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헤겔과 나폴레옹과 박대통령과, 그리고...



헤겔은 37세때(1806), 친구인 니트함머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나폴레옹을 이렇게 묘사한 바 있습니다. 

"나는 황제(세계정신)가 주변 지역을 정찰하기 위해 시가지를 말을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와 같은 인물을 보니 정말로 신비스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한 지점에 집중하고 말 위에 앉은 채로 세계를 뒤덮고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나폴레옹에다 박대통령을 대입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월간조선의 조갑제 편집장입니다. 
조갑제씨의 저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초인의 노래"에 보면 이러한 대목이 있습니다. 

"박정희와 그의 우상 나폴레옹의 생애를 비교하면 놀라운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박정희가 나폴레옹을 숭배하다가 그의 생애마저 복사를 하고 만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식민지에서 출생했다는 것을 필두로 하여 두 사람의 공통점을 뽑아 보면 10여 가지나 된다. 훌륭한 어머니의 큰 영향력, 어린 시절의 병정놀이, 작은 키 (박정희는 1m 65cm, 나폴레옹은 두 곳의 사관학교를 다녔고, 박정희는 세 곳의 사관학교를 이수), 포병 출신, 쿠데타로 집권. 
쿠데타라는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이 나폴레옹이다. 1799년 11월 9일 30세 장군이던 그는 군 병력을 동원하여 의회(5백인회)를 해산하고 제1통령에 취임하였다. 그가 1815년에 엘바 섬을 탈출하여 프랑스 왕정을 뒤엎은 것까지 치면 두번 쿠데타를 한 셈이다. 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도 쿠데타를 통해서 대통령에서 황제로 승격했다. 박정희도 유신 선포까지 포함하면 두 번 쿠데타를 했다. 집권 기간도 나폴레옹은 16년, 박정희는 18년, 두사람은 각기 근대 국가의 초석을 놓았다. 이혼 경력, 비극적 죽음 뒤의 재평가도 공통점이다."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조선일보사,1998),375쪽> 

이 글을 읽으면서 저는 혀를 끌끌 찼습니다. 나폴레옹에다 박대통령을 어거지로 맞추다 보니까 어이없게도 그만 조갑제 편집장이 좋아하는 "혁명"이라는 장려한 말을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이 짧은 글에 그는 쿠데타라는 말을 다섯번이나 쓰고 있습니다. 표제의 "근대화 혁명가 박정희의 비장한 생애"라는 말이 완전히 무색해져 버렸습니다. 나폴레옹 덕분에 5.16도 유신도 쿠데타임을 스스로 자인하고 있는 셈입니다. 

조갑제씨가 평소에 박통과 연관시키기를 좋아하는 그 단어, "혁명"이라는 그 멋진 단어를 포기해야 할 정도로 나폴레옹이 그렇게 대단한 인물인가. 나폴레옹이 실권하고 나서 프랑스는 어떻게 되었는가. 보수 반동의 대가 이웃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가 프랑스 정치의 향방을 좌지우지, 프랑스 대혁명의 정치적 성과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박대통령이 죽고 나서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었는가. 5.18의 비극이 일어나고 전두환 장군이 정권을 접수하지 않았는가. 비교하려면 뭐 이런 것을 비교해야지 키가 몇 센치였다는 둥, 쿠데타를 몇번 했다는 둥, 어릴 때 병정놀이를 했느냐는 둥 이거 원 ... 그야말로 지적 식민성-서양 콤플렉스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 짝이 없는 글입니다.

"영웅"은 우리 정신사가 지향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영웅은 소수의 선민(選民)들에게만 해당되는 개념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역사를 주체적으로 형성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영웅이란 사실 말이 좋아 그럴 듯해 보이지, 알고 보면 "권력과 욕망의 법칙"에 충실한 한 특별한 인간일 뿐입니다. 그 행위의 결과가 역사의 흐름에 기여한 바가 있어 특별히 기억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하인의 눈에는 영웅이 보이지 않는다"던 헤겔, 그는 아주 헤겔까지 동원하여 박대통령의 영웅성을 치장하고자 합니다. 즉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조갑제,"한 근대화 혁명가의 비장한 생애-박정희(1)",까치,1992,16쪽)

"박정희의 위대함을 동시대에 살면서 깨닫는다는 것은 어려웠다. 헤겔의 말대로 '하인에게 영웅이 있을 수 없는 이유는 영웅이 영웅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하인이 한갓 하인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헤겔에 있어서도 영웅은 역사의 주체가 아닙니다. 즉 헤겔에 있어서 역사의 궁극적 주체는 세계정신 내지 절대정신(비교 개념; 퇴계의 理)이라는 초월적 개념입니다. 영웅은 그 세계정신이 스스로를 현실 속에 전개해 감에 있어서 동원되는 도구에 불과할 뿐입니다. 비유하면 이렇게 됩니다. 

헤겔에 있어 역사는 쉬임없이 전개되는 장편 거대영화나 연극 또는 드라마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대 위의 배우들의 열연을 통해서 영화의 의미를 파악하고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배우들의 리얼하고 박진감 넘치는 연기에 환호하지만 사실 무대 뒤에서 그들을 연출하고 있는 감독의 존재를 때때로 잊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감독은 관객의 눈에 보일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감독, 그가 헤겔이 말하는 절대정신(세계정신)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한편 아무리 각본과 연출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배우들의 열정이 없다면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몇년전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이 장안의 빅 히트를 기록했지만 유동근씨의 열정적 연기가 없었다면 TV 앞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두지 못했을 것입니다. 역시 열정은 배우의 몫이라는 거지요. 그 배우가 또한 헤겔에 있어서 영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배우의 열정을 샘솟듯 솟아나게 한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 현금 내지 수표 기타일 수도 있고, 대중시대 인기일 수도 있고, 명예(연기대상)일 수도 있고, 영향력(혹시 압니까? 국회의원이 될 수도 있을지)일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감독이 의도하는 목표 즉 "영화를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배우의 "열정의 동기"는 다를 수가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헤겔의 "이성의 간계"(理性의 奸計;die List der Vernunft)라는 개념이 시사하는 바와 비슷한 구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결국 헤겔에 의하면 영웅의 개개의 액션은 그야말로 권력과 욕망의 발로로서, 절대정신이 목표하는 바 "자유의식의 진보"와는 무관하게 보일지라도 역동적인 한 장면이 마무리되고 나서 생각해보면 어느덧 인류의 "자유의식"은 한 단계 진보해 있더라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구조를 바탕으로 해서 헤겔은 세계사를 "자유의식의 진보과정" 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배우의 연기력과 열정은 한결 같을 수가 없다는 거지요. 
그 배우의 연기력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 감독은 배우를 가차없이 교체해 버리듯, 헤겔의 절대정신도 마찬가지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헤겔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일단 그 목적이 달성되고 나면 그것은 덧없이 떨어져 버리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가 되어 버린다. 이와 같은 과업의 수행이 번거롭게 생각되기도 하는 바로 그 순간이 다가오면 그들은 예컨대 알렉산더 대왕이나 시저와 같이 살해당하거나, 혹은 나폴레옹과 같은 유형(流刑)에 처해지곤 했다." 
<헤겔, 임석진 역, 역사 속의 이성, (지식산업사, 1994), 147쪽> 

헤겔에 의하면 결국 역사의 진보를 위해서는 영웅은 또다른 영웅에 의해서 극복되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변증법입니다. 탈피를 거듭하면서 생물이 성장하듯 정신만이 풍요로와지고 성장하고 진보하게 됩니다. 그것이 헤겔의 정신의 변증법입니다. 말하자면 그 인간(소위 영웅) 자체에 대한 기억은 그저 껍데기뿐인 구릿빛 동상으로만 남고, 세계정신만이 역사 속에 장려한 의미로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헤겔에 대한 창조적이면서도 탁월한 해석자의 한 사람인 허버트 마르쿠제(1898∼1979)도 영웅이란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절대정신(세계정신)의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다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역사적 인물마저도 아직 역사의 현실적 주체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역사의식의 실행자이고 「세계정신의 대행자」인 것으로서 그 이상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생에서 활동하고 있는 보다 높은 필연성의 희생이고 역사적 진보를 위한 단순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허버트 마르쿠제, 정항희 역, 이성과 혁명, (법경출판사, 1991), 247쪽> 

결국 헤겔에 의할 때 영웅이란 말이 좋아 그럴 듯 해 보이고 역사의 무대에서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한 각광을 받고 있는 존재일지 몰라도 사실은 절대정신의 실현수단으로서 껍데기와 같은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일회용 소모품 내지 한순간의 거품에 불과할 정도로 불쌍한 존재라는 것이지요. 무대가 좁다 싶을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하면서 광분해서 설쳐 다녔지만 돌아가실 때 알고 보니 자기도 모르게 조종당해왔던 신세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영웅이란 우리 같은 보통 사람에겐 신비스럽고 대단한 존재일지 모르지만(사실은 그도 그냥 인간일 뿐인데), 절대정신 앞에서는 똘만이에 불과한 2중성을 가진 존재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박대통령을 영웅으로 떠받든다는 것이 사실은 박대통령을 크게 모욕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즉 그들은 박통을 그저 껍데기요, 일회용 소모품, 거품적 존재라고 한다는 것이니 박대통령 자신의 역사적 주체성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정신사는 무엇보다 영웅이라고 하는 선민(選民) 개념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불교나 성리학, 동학에서 보다시피 모든 사람에게 불성(佛性)· 理· 한울(하늘님)의 계기가 내재해 있어서 누구나 노력하고 수양하면 부처도 될 수 있고 성인도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