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역력하게 회상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장수를 하는 사람이며, 그 생활이 아름답고 화려하였다면 그는 비록 가난하더라도 유복한 사람이다. 예전을 추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의 생애가 찬란하였다 하더라도 감추어둔 보물의 세목(細目)과 장소를 잊어버린 사람과 같다.”
-피천득의 수필, 『장수(長壽)』에서-



정신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한국현대사 최대의 비애는 우리 스스로 근대적 학문 방법론에 입각한 주체적 역사상을 갖기 전에 이미 타자(일제)의 음모적 기획에 의해 우리의 역사가 날조, 왜곡되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 조선의 역사가 집중적인 공략을 받았고 특히 심한 상처를 입었다.
일제의 농간에 의해 세계사상 유례가 드문 500년 역사의 조선왕조사는 보잘 것 없는 역사로 전락했고 그 장대한 ‘경험과 예지’의 보고는 오로지 매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예속과 굴종의 사대주의하며, 음모와 간계로 점철된 피비린내 나는 사화와 당쟁, 그 사대주의와 당쟁을 조장한 모방과 수구와 공리공론의 유교사상 등등…
이를테면 우리는 실체를 이해하기 전에 비판부터 배웠고, 밝은 대명천지에 드러난 사실에 대한 제대로 된 해석보다는 어두운 밤거리를 배회하면서 조선의 뒷구멍만 캐던 제국의 검은 모리배들이 전해주던 이야기를 먼저 들었다. 기나긴 조선왕조 500년 속에는 온갖 사연이 다 들어 있을 수 있다. 
더구나 워낙 기록문화가 발달한데다 왕조실록이라는 게 있어서 시시콜콜한 것까지 (나중에 물 건너 모리배들에게 이용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우리 조상들은 다 적어 놓았으니 제국주의 족속들은 그 안에 들어가 보고 “이게 웬 노다지냐” 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마침 실증주의라고 하는 근대적 학문 방법론을 터득한 그들 교활한 제국의 족속들은 ‘과학성’과 ‘객관성’이라는 미명아래 그 중에서 자신들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내어 색깔도 칠하고 변조도 해서 좍 연결시켜 놓고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조선의 역사다.”

학문의 탈을 쓴 그 제국주의 모리배들의 관점, 즉 모종의 음모적 기획 아래 주로 시대의 어둡고 칙칙한 뒷구멍에 변태적 눈독을 들이는 관점을 우리는「식민사관」이라고 부른다. 
식민사관이 노리는 바는 무엇이었는가. 
그 주요 목록을 살펴보면 ① 타율성론 ② 정체성론 ③ 당파성론 ④ 사대성론 등을 들 수 있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고 한국인들 스스로 모멸감과 패배의식에 젖게 하여 저항의식을 마비시키고 결국 식민통치를 영속화 하고자 한 것이었다. 일제의 비열한 의도는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한국역사의 왜곡을 본격적으로 진행시킨 제3대 총독 사이토(1919년 부임)의 다음과 같은 3대요강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①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②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춰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③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일본인(半日本人)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당시는 그렇지 않아도 조선의 멸망으로 인해 우리민족 내부에서 반성과 자책이 팽배해 있을 때였다. 그러니 세련된 방법론을 앞세운 식민사관의 공략은 이 땅에 아주 쉽사리 먹혀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한국사 특히 조선시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보편화되고 심지어 일부 식자들 (춘원 이광수 등)은 식민사관에 동조하여 ‘민족개조론’ 까지 부르짖게 된다. 
식민사관으로 편집된 역사책들이 본격적으로 출간된 1920년대 말부터는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이 자기 민족에 대해 자신감을 잃고 자포자기하거나, 민족멸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민족허무주의에 빠져 들었다. 1)
식민사관의 위력이 컸던 만큼, 일제의 식민통치도 그만큼 안정적이고 견고해 보였다. 특히 일제 강점기 말엽에 이르러 일제의 세뇌는 최고조에 달하여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은 식민사관의 교시에 압도 당하고 이 땅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의 식민통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아, 그러나 역시 악의 제국은 영원할 수 없는 것. 그처럼 막강해 보이던 제국의 아성도 한 순간 강권통치의 절정에서 무너져 내리고 우리는 광복을 맞는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식민사관의 운명이 그것이다.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 났으나 우리는 식민사관의 세뇌에서도 해방이 되었는가? 일제는 퇴각했으나 식민사관의 위력은 여전하였다는 것, 정신사 차원에서 볼 때 광복 이후 한국현대사의 불행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