는 데 교훈을 모아놓은 <심경부주>에는 朱陸절충론자라고 하는 오징(吳澄)의 글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내용이 퇴계학의 형성에 수용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퇴계가 <심경부주>를 높이 평가하는 데 대해 조목, 황준량 같은 제자들이 <심경부주>를 찬한 정민정이 각종 비리에 연루된 사실과 양명학적 학문 경향에 대해 이론을 제기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퇴계는 정민정의 학문은 분명히 육왕학적 경향이 인정되지만 <심경부주>의 내용만은 그와 별개로서 정주학의 가르침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고 하여 이 <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