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관은 여전히 진행 중
-4인의 학자들의 글을 통해서


앞에서 보았다시피 1960년대 들어 식민사관을 정면에서 비판하면서 새로운 한국사상의 수립을 위해 꾸준한 발걸음을 지속해온 역사학계의 노력에 대해 우리는 일단 경의를 표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문제는 식민사관이 그렇게 순순히 퇴장할 만큼 만만한 녀석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일단의 역사학자들이 식민사관과 씨름하고 있는 동안에도 역사학계 밖 현실세계에서는 여전히 식민사관이 거리를 활보하면서 우리의 정신문화를 조롱하고 있었다. 심지어 저간의 역사학계의 노력이 대체로 성공적이었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오늘날에도 식민사관의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다며 역사학계의 무능력을 질타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1960년대 이후에도 식민사관은 시대의 두통거리로 계속 존재해 왔으며 그 극복의 문제는 21세기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점을 다음 4인의 학자들의 글을 통해 확인해 보기로 하자.

① 1960년대 - 故 함병춘 선생의 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통치가 끊어진 지 24년이 다 되어 온다. 그러나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일인들이 수립해 놓은 식민지사관은 아직도 우리들 사이에 계속되어 지고 있는 것 같다.”

이기백 선생이 식민사관에 대한 비판의 포문을 연 지도 수 년이 흐른 1969년, 당시 30대 법철학자였던 함병춘 연세대교수(1931-1983, 아웅산에서 순직)이 『월간 신동아』에 기고한 글 속의 한 대목이다. 여기서 그는 식민사관에 찌들은 당시 지식인 사회 일반의 지적 풍조를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인간이 모여서 사는 사회치고 역사나 전통이 없는 집단은 없다. 그러나 어떤 사회가 자신의 역사나 전통을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것은 사회마다 서로 다르다. 미국과 같이 역사가 비교적 짧은 사회에 있어서는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역사를 미화하고 낭만화하고 있는 것이다. 워싱톤 대통령에 관한 여러 가지 좋은 일화라든가 링컨 대통령의 성인과 같은 모습은 미국역사의 신화들 중에 잘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미국의 서부개척사에 대하여 섣불리 비판하거나 좋지 않은 소리를 했다가는 반미주의자라는 낙인을 피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미국에 비해서 우리는 역사를 수치스럽고 욕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오늘의 한국의 젊은 지성인으로서 우리의 전통 속에 조금이라도 좋은 점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일종의 문화적 야만행위로 여겨지고 있다. 전통문화의 사회 과학적인 분석으로부터 소설이나 희곡과 같은 문예적인 전통문화 경험의 창작적인 재생에 이르기까지 거의 저주 이외의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의 역사를 혹독하게 비판하는 것이 개화된 지성인의 임무요 기능처럼 되어 있다. 전통의 불미한 점을 얼마만큼 예리하게 또 신랄하게 비평하느냐에 따라서 지식과 지성의 척도를 삼고 있는 것이 한국지성인의 풍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민족이 지닌 전통의 잔재가 하루 속히 말살되어야 한국인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대부분의 한국 지성인의 신조가 되어 있다. 자기 스스로는 전통에서 해방되어 세계의 신사조와 발 맞추어 나아가는 모던 인텔리로서, 전통을 버리지 못한 대중이 어리석고 못나게만 보인다….” <『현대 정치와 조선조의 전통사상』, 신동아, 1969,335-336쪽>

② 1980년대 - 故 이기백선생의 글 

그리고 다시 20여년이 흐른 1980년대, 이제는 좀 식민사관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때도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여전히 식민사관의 청산문제는 논쟁거리였다. 이러한 현실을 개탄하는 글이 있다. 1960년대 초 식민사관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했던 이기백 선생 바로 그분의 글이다.
1987년 자신이 주도하여 펴낸 반년간 학술 교양지『한국사 시민강좌』 창간호의 한 대목을 보기로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식민주의 사관이란 말은 하나의 유행어처럼 되어 있다. 생각해 보면 금년으로서 우리나라가 일제의 사슬로부터 풀려난 지 이미 40년이 되었다. 그러니까 일제의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사람들이 50을 바라보는 그런 연령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일제의 식민주의사관이 청산되지 못하여 우리 사회의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면, 이것은 차라리 비극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③ 2000년대- 건국대 신복룡교수의 글

건국 50주년을 맞아 ‘제2의 건국’을 운운하던 20세기 말에도 식민사관의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었다. 그 단적인 예가 풍부하고 세련된 역사적 식견의 소유자라고 소문났던 당시의 대통령도 알고 본 즉 식민사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었다. 
제2의 건국운동이 그 거창한 명분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나버린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제1의 건국이 정치적 제도적 건국이었다면 제2의 건국은 정신문화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건국이 되었어야 했다. 
그것은 식민사관에 의해 무시되고 왜곡되었던 우리의 역사와 전통을 재발견하는 것이어야 했고 그를 통해서 21세기 문화국가의 비젼을 창출해 내는 것이어야 했다. 그것은 당연히 주체적이고 패기 있고 활달한 역사의식을 가진 자만이 주도할 수 있다. 그는 오히려 앞서 문민시대를 연 전직 대통령과 더불어 역사교육까지 위축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21세기 벽두엔 아예 화살을 역사학계 내부로 돌리는 학자가 있었다. 정치학자로서 한국사 연구에도 깊이 천착해 온 건국대 신복룡교수가 그 사람이다.
그는 광복 후 수 십년이 지난 오늘에도 식민사관이 청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 내부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때만 되면 터져 나오는 일본 우익의 역사왜곡에 실속 없이 분노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부식민지사학’부터 청산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다음은 신복룡교수가 2001년도에 펴낸『한국사 새로 보기』라는 책 속에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이다

“나는 일제 식민사관으로부터 우리의 역사를 해방시킨다는 과분한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라는 광복된 지 반세기가 훨씬 지났지만 역사의 광복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다. 특히 제도권 사학과 기성 사학의 오만과 아집을 나는 용서할 수 없었다. 한국사학을 멍들게 한 것이 일차적으로는 일제의 식민지사학이었지만, 지금의 싯점에서 더 무서운 것은 내부식민지사학이다. 어떤 면에서는 후자를 청산하는 것이 전자에 비해 더 어려울 수도 있다.” < 『한국사 새로보기』, 풀빛 ,2001,7-8쪽>
 
“지금 우리 사회는 또다시 일본 우익들의 교과서 왜곡으로 술렁거리고 있다. 어쩌면 앞으로도 천년은 더 지속될 저들의 곡필에 대하여 비분강개하기보다는 내부식민지사학을 청산하는 일이 더 시급한 일일 수도 있다. 일본의 우익적 사관에 대해서 우리는 일정한 체념이 필요하다. 우리 식의 표현을 빌어 말한다면 소위 ‘망언’을 하고 장관 자리를 훌훌 털고 나갈 사람은 몇 천명이 줄을 서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화폐에 이토 히로부미를 찍고 우리는 우표에 안중근을 찍으면서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떤 숙명과 같은 것이 있다. 
그러나 내부식민지사관은 우리가 단념할 수도 없고 방관할 수도 없다. 일본의 우익사관이야 우리의 손길 밖에 있지만 내부식민지사관은 우리의 의지로 청산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해방 반세기가 지난 지가 얼마인데 아직도 식민지사관의 청산에 목을 매야 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것은 역사에 대한 태만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사 새로 보기』, 풀빛, 2001, 252쪽>

④ 2005년 - 한신대 유봉학 교수의 글

앞서 신복룡 교수의 주장은 역사학계 밖에서 역사학계 내부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였다. 광복 60주년을 맞는 2005년도 오늘에는 역사학계 내부에서 마침내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신대 유봉학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역사학계에서는 해방 이후 그 동안의 식민사관 극복 노력에 대해 성공적이라는 자평이 일반적인 경향이지만, 그는 이례적으로 역사학계에 아직도 남아있는 식민사학의 잔재를 지적한다. 그러면서 근래 친일청산을 위시한 과거사 정리가 제대로 되지 못한 데에는 역사학계의 책임이 적지 않다고 주장한다.
다음은 유봉학 교수가 최근 펴낸 『한국문화와 역사의식』이라는 책 속의 한 대목이다.

“36년 일제 강점으로부터 해방된 지 60년, 이제 와서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 인식에서 식민사학의 잔재를 불식하고자 하고, 우리 문화유산에서 식민지시대의 흔적을 벗겨내자고 다시 주장하는 것은 너무 때늦은 것 같고 그래서 어딘가 멋쩍기까지 하다.
그러나 해방 후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가 겪었던 역사의 격동과 진통이 컸던 만큼 일제 잔재청산의 문제는 그 속에 묻혀버린 채 이제는 우리의 후진성의 근원으로 온존되어 온 면이 있다. 해방 직후 청산되었어야 할 문제들이 전혀 해결되지 못함으로써 이제는 이런 문제들이 우리들이 미래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덫이 되고 있다. 근래 우리 사회에서 친일청산을 위시한 과거사청산 문제가 전면에 떠 오른 것도 이러한 상황에서 야기되었다.
과거청산이 제대로 되지 못한 것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이므로 우리 역사학연구도 마찬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해방 이후 친일 청산이 무산되면서 인적 청산은 물론이고 식민사학의 청산과 그 연구 수준의 극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식민지 지배를 위한 정책 수립을 위하여 대대적인 문화유산 정리와 역사 자료 수집을 진행한 이래, 해방 이후 우리 손으로 다시 정리할 여유를 갖지 못한 채 일제 강점기의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