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관이 광복 이후에도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이유



식민사관은 제국주의 시대의 산물이며, 한민족을 완벽하게 장악하기 위한 거대한 음모 시스템의 일환으로 기획된 것인 만큼 제국의 패망과 더불어 존재 근거를 상실했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왜 식민사관의 영향력은 해방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는가.
다시 말하면 이 땅을 오랫동안 유린했던 제국주의의 개(犬)들은 현해탄 넘어 퇴각해 갔건만 왜 어떻게 해서 개소리(식민사관)는 남아서 이 땅의 정신문화를 여전히 미망 속에 묶어두면서 새 시대 정신사의 여명을 방해해 왔는가.


1. 식민사관 자체의 위력


먼저 지적할 것은 식민사관이 보통의 개소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그리고 광범위하게 조선인들의 정신세계를 공략하고 지배했던 마력의 이데올로기였다. 그런 즉 해방 당시 우리의 전반적 수준으로 미루어 볼 때, 이미 학문적으로 일본에 깊이 종속되어 있었는 데다 새로운 역사상을 지향하는 전문 연구인력도 부족하고 학문적 역량 역시 충분치 못한 상태에서 식민사관의 허구성을 인지하고 극복 논리를 개발한다는 것 자체가 지난한 노릇이었다고 하겠다.


2. 친일세력의 재등장


우리 자신의 역량의 한계에 더하여 식민사관의 극복을 더욱 요원하게 한 것은 친일 인맥의 재등장이다.
무릇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인간에 의해 열리는 법, 특히 역사를 왜곡하고 자주성을 말살했던 악질 제국주의로부터 가까스로 해방된 우리로서는 무엇보다 주체적 역사상을 가진 비전과 패기의 리더십이 절실했다. 
그런데 소위 친일파들은 제국의 논리(식민사관)에 길들여진 전형적인 인물들로서 결코 새로운 시대를 주도할 자격이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을 거치면서 우리 현대사의 주류로 확고히 자리잡게 된다.
제국의 패망과 더불어 존재 근거를 상실했던 식민사관이 바로 이들을 숙주로 해서 다시 생명을 연장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정신문화적 차원에서 해방 이후 제일의 건국사업이었어야 할 식민사관의 극복 과제가 해방 공간에서 실종되고 만 것은 하등 이상한 노릇이 아니라 할 것이다.


3. 광복 이후 역사학계의 소극적 대응


뭐니뭐니 해도 ‘전환시대’의 새로운 역사상의 정립에는 역사학계의 의지와 역량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해방 공간 속 역사학계가 그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기 위해 해방의 순간부터 역사학계의 동정을 개략적으로 추적해 보기로 하겠다.
광복을 맞아 그동안 억제되어 있던 역사의식도 바야흐로 봇물처럼 터져 나오게 된다. 그리하여 해방 공간의 역사학의 광장엔 민족주의에서부터 신민족주의, 마르크스주의(유물사관), 실증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색깔의 깃발들이 휘날리기 시작한다.
해방 바로 이튿날부터 조선학술원과 진단학회가, 그리고 뒤이어 조선사연구회, 역사학회 등등 역사학자들의 단체가 속속 들어서고, 또 저마다 색깔을 달리하는 역사책들도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한 연구논문에 의하면 1945-1948년 사이에 출판된 각종 역사서가 무려 200여종이나 되었다고 한다. 2)

이렇게 볼 때 해방 공간은 분출하는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역사 해석이 공존, 경쟁하면서 우리 역사학의 새로운 방향이 모색되던 희망의 시대로 불릴 만도 했다. 3)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유감스럽게도 이와 같은 한국사의 새로운 모색의 흐름이 식민사관의 박멸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당시 역사학계의 동정을 살피건대 그들에게서 식민사관을 청산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와 행동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해방이 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조선의 저변을 장악하고 있던 식민사관이라는 망령과의 일대 투쟁이 없이 새로운 역사상의 도래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었을까. 식민사관의 독버섯을 그대로 방치하였다는 것. 이는 향후 대한민국의 정신문화가 다시 식민사관에 의해 오염되면서 몰주체의 비극성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해방을 맞은 역사 지성의 일대 과오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해방 직후의 역사학계의 오류에 대해서는 조동걸 국민대 교수 (현 명예교수)의 다음과 같은 글이 적절히 지적해 주고 있다.

“…(식민사관의 극복을 위한)구체적 작업이 조직적으로 진행된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은 해방 직후의 역사학이 그의 임무를 다 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앞에 소개한 朝鮮學術院, 震檀學會, 朝鮮科學者同盟, 朝鮮史硏究會, 歷史學會 등 해방 후에 설립한 학술단체의 회칙이나 강령 또는 『휘보』같은 창립(재건)문서를 보면, 식민지 시기의 탄압과 질곡을 회고한 문구는 있어도, 앞으로 식민사학의 청산이나 제국주의 잔재의 청산을 표방한 직접적인 문구는 발견할 수 없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1947년판 『朝鮮年鑑』(조선통신사)에 소개된 학예술단체의 창립 기사를 보니, 오히려 문학.미술.음악.연극.영화 등의 예술인 단체의 강령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 청산을 표방하고 있는데 역사 연구자를 비롯한 학술단체의 강령에서는 그러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진단학회에서 총무간사 조윤제가 제기한 친일파 제명 문제도 흐지부지 용두사미 격이 되고 말았다. 제명 여부간에 분명한 결말이 없었다는 말이다….(중략)…
그러므로 한국사 서술에서 개별적으로는 식민사학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학계의 일반의지는 아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식민사관의 극복도 단편적인 사례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조동걸,『현대한국사학사』,나남출판,1998,392쪽>


4.  6.25 전쟁이 가져온 역사학계의 판도 변화 
- 실증사학의 독주


보다 결정적인 사연으로서 6.25전쟁이 역사학계에 초래한 일대 판도의 변화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그 변화의 하이라이트인 즉, 과거 일제의 한국사 왜곡작업에 보조자로서 참여했던 조선인 학자들이 대한민국 역사학계를 이끄는 핵심 주류로 등장한 점이다. 이는 해방 이후 불안스레 영향력을 유지하던 식민사관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호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퇴행적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시다시피 남북 분단과 6.25 전쟁은 남북한 양쪽에 정치·사회세력의 전면적이고 철저한 재편을 가져오게 된다. 역사학계의 현실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양한 빛깔의 노선이 경쟁하던 해방 공간의 개방적 역사학계의 풍경도 단일한 색조가 지배하는 경직된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더구나 문제는 이렇게 해서 50년대 이후 대한민국 역사학계를 독점적으로 주도하게 된 노선이 하필 실증주의 노선이었다는 점이다. 그 실증주의를 앞 세운 사람들 중엔 식민사관의 산실이었던 「조선사편수회」출신 인물들도 있었다.
조선사편수회란 무엇인가.
일제는 3.1항쟁을 계기로 식민통치 전략을 소위 ‘문화정치’라는 고차원의 방식으로 전환하면서 엄청난 물량과 인력을 동원하여 아주 대대적으로 한국사 왜곡작업에 나서게 된다. 
그 베이스 캠프 역할을 했던 것이 총독부 내에 조직된 조선사편수회였다. 조선사편수회에는 일단의 조선인 학자들도 참여하고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들 중 모모(某某)한 인물들이 바로 이 분단과 전쟁으로 초래된 역사학계의 일대 판도 변화(사회경제 사학계열이나 민족주의 사학계열의 학자들은 대부분 월북하거나 납북됨)에 편승하여 남한 역사학계의 지도적 지위에 올라서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식민사관의 아류로 지칭되던 실증주의사관의 독주(獨走)와 거기다가 식민사관의 산실이었던 조선사편수회 인맥의 부상(浮上), 이는 단적으로 대한민국의 주류 역사학이 식민사관의 영향권 아래서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해방 당시 우리 역사학의 빈곤한 수준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공적을 무시할 수는 없다. 식민사학과의 연관성은 어쨌든 간에 그들은 우리 역사학에 ‘실증주의’라는 근대적 방법론을 도입함으로써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을 정착시키는 데 공헌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실증주의라는 것이 그들의 오류까지 덮어줄 만큼 지대한 의미를 가진 것일까? 그들이 추구했던 실증주의 역사학은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다. 
그것은 ‘철학의 무시’ 또는 ‘철학의 빈곤’이었다. 
그들은 ‘본래 있는 그대로의 사실’ (wie es eigntlich geweesen)이 라는 슬로건에 따라 치밀한 문헌 고증을 통해 개별,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의 복원에 주안점을 둔다.
그러나 그들은 시대적 사회적 관련 속에서 사실이 갖는 의미나 그 사실의 배후에 흐르는 정신사적 맥락, 오늘의 사회와의 이데올로기적 관련성 또는 과거의 사실에 대한 성찰을 토대로 한 미래에의 전망 따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없었다. 심하게 말하면 그들은 오로지 실증의 관문을 통과한 과거의 죽은 뼈다귀들을 죽 늘어놓고서는 ‘이것이 역사다’라고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실증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학의 기본조건일 뿐, 역사학에는 사실에 대한 실증을 넘어 그 사실을 의미 있게 하는 생명력있는 ‘해석’도 중요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실증주의자들이 보여 준 역사해석은 식민사관의 교시를 넘어서지 못하는 유치한 수준이었다. 해방 직후 철학이 빈곤했던 당시 우리 역사학의 수준을 증언하고 있는 한 목소리를 들어 보기로 하자. 
다음은 한영우 한림대(전 서울대) 교수가 월간 중앙과의 대담 속에서 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해방 직후 학교에서 배운 우리 역사는 배울수록 창피한 역사였습니다. 왜 한국사는 이 모양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