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철님께(2)


퇴계학에 뜻을 두고 계시다니 마치 동지를 만난 듯 무척 반갑습니다.
초학도라고 겸손해 하십니다만, 저 역시 아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다만 퇴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퇴계를 알고자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제가 공부가 부족함에도 감히 이렇게 글을 올리는 것은 인터넷이 대중화된 시대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퇴계에 대해 관심을 가져서 퇴계가 우리 시대에 새롭게 살아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입니다.
퇴계에 대해서는 아직도 해명되지 못한 부분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퇴계에 대한 왜곡된 견해가 어떠한 비판도 받음이 없이 마치 상식처럼 지성계를 떠돌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더구나 퇴계에 대한 현대적 해석은 거의 불모지나 다름 없습니다. "인문학의 위기"의 시대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위기가 곧 기회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퇴계가 우리 인문학의 새로운 도약의 단서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서동철님께서도 퇴계학에 뜻을 가지고 계시다니 아무쪼록 희망과 패기로 우리 인문학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시기를 기대합니다.
 
그럼 이만 각설하고 두번째 답변을 올리겠습니다.  
지난번 님의 질문에 만족할만한 답변을 못드려서 죄송합니다.
이번에도 저의 답변이 님의 질문의 핵심에 미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만, 일단 시작하겠습니다.

앞에서 저는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중심으로 해서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만나기 전의 퇴계의 사유 경향을 추론해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퇴계가 주희철학에 대한 독자적 해석을 한 것이 심경부주에서 얻은 사색이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이 틀림없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역시 텍스트를 통해서는 님이 궁금해하시는 바, "퇴계 사상의 내적 역동성"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텍스트를 통해서 파악되는 퇴계는 관념과 추상의 퇴계일 뿐입니다.
즉 퇴계의 경우 왜 하필 성리학 관련 저작 중에서 B급 텍스트라고 평가받는데다가 육왕학적 경향이 있다고 비판받는 심경부주를 퇴계는 "신명과 같이 믿고 엄부와 같이 존경"하였는지, 그리고 후에 주희에 저작에 매료되었고 나아가 그것을 독자적으로 소화해내었는지 하는지 등을 퇴계의 텍스트만으로는 쉽게 해명이 되지 않는다고 할 것입니다.

퇴계가 중요시한 여러 텍스트(성리대전,심경부주,주자대전 등) 그리고 퇴계가 남긴 저작을 통해서 일단 퇴계의 사상에 대한 일차적인 이해를 할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와 더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을 포착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퇴계의 <문제의식>입니다.
무릇 철학이라고 하면 그 철학자의 당대에서의 문제의식의 소산이라고 할 것입니다. 현실지향적인 유학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것을 유학에서는 "우환의식(憂患意識)"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퇴계의 사상 역시 기본적으로 당대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추상적인 논리나 개념에 대한 이해를 넘어 퇴계 사유의 역동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스스로 퇴계 입장이 되어 퇴계의 문제공간이기도 했던 16세기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컨대 퇴계의 사상이 단순한 공리공담이 아니요 시대의 문제와 마주선 치열한 인문정신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퇴계의 사상 그 바탕에는 퇴계의 남다른 <문제의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만약 이러한 관점을 결여한다면 퇴계를 논하는 우리 자신이야말로 관념과 추상의 퇴계를 운운하는 공리공담론자 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퇴계의 철학에는 퇴계 자신의 치열한 현실인식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꼭 퇴계의 경우가 아니라도 일반적으로 철학과 현실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어디선가 읽은 다음과 같은 글이 잘 보여줍니다.

"이론 철학의 본래의 긴급한 문제는 현실계다.
현실에 관계하고 또 모든 이론적 취미는 그 현실계에 집중된다. 현실은 우리의 일상생활의 출발점일 뿐만 아니라 또 다시 모든 학구적 생활의 출발점까지 된다. 그러므로 인생의 전 생활이 이 현실계로부터 출발함은 이 현실계를 영영 출발해 떠나감인가? 아니다. 우리가 현실을 출발함(떠남)도 우리가 이 현실을 '떠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 현실로 다시 돌아오려는 것이다. 현실로 출발하며 또 현실로 돌아옴이 인생의 노력의 본의요 또 인생의 생활의 목적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검토해야 할 것은 퇴계가 마주선 현실은 어떠했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한마디로 16세기 이른바 "사화(士禍)"의 시대였습니다.
퇴계의 생애는 새로운 질서를 꿈꾼 정암 조광조를 비롯한 젊고 순결한 지식인(士林)들이 부패하고 타락한 훈구파 집단에 의해 얻어터지고 깨지고 피흘리며 죽어나가던 사화(士禍)의 시대 그 와중에 가로 놓여 있었습니다(정암 조광조가 화를 당한 기묘사화 때 퇴계의 나이 19세).
한마디로 정의(正義)가 사라지고 불의(不義)가 횡행하던 시대, 그 때 퇴계는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첫째는 바로 <인간>의 문제입니다.
시대를 주름잡고 있는 엘리트들의 인간적 타락이 시대를 황폐화하고 있다고 퇴계는 생각했음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 정신을 올바로 세우지 않고서는 이 황폐한 시대를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고 저는 봅니다. 퇴계가 인간의 문제에 깊이 천착한 데에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리학의 본고장인 중국과 비교하여 퇴계철학을 비롯한 조선 성리학의 특징을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송대철학이 우주론에서 출발하였다면 이 송대철학을 수용하였던 조선시대 철학에서는 <인간학>의 문제로 귀결되었다"(서울대 금장태 교수). 
이 인간에 대한 관심이 심경부주에 대한 특별한 관심으로 나타났다고 봅니다. 심경부주는 인간 행동의 원천으로서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그 주요 주제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 속에 세상의 이치가 들어 있으므로 곧 세상을 다스리는 것과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별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심경부주는 마음의 주재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퇴계는 이 <심경부주>로부터 얻은 사색을 바탕으로, 마음의 구조를 理氣論과 연결하여 마음 속에 들어와 있는 理에 보다 적극적인 실현력을 부여하여 理의 세계로의 지향을 보다 분명히 하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이 사단칠정논변에서의 "理發說"로 나타났다고 봅니다. 사단칠정논변이란 바로 <마음의 구조>에 대한 논변 아니겠습니까?  

둘째는 이 시대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理氣論적 모색입니다. 
사화(士禍)의 시대란 理氣論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대로 "理弱氣强"(理는 약하고 氣는 강하다)의 현실이었습니다. 정암 조광조를 비롯한 理의 세계를 지향하는 사림(士林)이 권력과 욕망의 집단인 훈구파라고 하는 강력한 氣의 집단에 무참하게 깨지고 얻어터고 죽어나간 게 바로 사화(士禍)였습니다.
퇴계는 여기서 주희의 체계에 매력을 느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주희의 기본 구도는 본체와 현상, 이상과 현실, 이성과 욕망을 理와 氣의 대립-투쟁으로 환원한 이원론적 체계였습니다. 그러면서 理를 일차적으로 본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다시 말하면 현실 속에 이상이 실현되고 욕망이 이성을 따르기를 원하는 구도라 할 것입니다. 결국 氣가 理에 의해서 규정되어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퇴계 역시 현실 세계는 理와 氣가 서로 승부하는 세계로 파악하였다는 것이지요. 개개의 인간에 있어서도 理와 氣는 마음 안에서 서로 교전하고 있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사화의 시대, 훈구와 사림의 투쟁은 그대로 퇴계가 파악하고 있는 적나라한 理氣論의 현실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퇴계가 주희의 구도에 매력을 느낀 것은 16세기 시대를 황폐화하고 있는 훈구파의 시대를 극복하고자 한 퇴계의 모색의 결과였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자학이 직면한 현실은 어디까지나 理弱氣强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주자학은 理를 최고 범주로 하는 이상주의철학이라고 평가합니다만 거기에는 냉정한 현실인식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물론 논리적으로 理는 氣를 낳는 형이상학적 원리, 즉 氣에 앞서는 원리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도덕적 원리에 불과한 理가 아니라 몸을 구성하는 氣 내지 氣質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주희는 "주자어류(朱子語類)" 속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氣는 비록 理가 낳는 것이지만, 그 氣가 이미 나타난 이후로는 理가 氣를 완전히 조절할 수 없다. 그리고 이 理가 氣에 머물게 된 후에는 실제 일상적으로 운행하는 것은 전적으로 氣의 소행이기 때문에, 氣가 강하고 理가 약하다(氣强理弱)하다고 보아야 한다."
(氣雖是理之所生, 然氣生出, 卽理管他不得, 如這理寓於氣了, 日用間運用都有這箇氣, 只是氣强理弱. - 朱子語類 권4)

즉 현실의 인간에 있어서는 氣 내지 氣質은 理를 압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氣가 압도하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理의 각성 분투가 요청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희는 理의 우위를 강조하고 理가 만물을 주재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理는 능동성이 없다고 주장한다는 말이지요. 즉 주희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대개 氣는 응결하여 사물을 만들 수 있는 데 반하여, 理는 감정도 없고, 헤아리는 것도 없고, 조작하는 힘(無情意, 無計度, 無造作)도 없다. 理는 하나의 깨끗하고 텅빈 넓은 세계이며, 형태도 없고 조작할 줄도 모른다. 그러나 氣는 한데 엉겨모여 사물을 생성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 氣가 있으면 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