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앞의 글에서 인용한 바 있는 <<퇴계학보>> 창간호(1973년 10월)에서 故 이상은 선생(당시 고려대 교수)이 쓴 글 <<퇴계학의 문제>>라는 제목의 글의 앞부분입니다.
퇴계학의 정체성 문제를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올려 봅니다.


"<퇴계학>의 문제"


"<주자학, 양명학이란 말은 있을 수 있지만 '퇴계학'이란 말이 있을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질 사람이 적지 않을 줄로 안다. 종래로 퇴계의 學을 말하는 사람들이 흔히 "독신주자篤信朱子"니 "일준주자지훈一遵朱子之訓"이니 하는 말을 써 왔기 때문에 "퇴계학이란 즉 주자학이요, 주자학 밖에 따로 퇴계학이란 있을 수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독신주자篤信朱子"니 "일종주자지언一從朱子之言"이니 하는 말은 그런 말을 사용하는 사람과 경우에 따라서 세가지 뜻이 있다는 것도 알아 두어야 한다.
첫째는 퇴계 자신이 자기는 주자를 독신篤信한다고 자주 말했는데 이 때는 주자를 존중한다는 뜻과 아울러 마치 공자의 <信而好告>, <述而不作>이란 말처럼 학문적 겸손의 뜻도 포함된다.
공자가 자신을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 했지만 사실은 <以述爲作>(풍우란의 중국철학사의 용어)했던 것과 같이 퇴계도 모든 것을 주자에 의거依據한다 하였지만 그것은 의거依據함으로써 거기서 새로운 것을 찾아내어 자기의 것으로 삼고 주자의 말을 빌어서 말하지만 실은 자기의 의사로 자기의 말을 한 것이다. 

둘째는 기고봉이 경연에서 선조의 물음에 대하여 퇴계를 <篤信朱子,工夫純至>한 동방명유라고 말한 일이 있고(고봉문집, 논사록에) 퇴계의 문인 정유일이 <先生之學,一以程朱爲準>이라고 한 것이 있는데(퇴계집, 언행록) 이것은 다 송양頌揚의 뜻으로 말한 것이다. 송양의 뜻으로 말할 때에는 정주를 학문평가의 최고 표준으로 삼고 하는 말이니 <一以程朱爲準>이란 말은 퇴계의 학문으로서의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는 추숭의 뜻 밖에 다른 것이 없다.
그런데 이 말이 경우에 따라서는 폄하하는 뜻으로 해석되는 수도 있다. 일직이 율곡은 답성호원서에서 정암, 퇴계, 화담을 비교 논평하면서
"花譚多自得之味, 退溪多依樣之味"
라 하고 "多依樣之味"라는 말 밑에 "一從朱子之說"이라고 自註해 놓았다. "自得之味"라는 말과 대조해보면 "一從朱子之說"의 뜻을 가지는 "依樣之味"라는 말은 확실히 낮추 평가하는 말처럼 보인다. 그러면 율곡은 과연 퇴계를 화담보다 낮추 보았던가? 같은 그 글에서 율곡은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

"今之學子 開口便說... '理無形而氣有形', '理氣非一物', 此非自言也, 傳人之言也, 何足以敵花譚之口, 而服花譚之心哉? 惟退溪攻破之說, 深中其病, 可以後學之誤見也, 蓋退溪多依樣之味, 故其言拘而謹, 花譚多自得之味, 故其言樂而放, 謹故少失, 放故多失, 寧爲退溪之依樣, 不必效花譚之自得也"
(지금 학자들은 입만 열면, 곧 "理는 무형이요, 氣는 유형이니, 결코 일물이 아니다"는 것을 말할 줄 압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가 알고  말한 것이 아니고 남의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어찌 화담의 입을 대적하고화담의 마음을 복종시킬 것입니까? 오직 퇴계의 간파한 설이 그 병통을 깊이 지적해 내어 뒷 사람들의 잘못 볼 것을 구하였습니다. 대개 퇴계는 모방한 것이 많으므로 삼가기에 구애되었고, 화담은 스스로 터득한 맛이 많으므로 방종함을 즐겼습니다. 삼가면 실수가 적고, 방종하면 실수가 많으니, 차라리 퇴계의 모방하는 '태도'를 취할지언정 꼭 화담의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본받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것으로 보면 율곡은 퇴계의 학을 화담보다 더 높게 본 것이니 "의양"이란 말이 반드시 퇴계를 폄하하는 말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면 "의양"이란 말의 뜻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이 점에 대하여 택당 이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율곡이 퇴계를 <依樣之味>가 많다고 말했다 해서 지금 학자들은 퇴계를 낮추 보려하고 영남 선비들은 또 이 말 때문에 율곡을 비난하지만 나로서 보건대 이른바 <依樣>이란 것은 揚雄의 太玄, 法言처럼 가절假竊, 모방했다는 말이 아니다. 주자는 백가를 절충하여 만세에 정론을 세웠다. 퇴계는 주자를 따라 학습하였다. 주자의 설을 心融, 神會하여 자기말 하듯이 하였고 그 논술한 것은 다 그 餘蘊을 발휘하여 그를 羽翼해 준 것이니 이는 주자를 잘 배운 것이다. <此善學朱子也> 율곡이 일시적으로 화담과 대비해서 평론한 말은 율곡의 의사가 아니다." (택당李植 가훈 장지연저 조선유학연원에서 인용)

이 문말에 "화담과 대비해서 평론한 말"이란 즉 "多依樣之味"란 말을 가리킨 것이요, "율곡의 의사가 아니다"한 것은 율곡이 퇴계를 폄하하려고 한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면 택당이 퇴계를 "善學朱子"했다고  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주자를 그대로 모방했다는 것이 아니라 주자의 학문정신을 잘 체득하여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완전소화해서 "자기말 하듯이"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주자의 업적을 올바로 계승하였다는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택당은 주자를 "折衷百家, 定論萬世"한 사람으로 본다. 그가 퇴계를 "善學朱子"했다고 하면 이 말 속에는 퇴계도 "折衷百家, 定論萬世"한 그런 학문을 했다는 뜻이 포함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퇴계도 "折衷百家, 定論萬世"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이 점을 밝히는 것이 퇴계학의 의의를 말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우리는 주자가 "折衷百家, 定論萬世"했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짐작할 수 있다. 주렴계, 장횡거, 소강절, 정명도, 정이천 등 북송제유들의 설을 종합, 집대성한 것을 가리켜 '折衷百家''라 하는 것이요 사서집주의 신해석, 태극도설해, 程張의 "本然, 氣質"의 구별에 의한 심성설, 이기설, 인설 같은 것을 가리켜 '定論萬世'라고 하는 것이라고 보아서 과히 틀림없을 것이다. 퇴계가 독신했다는 것은 이 만세정론으로 인정되던 주자의 학설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주자 사후 퇴계의 말년에 이르기까지는 3백5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시세와 사조의 변천은 불가피한 일이니 그 정론이 반드시 만세정론이 될 수 없음도 자명한 일이다. 주자 당시부터 이미 주자와 대립되는 육상산이 있었고 주자의 문인과 상산문인과의 사이에 尊德性이냐 道問學이냐 하는 시비가 있었거니와 그 뒤 3백여년이 경과함에 따라 같은 理學계통이면서 주자와 견해를 달리하는 "異說者"들이 파생되어 퇴계는 宋系元明理學通餘를 편술할 때 이들을 별도로 취급한 일이 있었고 더욱이 퇴계 당시는 진백사, 나정암, 왕양명, 같은 사람들의 새 학설이 우리나라에도 유행하여 사상계의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하였고 또 우리나라 유학 자체에 있어서 보면 여말부터 정주학을 받아들인 뒤 우리의 특수한 역사성 때문에 유학도 특수한 양상을 띠어 여말의 정포은으로부터 양촌, 야은, 사육신, 점필재, 한훤당, 정암, 회재로 내려 오면서 혹은 문장으로, 혹은 절의로, 혹은 학술로, 혹은 도학으로 각각 특색을 나타내었고 퇴계와 동시대에는 반드시 정주학에 따르려 하지 않은 화담, 소재, 연방, 남명, 일재같은 "異說者"들이 竝駕齊驅하고 있었다.

퇴계로서 주자의 학문 정신을 따라 "折衷百家, 定論萬世"의 작업을 하려고 했다면 우선 이 여러가지 이설들에 대하여 자기로서 자기의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 위에서 이들을 평가하여 "定論"을 구하러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지금에 있어서 보면 "心經"을 표창한 것이라든가 주자서절요의 선택 기준을 궁리, 치지의 면보다 덕성, 정리의 면에 두었던 거 같은 것은 벌써 이미 시대적 영향을 반영한 퇴계의 특수 면목을 보이는 것이요, 고봉과의 사칠변이라든가 화담에 대한 "非理氣爲一物辨證"이라든가 연방에 대한 "心無體用辨"이라든가 왕양명에 대한 "전습록변"같은 것은 모두 이른바 "만세정론"을 구하기 위한 제가에 대한 변론, 비판이다. 이런 논변에서 그는 일방적인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허심탄회하게 "捨己從人"하는 학문적 아량도 가끔 보였으니 비록 그가 모든 것을 주자에 의준한다 하드라도 결코 주자의 말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요, 또 그대로 적용할 수도 없는 것이다. 결국 그는 자기의 재량으로 자신의 사상 체계를 무형 중 형성하는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이 이설들은 대개 주자를 비판하고 나온 신설들인데 퇴계는 그것을 주자의 입장에서 재비판한 셈이다. 이것이 즉 퇴계학문에 있어서의 이른바 절충백가이며 정론만세인 것이다. 이른바 "그 餘蘊을 발휘하여 그(주자)를 羽翼해 주었다"는 드 업적은 퇴계만이 할 수 있는 업적이니 여기에 퇴계학이 주자학이면서 그것을 더 발전시킨 퇴계학으로서의 독자적 의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학봉 김성일은 <<實記>>에서 퇴계의 학을 결론지어 말하기를,  

"근세 사대부는 독사하면 과거 급제의 利만 생각하고 성현의 學이 있는 줄은 모르며 벼슬하면 총록寵祿의 영화만 생각하고 념퇴恬退의 절조가 있는 줄은 모르고 부끄러움도 없고 의리도 없이 속되게, 무지하게 그날 그날 살았다. 선생이 일어남으로 부터 사대부된 자가 비로소 사람되는 도리가 거기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群儒의 위에 집대성하여 위로 끊어진 줄기를 잇고(繼絶緖) 이래로 來學을 열어주어(開來學) 공맹,정주의 道를 세상에 다시 밝힌 점에 있어서 동방에서는 기자 이후 오직 이 한 사람 뿐이다."(퇴계집,언행총록)

고 하였다. 여기 말한 "集大成於群儒"라 한 "群儒"를 진북계,진서산, 이후의 허노재,정황돈,진백사,설경헌,나정암,왕양명 등 중국측 학자들과 포은이래로 양촌,야은을 거쳐 정암,회재와 및 화담,남명,연방...등에 이르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