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



3. 퇴계학은 영남지역에서만 관심의 주제인가 - 조선시대 기호남인과 현대의 경우 


비판객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퇴계학의 계승을 주장하는 자들의 상당수는 특정 지역, 특정 당색에 기반한 경우가 많다. 솔직이 나는 퇴계학의 계승같은 주장은 들어봐야 영남 남인의 후예인가 하는 냉소적 반응밖에 나오질 않는다." 

님의 이 글은 퇴계는 영남이라고 하는 특정 지역에서만 주로 논의되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남 남인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도 퇴계는 조선의 퇴계가 아니라 영남의 퇴계에 불과했던 것처럼 서술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1) 먼저 조선 시대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영남 외에도 기호 지역에서도 퇴계는 진지한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른바 기호 남인으로 일컬어지는 집단이었습니다. 
특히 실학파로 알려진 일단의 지식인들이 퇴계의 적전으로 자처하였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학계의 통설은 퇴계철학의 관념성·공리공론성을 지적하면서 17·18세기의 소위 "실학"과의 단절성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실학파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성호 이익은 스스로 "우리나라에 퇴계가 있는 것은 중국에 공자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정도로 퇴계학의 적전으로 자처하였고, 또한 그는 퇴계와 관련된 글을 모아 4권에 달하는 "이자수어"(李子粹語)를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퇴계를 "李子"라고 호칭함으로써, 공자·맹자·주자 등과 같은 반열에 퇴계를 올려놓고 있다는 것이지요. 
다음은 성호 이익의 묘갈명의 한대목입니다. 

"우리의 道에는 나름대로 道統의 흐름이 있었다. 
퇴계 이황(1501~1570)은 우리나라의 공자로 자신의 학문을 한강 정구(1543~1620)에게 전해주셨으며 한강은 그 도통을 미수 허목(1595~1682)에게 전해 주셨고, 성호는 미수를 私淑한 분으로 미수의 학문을 배워 퇴계의 학통으로 이어졌다. 후세의 학자들은 우리 학문의 원 줄기가 서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것이다."(성호선생집,부록 권1,묘갈명) 

성호 이외에도 실학의 집대성자 다산 정약용은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을 써서 스스로 퇴계의 정신과의 만남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자 과연 이러한 퇴계와 실학파와의 인연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겠습니까? 
저는 이를 전통의 창조적 계승의 대표적인 사례로 파악하고 싶습니다. 
영남 남인들이 퇴계의 인격적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퇴계를 관념적으로 밖에 계승하지 못하였다면 기호 남인들은 변화된 시대에 조응하여 퇴계의 정신을 창조적으로 실현하고자 한 사람들로 저는 본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예 과감하게 퇴계 역시 실학자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당대 현실에 가장 절실한 학문"을 실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선 초기 삼봉 정도전에게 실학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헌법이었습니다. 나라의 기본틀을 짜는 것이었습니다. <조선경국전>이 그것이겠지요. 즉 삼봉 정도전은 우리 역사상 최고의 헌법학자였던 것입니다. 세종 때의 대표적인 실학은 한글 창제, 바로 언어학이었습니다. 세종 때의 실학은 17,18세기의 실학 못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농학,천문학,의학,출판,인쇄기술,군사학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은 실로 광범위하였습니다. 세조,성종 때는 요즈음 말로 하면 법학이 발흥하던 시대였습니다. 즉 그 시대의 육법전서 <경국대전>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렇다면 사화가 빗발치던 시대,황폐한 인간의 시대의 실학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때는 철학,윤리학,정치학,교육학이 실학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시대에 자연과학을 논하겠습니까? 사회과학을 논하겠습니까? 퇴계는 16세기 이 시대에 최고의 실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대 현실의 변화에 따라 유학은 항상 그 모습을 달리 해왔습니다. 결국 17,18세기 실학이라는 것도 조선의 사회,경제적 물적 토대의 변화에 따라 유학이 적응해 간 것일 뿐인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실학과의 인연 외에 일부 기호남인들의 천주교 입교와 퇴계의 관련성을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 
전 세계 기독교의 역사에서 선교사(전도자)를 통하지 않고 서적을 통해서 독자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빠져든 유일한 예가 바로 18세기 퇴계학파 기호 남인들의 천주교 입교(入敎)입니다. 이것은 인류정신사의 미스테리의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호남인들이 정통 성리학에서 벗어나 천주교에 몰입하게 된 데 대해, 다수의 학자들은 설명하기를 남인들이 오랫동안 정권에서 소외된 불만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아니, 그들만이 정권에서 소외되어 있었는가요? 더구나 당시는 정조 때로서, 정조는 의도적으로 남인들을 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수설의 설명은 본질적인 해명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저의 본질적인 의문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왜 하필 퇴계학파 내부에서 천주교가 문제되었는가? 그들이 서적을 통해서 천주교와 만났고, 그리고 천주교에 빠져들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기존의 사유체계와 천주교리 사이에는 모종의 논리적 연결고리가 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퇴계철학의 어떤 면이 천주교로 이어지는 통로역할을 했을까? 

저는 그것이 바로 퇴계의 理發說(理의 운동성 인정)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주희는 理에 대해 말하기를 "理는 감정도 없고, 헤아리는 것도 없고, 조작하는 힘(creative power)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마테오 리치는 바로 이러한 주희의 理개념을 지적해서 말하기를 "理는 사물의 주재자가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송영배 역,천주실의,서울대 출판부,104쪽). 
그런데 운동성을 인정하는 퇴계의 理개념에 의할 때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천주교 전래 초기 유학과 서학의 접목을 시도했던 탁월한 학자이자 강경 천주교도였던 이벽이 퇴계의 理發說에 찬동했다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저는 퇴계의 학설이 바로 유학과 천주교를 이어주는 통로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2) 이상에서 조선시대 기호 남인과 퇴계의 관계를 살펴보았다면, 다음은 현대사에서 퇴계학에 대한 관심이 영남 지역에 국한되었는가 하는 것을 검토해 보겠습니다. 
현대사에서 퇴계 연구자들을 단행본 출간자들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고 이상은(고려대), 고 유정동(성균관대), 그리고 윤사순(고려대) 교수등 초창기 퇴계학의 초석을 놓으신 분들이 영남 지역 인물들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음은 영남 지역 이외의 분들이 저술한 퇴계 관련 저술의 목록입니다. 

* 이상은 (퇴계의 생애와 학문,서문당,1973) - 함경도 
* 유정동 (퇴계의 생애와 사상,박영사,1975) - 황해도 연백 
* 윤사순 (퇴계철학의 연구,고려대 출판부,1980) - 충남 홍성 
* 이종술 (퇴계와 율곡철학 비교연구,수덕문화사,1985) - 충북 진천 
* 윤천근 (퇴계철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온누리,1987) - 충북 청원 
* 금장태 (퇴계의 삶과 철학,서울대 출판부,1998) - 부산 
* 서용화 (퇴계의 인간관 연구,학연문화사,1998) - 전남 목포 
* 김유혁 (우리에게 퇴계는 누구인가,항산문고,2001) - 충북 음성 
* 김기현 (조선조를 뒤흔든 논쟁-사단칠정논변은 무엇을 남겼는가?상,하-,길 
2000) - 전북 김제 
* 국제퇴계학회 충북지회 (하늘은 말이 없고 道는 형상이 없다-성학십도,퇴계학연구원,1999) 

* 賈順先 등(退溪全書今註今譯:퇴계전서 번역,1991~1996) - 중국 
* 張立文 (퇴계철학입문,퇴계학연구원출판부,1990) - 중국 
* 蔡茂松 (퇴율철학의 비교연구,성균관대출판부,1995) - 대만 
* 마이클 칼튼 (Four-Seven Debete:사단칠정논변,1994) - 미국 
* 아베 요시오 ( 퇴계와 일본유학,전통과 현대,1998) - 일본 

그리고 또 하나, 비판객님은 "퇴계학보"를 경상도 지역 학술지라고 하셨는 데 퇴계학보는 서울에 소재하는 퇴계학연구원에서 간행하는 전국 규모의 학술지라는 것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4. 영남학파에 대해 - 오늘날 영남학파는 영남 땅에서도 희귀종이다 


비판객님은 영남 남인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계신 듯 합니다. 
아마도 현대사에서 정치를 주도했던 소위 TK 집단과 영남 남인을 한통속으로 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님이 조선시대를 전공하시는 분이라 하니 영남 남인들이 조선을 통털어 비주류였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렇다면 영남 남인에 대한 못마땅한 심사는 좀 지나치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영남학파가 조선의 멸망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퇴계의 실천성을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여 탄력성있게 계승하지 못하고 퇴계의 관념성만을 계승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럼 조선은 그렇다치고 현대사에 와서 영남 정권이 시대를 농단하지 않았느냐고 비약해서 문제삼을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박대통령 정권이 퇴계와 관련이 있다는 듯이 말이지요. 하지만 분명히 말할수 있는 것은 박대통령은 지역적 연고로 퇴계를 이용하신 분이지 퇴계의 정신에 공감하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박대통령 추종세력은 이를테면 현대판 영남의 훈구파들이지 순수 영남학파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만약 그들이 영남학파의 정신을 이었다면 그 옛날 퇴계와 호남의 선비들(특히 하서 김인후와 고봉 기대승)과의 아름다운 인연을 잊지않고 있을텐데 어찌 지역갈등 구도나 생산하고 그럴수가 있겠습니까? 

또는 이문열-류철균(이인화) 계열은 영남학파의 후예가 아니냐고 따질지 모르겠습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