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퇴계의 본격적인 행장은 지어지지 않았지만 행적의 대략을 쓴 글은 있습니다.
화담 서경덕의 문인이기도 하며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사암 박순(1523~1589)이 쓴 글입니다.
다음은 "퇴계전서"에서 옮겨온 사암 박순의 "퇴계 행장의 대략(行略)"입니다.


퇴계 행장의 대략(行略) 
- 사암 박순의 글


도(道)가 행하여지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하물며 우리 동방이야 가난하고 거칠며, 멀리 치우쳐 있어서 기자(箕子) 이후로부터 위 아래로 수천년 동안 도를 아는 사람이라고 불린 분이 몇이아 있었는가? 선생께는 총명하고 통철한 자질로 초연(超然)히 홀로 옛 분들이 남기신 저술과 편지 속에서 그 학문을 얻으셨는데, 주자의 편지를 주로 정중하게 외우고 정밀하게 연구하되 한 마음으로 낮은 것부터 배우시니, 차라리 얕을망정 높지 않아 평범하고 충실하며 적확하고, 타당하면서 가지런하게 차례가 있었다. 이른바 치지(致知)로부터 지지(知止)에 이르고 성의(誠意)로부터 평천하(平天下)에 이르며, 쇄소응대(灑掃應對)로부터 궁리진성(窮理盡性)에 이른다는 것이 선생께서 목표로 삼고 날로 힘써 크게 나아가신 것이다.

절조(節操)와 존양이 더욱 굳어지고 식견이 더욱 높아지시자, 인륜을 살피고 사물을 밝히심에는 마음이 얼음 녹듯 풀려서 맑고 환히 비치어 겉과 속에 잡된 것이 없었으며, 널리 응하고 완곡하게 대하심에는 발(發)하되 반드시 중절(中節)하셨다. 후학들이 도움을 청하면 서로 더불어 문답하시되 날이 다해도 싫증내지 않으셨다. 그 말씀은 입지(立志)를 우선으로 하고 근독(謹獨)을 중요시하여 타이르고 타이르시되 평이하고 명백하셨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심이 지성으로 우러나오니, 비록 시골에 물러나 계셨지만 마음은 한 번도 조정에 있지 않음이 없어 언제나 임금의 덕을 도와 기르고 사림(士林)을 진정시키는 것을 우선적인 책무로 삼으셨다. 본디 벼슬할 마음이 적었는데, 중종 말년에 크게 책모를 꾸미는 일이 일어나니, 비로소 물러나 쉬실 뜻을 결정하셨다. 이로부터는 조정에 오래 머물게 할 수 없었고,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서의 의로움이 만년에 더욱 현저해지시어 묵직하고 큰 용기가 만 길 벽처럼 우뚝하게 서 있으니, 비록 스스로 맹분과 하육이라 일컫는 사람일지라도 빼앗을 수 없었다.

처음에 선생께서는 깊이 스스로의 재덕을 감추시어 비록 학문에 오로지 정신을 쓰면서도 언어와 문자로 펴내지 않으시니, 벗들까지도 역시 도학을 하는 선비인 줄 몰랐다. 그 여세가 더욱 높아지고 덕이 더욱 높아져서 오래 동안 충분히 기르신 뒤에 정교한 빛이 스스로 빛나고, 그 열매가 절로 맺히어 덮어 가릴 수 없게 된 뒤에야 배우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스승으로 높이었다. 그 바른 학문을 천명(闡明)하고 후생(後生)을 가르쳐 이끄시어, 공맹정주의 도(道)로 하여금 우리 동방에 완전히 녹아 들어 다시 밝게 하신 분은 오직 선생 한 분 뿐이시다.

- 이상 사단법인 퇴계학연구원에서 펴낸 "퇴계전서(17)"의 259~260쪽을 옮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