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 다음은 "한겨레 21"의 동양철학 전문 이상수 기자가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의 김기현 박사가 쓴 "조선조를 뒤흔든 논쟁- 사단칠정논변은 무엇을 남겼나? (길, 2000)"에 대한 소개의 글입니다. 


(지성) 사단칠정 논변 풀어쓴 김기현, 선비의 논쟁에서 배워야 한다 


하나의 주제를 두고 몇백년에 걸쳐 논쟁을 벌인 일은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적어도 250년 이상 이어진 조선의 "사단칠정 논변"은 이런 점에서 매우 독특한 사건이었다. 조선시대의 정치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논쟁을 건너뛰고 넘어갈 수 없다. 그럼에도 전공자가 아닌 이상 이 논쟁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한국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김기현 성균관대 강사가 쓴 <조선조를 뒤흔든 논쟁>은 사단칠정 논변의 내용을 비전문가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풀어쓴 책이다. "사단칠정 논변은 무엇을 남겼나?"란 부제가 말해주듯, 그는 이 논쟁을 과거의 일로 돌리지 않고 거기서 오늘의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을 도출해내도록 이끌고 있다.

사단칠정 논변의 발단은 추만 정지운의 <천명도해>란 책에서 비롯했다. 영남의 큰선비 퇴계 이황이 이책의 서문을 쓰면서 인간의 감정 가운데 맹자가 말한 4단(측은.수오.시비.사양)만이 도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논리를 폈고, 이에 대해 호남의 젊은 학자 고봉 기대승이 비판을 가하면서 논쟁에 불이 붙었다. 당시 퇴계는 회갑을 한해 앞둔 원숙한 학자였고, 고봉은 혈기방장 서른셋이었다. 두 사람은 1558년부터 8년 동안 편지를 각각 4통씩 8차례 주고받으며 논쟁을 진행했다. 두 사람의 견해는 끝내 평행선을 그렸지만 이들의 왕복서신은 매우 격조높은 논쟁의 전범으로 남아 있다.

퇴계와 고봉의 논쟁이 결론 없이 마무리된 지 6년 뒤인 1572년 당시 37살이던 율곡 이이와 38살이던 우계 성혼이 논쟁의 바통을 이어받는다. 율곡은 고봉의 관점을 지지했고, 우계는 결과적으로 퇴계의 관점을 지지했다. 두 사람은 각각 9통씩, 총 18통의 서신을 주고받으며 논쟁의 내용을 정교하게 다듬어갔다.

흔히 이 논쟁을 지금까지는 "주기파"인 율곡학파와 "주리파"인 퇴계학파의 논쟁이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지은이는 주기파와 주리파라는 명명법이 우선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주기"니 "주리"니 하는 용어는 일제 식민지시대의 어용학자 다카하시 도루로부터 비롯했다.

"일제시대 어용학자가 쓴 용어이므로 쓰지 말자는 논리는 아닙니다. 학술적으로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죠. 굳이 주기.주리의 논법으로 말하자면 전통시대의 주자학자는 모두 주리론자입니다. 만약 조선시대의 어느 학자에게 "당신은 주기파요"라고 말한다면, 그말은 "당신은 사이비요"라는 말로 들릴 겁니다."

대신 그는 "범도덕주의"와 "순수도덕주의"라는 용어로 율곡학파와 퇴계학파를 구분한다.

"미혼의 청춘남녀가 단둘이 한 공간에서 밤을 지샜습니다. 이들의 행위에 대해 퇴계와 율곡은 뭐라고 답할까요. 퇴계철학에 따르면 이건 도덕이 물 건너갔어도 한참 건너간 겁니다. 퇴계는 도덕과 비도덕의 영역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는 철학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곡철학은 그들이 어떤 행위를 했느냐에 따라 선일 수도 있고 악일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도덕과 비도덕의 영역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봅니다. 이를 사단칠정과 연관지어 설명하자면, 퇴계는 사단만이 도덕과 연관이 있다고 보았고, 율곡은 사단과 칠정이 모두 맥락에 따라 도덕과 연관이 있다고 본 거죠. 이렇게 본다면 퇴계학파를 순수도덕주의, 율곡학파를 범도덕주의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는 퇴계와 율곡 가운데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퇴계와 율곡의 해석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두 가지 담론이요 생각의 경합일 뿐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어떤 도덕론이 더 적합할 것인가는 한국인 각자가 판단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책에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대립을 영호남 갈등과 비교하면서, 오늘날의 지역주의 정치행태가 조선시대 사림의 붕당정치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임을 지적한 부분은 특히 흥미롭다.

"만일 오늘날 영남학파나 기호학파의 선비들이 국정 운영을 맡는다면, 자기 지역에 정부 예산을 더 할당하고 자기 지역 인사들을 편파적으로 중용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겁니다. 조선의 선비라면 반드시 그 반대로 자기 지역보다 다른 지역을 우선시할 것이고, 자기 지역 후배보다 다른 지역 후배를 더 먼저 고려할 겁니다. 경상도의 퇴계가 선조와 헤어지는 자리에서 전라도의 고봉을, 그것도 자신의 학설에 대해 8년간 꼬치꼬치 따지며 비판했고, 나이로도 한참 아래인 그를 첫 번째로 추천한 예가 바로 이 원리에 따른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역주의에 기댄 오늘의 한국정치를 "침팬지 수준"이라고 보는 그의 결론은 대담하다.

"지역감정을 살립시다. 지역감정이란 자연스런 향토애의 발로입니다. 어차피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는 건데 억지로 억누른다 해서 제로상태로 되진 않습니다. 차라리 지역감정을 인정하고, 대신 그 "수준"을 높이라고 요구하는 게 더 현실적이라고 봅니다. 저는 이런 원리를 남북관계에도 확대할 때, 어느 일방의 원리를 무조건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을 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목; 조선조를 뒤흔든 논쟁 - 사단칠정논변은 무엇을 남겼나?

김기현 지음

길(02-713-7738) 펴냄, 전2권, 각 7천원

이상수기자

lee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