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의견>

동양철학자들이 퇴계의 독창성에 대해서 거론하고 그것을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동양철학이나 한국철학을 전공하지 않는 사람들이 보아도 독창성을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논거가 적절하고 따라서 설득력이 있어야 하겠지요. 국내학자들과 국외학자들에 대한 평가는 바로 이 점을 의도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보다 원론적 질문으로서 가령 서양철학을 전공하는 철학자들이 과연 이퇴계의 철학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을까요? 퇴계 대신에 칸트를 읽겠다는 이진우 교수를 언젠가 조사연 님께서 공박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동양철학 전공자 혹은 한국철학 전공자가 칸트를 잘 모르듯이 마찬가지로 서양철학 전공자가 퇴계를 잘 모르면 그것이 큰 잘못인가요? 어떤 의미에서 서양철학 전공자가 플라톤, 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칸트, 훗설, 들뢰즈 혹은 데리다, 데이빗슨 등을 잘 아는데 퇴계에 대해서 모른다면 안되는 것인가요? 만약 그가 퇴계의 철학에 대해서 잘 몰라도 괜찮다는 것이 성립된다면, 그만큼 퇴계 철학의 독창성 문제는 그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지겠지요. 마찬가지로 공자, 맹자, 순자, 주자 등을 잘 알고 있는 동양철학자들이 김재권의 철학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이 허용될 수 있지 않을까요? 따라서 김재권의 심리철학이 얼마나 독창적인지 그것은 적어도 철학적인 문맥에서 그 분야 학자들의 관심사가 아닐까요? 

송시열과 이율곡 진영에서의 주장은 퇴계와 주자가 다르다는 것에 대한 공박으로 읽힙니다. 분명 이퇴계는 주자학과 다르다. 그런데 그 다름은 오히려 독창성을 보장해 주는 논거라기 보다는 주자학의 아류에 대해서 착각한 실책이라는 비판적 의미인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도 그것이 실책인 한에 있어서 별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겠지요. 나아가 퇴계가 혹은 율곡이 도대체 누가 주자학의 정통을 잊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조선 유학사의 문맥에서는 흥미로운 문제이겠지만, 그러나 그만큼 철학적 가치는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사연 님은 퇴계 사상의 독창성을 현실의 문제 해결력에서 파악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이퇴계가 살았던 당시의 사회, 정치적 문제를 주자학의 이론을 통해 나름대로 해명하고 그 문제를 극복할 고유한 대안을 제시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고유한 대안이 과연 철학적으로 혹은 사상적으로 고유하고 독창적인 것인지는 더욱 토론할 필요가 있을 듯이 보입니다. 퇴계가 살았던 당시 그 도덕적인 이조의 유학자들이 무엇을 했는지 잘 모르지만, 아마도 진정한 유학자라면 오늘날의 진정한 지성인처럼 불안하고 혼란된 사회에 대해서 준엄한 심판을 가하고 그것에 대한 대안이나 처방을 제시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아마도 동양철학자나 혹은 퇴계 철학의 독창성과 위대성에 관심을 가진 서양철학자의 초점은 그러한 대안이나 처방이 철학적인 문맥에서 혹은 주자학적 문맥에서 얼마만큼의 철학적, 이론적 설득력을 지니는가에 따라 평가될 수밖에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사회적 실천가요, 도덕적 계몽가로서 이퇴계가 보여준 삶의 행적이 눈부시게 두드러져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바로 이퇴계가 주장하는 철학적 내용이나 사상적 내용의 독창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기론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조사연 님의 해명을 읽다 보면 리와 기의 개념이 문맥에 따라 서로 달리 사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일차적으로 리와 기가 이상과 현실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요. 따라서 리의 역동성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에는 마치 현실의 부정적 양상을 수용하거나 그것을 개선할 대안을 마련해 주지 못하는 것 같은 비판을 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물론 리와 기가 이상과 현실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리와 기라는 개념은 존재하는 것, 우주, 자연의 본성과 변화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아마도 이런 맥락에서 사용되어야 어떤 중국철학자가 말한 것처럼 본체우주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경우에 있어서 리와 기는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 원리와 작용 등의 개념으로 풀어낼 수도 있겠지요. 이런 맥락에서라면 “논리적으로 理는 氣를 낳는 형이상학적 원리, 즉 氣에 앞서는 원리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도덕적 원리에 불과한 理가 아니라 몸을 구성하는 氣 내지 氣質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라는 주장이 어떤 도덕적, 혹은 정치 사회 현실적 함축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지요.

또 조사연 님이 설명하면서 말한 것처럼 리와 기가 이성과 욕망으로 번역될 수 있다면, 과연 이성이 욕망이나 감정, 혹은 행동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아마도 흄이 제기했던 문제인데 그렇게 쉽게 “그렇다”라고 답변하기에는 많은 철학적 논의가 있어야 할 듯 싶습니다.

나아가 조사연 님이 주장하는 것처럼 퇴계의 사상이 혁명론의 씨앗을 배태하고 있었다면, 그 혁명론을 이기론의 문맥에서 해명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이퇴계의 한계처럼 느껴집니다. 이기론이라는 형이상학적 담론은 헛소리이고 차라리 옛 고전의 근본 정신, 도학(道學)의 근본으로 돌아가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더 혁명적인 것처럼 보이는데요. 그런데 이렇게 주장하는 경우에는 이퇴계가 지니고 있는 “철학적” 독창성은 더욱 희미해 질 것처럼 생각됩니다.


<답변 - 理發과 敬>

제가 오래 전에 올렸던 이진우 교수의 퇴계관을 비판한 글을 언급하셨더군요.
"퇴계의 독창성" 주제와 관련해서는 조금 의아스럽기는 합니다만...하기는 뭐 마침 퇴계의 의미를 생각하는 데에는 적절한 예일 수 있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군요.

(1) 저는 앞에서 퇴계의 독창성의 예로서 理發說(理의 능동성 인정)을 들고 그것이 모종의 혁명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만, 사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자학 내에서의 의미일 뿐입니다. 理發說 자체가 표출하는 실천적 메시지는 사상 일반에 비추어 보면 어쩌면 평범한 주제일지 모릅니다. 님의 지적처럼 굳이 그런 것을 理氣論의 문맥을 통해서 이야기해야만 하느냐... 한다면 뭐 퇴계의 한계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떠한 위대한 사상가도 자신의 시대를 초월할 수 없습니다 (헤겔도 이야기했지요. "모든 사상가는 그의 시대의 아들이다"). 퇴계 당시는 理氣論이 시대의 보편적 담론틀이었습니다. 理氣論이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설명해 줄 때였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理氣論이 불교-도교를 아우르는 포괄적이고 최첨단의 이론이었습니다. 님은 퇴계를 비판하면서 퇴계에게 마치 자신의 시대를 초월하기를(인간이 아니기를)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언급한 독창성 문제는 "주자학" 내에서의 독창성이었지 사상 일반에서의 독창성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흔히들 보수적이라 평가하는 주자학 이론 체계에서 변혁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는 데 퇴계의 의의가 있다고 저는 본 것입니다.

(2) 사상 일반에 비추어서 퇴계의 철학적 독창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역시 理發說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理發說이 혁명론의 씨앗을 담고 있다고 하였지만 동서고금을 통하여 널러리 깔린 게 "혁명론"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사실은 무엇보다 퇴계의 사상에 혁명론의 씨앗이 담겨 있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웃습니다. 사실 퇴계의 생애나 사상을 일견해서는 혁명적 이미지나 전투적 메시지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는 역설적으로 바로 이 점이 퇴계의 독창성이라고 봅니다.

퇴계의 특징은 理의 능동성(理動-理發-理到)을 인정한 것과 더불어 "敬"을 강조했다는 데 있습니다. 퇴계는 "敬의 사상가"라고 불리울 정도로 敬의 의의를 강조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敬으로 일관된 삶을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理發說과 이 敬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理의 운동성을 인정하게 되면 그대로 敬의 강조로 나타나게 됩니다.
理를 그 초월성에 주목하여 "天卽理"라 할 때는 선험적인 원리이고, 인간의 심성 속에 내재한 측면에 주목하여 "性卽理"라고 할 때는 가능성의 원리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하면 理 자체는 구체적인 실천력을 갖춘 개념이 아닙니다. 결국 理의 현실화를 위한 실천 방법이 요구되는데 그것이 바로 敬의 원리입니다. 敬의 수행이 없는 理의 실현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敬의 뒷받침이 없으면서 스스로 理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허위의식)입니다. 그것은 때때로 理의 탈을 쓴 교활한 氣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청나라 때 대진이 "理가 사람을 죽인다"라고 하면서 주희의 理철학을 비판했습니다만 대진의 비판은 敬의 실천이 결여된 이데올로기(허위의식)로서의 理에 대한 것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理의 왕성한 활동을 주장하는 퇴계의 입장에서는 그에 비례해서 敬의 의미가 더욱 강조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한편 敬만을 따로 놓고 본다면 敬은 그 자체 목적으로서의 덕목이 아닙니다. 즉 敬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일과 사물에 대한 진지하고, 엄숙하고, 경건하고, 신중하고, 성실하고, 또 항상 깨어있는...등등과 같은 태도를 의미할 뿐 어떤 지향성을 나타내는 개념이 아닙니다. 

<<참고>> 敬 개념의 여러 스펙트럼
여러 성리학자들이 敬에 대해 이야기한 바를 간추리면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①정제엄숙(整除嚴肅) : 마음과 몸가짐을 엄숙, 단정하게 유지하는 것 
②주일무적(主一無適) :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 
③상성성(常惺惺) : 마음이 밝은 별처럼 항상 깨어있는 것 
④기심수렴(其心收斂) : 흩어진 마음을 가다듬어 잡는 것 
⑤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