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8) - 비판적, 독립적 지식인의 전범


저는 앞에서 개혁사상가, 법치정신의 구현자, 언론정신의 구현자로서 남명의 모습에 대해 조명해 보았습니다.
여기 또하나 인상적인 남명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비판적 지식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남명의 칼”은 개혁의 칼, 정의의 칼, 정론의 칼과 더불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성의 칼”
남명은 평생을 산림(山林)에 있었지만 결코 현실을 등진 아웃사이더는 아니었습니다. 높은 꿈과 이상을 간직한 채 현실 정치를 항상 주시하였으며 언제나 박차고 일어날 듯 비판의 칼날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앉아 있으면서도 행동을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요컨대 비판적 지식인의 얼굴을 한“산림의 호랑이”요, 우리 역사를 통털어 “위대한 재야의 별”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 그가 바로 남명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남명의 시대는 이른바 “사화(士禍)”의 시대, 사림(士林)이라고 일컬어지는 지식인들의 수난시대였습니다. 정암 조광조를 위시하여 새로운 시대를 꿈꾸었던 젊고 패기있는 지식인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당하고, 거듭되는 사화로 인해 강호의 지식인들은 좌절과 허탈감에 빠져 있을 때였습니다. 이 때 남명은 不義의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현실 정치판에 맞서 재야의 정신을 굳건히 세움으로써 미래를 기획했던 사람인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나아갈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義의 깃발 아래 敬의 수련으로 내공을 다지며 산림에 은거해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결코 침묵하는 지식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포효하는 지식인이었습니다. 뇌룡정(합천) 시절의 다음과 같은 좌우명은 그대로 남명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죽은 듯이 있다가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처럼 침묵하다가 우레처럼 소리를 낸다(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
을묘사직소를 비롯한 수차례의 상소와 진언을 보십시오.
남명은 타락한 권력을 질타하고 무기력한 지식인 사회에 일대 경종을 울림으로써 어지러운 시대에도 재야의 정신은 시퍼렇게 살아있음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훗날 우암 송시열(1607~1689)은 남명을 일러 이렇게 말하였던 것입니다.

“천길 절벽에 우뚝 서서 日月과 빛을 겨루는 기상은 지금까지도(남명 사후 약 100년) 사람들을 凜然히 畏敬케 하여, 완악한 벼슬아치들을 청렴케하고 나약한 선비들을 떨쳐 일어나게 한다.”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남명의 길, 그것은 이른바 외롭고도 지난한 “처사(處士)”의 길이었습니다. 처사라 함은 “벼슬하지 않고 재야에 있는 선비”를 통칭하는 말로서 요즈음 말로 하자면 “독립적 지식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남명은 조선시대를 통털어 가장 이상적인 처사상으로 추앙받아 왔습니다. 남명 스스로도 후인들이 처사로 불러주기를 원하여 임종시에도 제자들에게 관작을 내세우지 말고 처사로 호칭할 것을 당부했다고 합니다. 퇴계도 처사로 불리워지기를 희망하였다고 하지만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의 처사의 칭호는 남명에게 돌려져야 마땅할 것입니다. 율곡은 남명의 경세가로서의 평가에는 인색하였지만 적어도 처사로서 남명에 대해서는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근래에 이른바 처사라는 사람으로 끝까지 지조를 지키고 천길 낭떠러지처럼 우뚝 솟은 인물로는 남명만한 인물이 거의 없을 것이다.”
남명이 처사의 길을 걸은 것은 죽림칠현 류의 속세를 등진 고고함의 발로가 아니었습니다. 不義한 권력과는 추호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지적, 도덕적 자존심의 발로요, 한편으로는 막강 세력이 버티고 있는 난국을 돌파하기 위한 생애를 건 전략적 결단의 의미도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이런 이야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유학이란 어디까지나 현실정치를 통해서 이념을 실현하는 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 것이고 남명 역시 실천을 앞세웠던 만큼 “정치적 실천”이야말로 가장 직접적이고 값진 것이 아니냐고 말이지요. 다시 말하면 누구라도 그 시대를 경륜해야 한다면 물러나 순수를 지키는 것보다는 부딪히고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참여를 통해 봉사하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 아니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는 정암 조광조(1482~1519)를 비롯한 기묘사림들의 왕성한 정치적 실천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였고 不義의 세력(훈척)은 두터운 벽을 형성하고서 위세를 떨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사림(士林)의 열세가 명약관화한 이 때, 정녕 시대의 변혁을 꿈꾸는 자라면 전략을 달리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즉 시대정신을 바로 세우고, 언론 비판 활동을 통해 여론을 환기시키며, 학문과 교육활동을 통해 패기에 찬 신세대 젊은 정신들을 길러냄으로써 다음 시대를 기약하는 것이 우회적이지만 보다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실천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현실 변혁을 위한 실천 방법은 정치적 참여의 길만이 유일하고 효과적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유학자에겐 나아가느냐(出), 물러나느냐(處), 그것은 각자 냉철한 현실인식에 바탕을 둔 실존적 결단의 문제였고 남명은 물러남의 길을 선택했던 사람인 것입니다. 
그것은 외롭고도 지난한 길이었습니다.
남명인들 왜 출세의 욕망이 없었겠으며 또 당시의 권력인들 왜 이런 남명을 관직의 길로 유혹하지 않았겠습니까?
남명의 위대함은 그러한 욕망과 유혹을 넘어서 스스로 “독립적 지식인”으로서 우뚝 서서 갔다는 것이며 그리고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켜 냈다는 데 있습니다. 남명 스스로도 이렇게 술회하여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 후회없는 자부심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선비의 큰 절개는 오직 출처에 달려 있다. 내 평생에 하나의 취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구차하게 벼슬길을 추구하지 않은 일이었다.”
남명은 이처럼 타락한 권력과 거리를 둠으로써 시대의 양심을 견지하였으며 나아가 장대한 정신세계를 재야의 산림 속에 구축함으로써 우리 정신사의 한 빛나는 표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남명이 보여준 바, 不義의 권력에 대한 “秋霜烈日”의 거침없는 비판정신은 남명이 견지한 바로 이러한 굳건한 독립적 지성에서 우러나온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날 권력과 자본, 미디어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 땅의 무기력하고 부평초 같은 지식인들을 바라볼 때마다 그 옛날 남명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간절해는 것은 저만의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아아, 현대판 남명은 언제나 우리에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