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의 철학 -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인문학적 소프트웨어 


사상이란 어떤 천재가 밀실에서 발명품을 창조해 내듯 그렇게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모름지기 위대한 사상이란 시대의 현실 속에서 현실의 모순과의 치열한 대결 속에서, 그러면서도 당대의 현실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가지고 등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마주한 현실은 편협한 유대민족주의와 지상의 제국 로마제국의 횡포였습니다. 공자의 현실은 춘추 전국시대의 혼란상이었으며, 석가모니에게는 카스트제도, 극에 달한 그 인간불평등의 고해의 심연이었습니다. 페리클레스 이후 타락한 선동정치시대의 소피스트들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말할 수 없습니다. 
역시 칸트와 헤겔의 예를 들어 저와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음은 고려대 이승환 교수의 글입니다.

"모든 철학과 사상은 구체적인 시간·공간의 좌표 안에서 배태된다. 칸트라고 해서 하늘에서 『순수이성 비판』을 들고 땅으로 하강한 예언자도 아니며, 헤겔이라고 해서 밀폐된 진공관 속에서 불쑥 『정신현상학』을 들고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그들 나름대로의 구체적인 시·공간 안에서 절절한 문제의식과 씨름하다가 고민고민 끝에 내놓은 것이 그들의 작업이다." 
<이승환, "다름의 존중과 다양성의 철학을 위하여", 『동양을 위하여 동양을 넘어서』, (예문서원, 2000), 31쪽> 

퇴계의 사상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시대의 문제에 대한 퇴계 자신의 적극적 대결의식의 소산이라는 관점에서 퇴계의 사상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퇴계를 이야기하는 다수 논객들의 태도를 보면 퇴계의 사상을 이처럼 시대현실과의 관련성 속에서 해명하고 있는 견해를 발견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단지 개념에 대한 추상적 해석과 계보의 나열·비교만으로 퇴계사상의 전모인 양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철학이란 관념으로 포착된 그 시대이다" 라는 헤겔의 말도 있지만, 철학이 시대현실과의 관련성 속에서 해명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상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의 관념체계 내지는 부호체계에 불과할 뿐입니다. 

생각컨대 퇴계가 직면했던 16세기 조선의 현실과 퇴계의 삶의 궤적, 그리고 사상체계를 검토해 보면, 퇴계 역시 당대현실에 대해 깊이 고뇌한 사람이었다는 것과 그의 사상 또한 그 치열한 문제의식에서 나온 응답의 결과였다는 것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퇴계학의 대가 중의 한 분인 서울대 금장태 교수 역시 "퇴계철학은 현실과의 밀착이 요구된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의 퇴계철학은 조선시대의 역사적 현실 속에서 형성된 것이고, 따라서 현실과 괴리될 수 없는 철학적 자세를 지녔다." 
참고로 퇴계가 직면했던 16세기 사화(士禍)의 시대와 퇴계의 삶의 궤적을 년표로 표시하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참고》사화의 역사와 퇴계의 생애 

***1498 (연산군 4년) : 무오사화 
1501 : 퇴계 탄생 
***1504 (연산군 10년) : 갑자사화 
***1519 (중종 14년) : 기묘사화 
1534 : 퇴계 대과 합격, 출사 
***1545 (명종 즉위년) : 을사사화 - 여인천하 서막 
1549 : 퇴계, 관직사퇴 낙향 
1559∼1562 : 임꺽정의 난 
1565 : 문정왕후 죽음 - 여인천하 종막 
1567 : 선조 즉위 
1570 : 퇴계 세상을 떠남 


퇴계의 사상은 비유하자면 시대의 문제해결을 위한 인문학적 소프트웨어와 같은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므로 이렇게 볼 때 우리가 퇴계의 사상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막바로 개념(주자학적)을 향해 달려가지 전에, 역시 무엇보다 퇴계의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는가 라는 질문에서부터 먼저 시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퇴계의 지난한 지성의 여정, 그 끝에 퇴계의 사상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퇴계의 그 문제의식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문제형성 공간으로서 퇴계가 직면했던 당대의 시대현실에 대한 검토가 필연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제가 시도하고 있는 이러한 추론의 방식은 지금까지의 다수 논객들의 태도처럼 퇴계 밖에서 생명력 없는 "개념"의 창문을 통해서 퇴계를 기웃거리는 것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오히려 역으로 퇴계는 왜 그러한 개념을 가지게 되었는가 하는 퇴계 주체적 입장에서 퇴계의 사상을 보고자 합니다. 
예컨대 퇴계를 "주자학자" 내지 "동방의 주자"라고 하는 것은 주자학이라는 퇴계 밖에서 퇴계와 무관하게 형성된 개념의 틀로 퇴계를 규정하는 입장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저는 퇴계가 앞선 시대 여러 사상가 중에서 왜 하필이면 주희(1130∼1200)의 사상체계에 공감하였으며 그리고 나아가 (스스로는 주자학의 정통을 잇는다고 자부하였음에도) 주희철학을 창조적으로 개편까지 하게 되었는가(혹은 주희철학을 더욱 심화시켰는가 - 다른 견해에 의할 때)라는 질문을 통해서, 주자학의 개념에 매몰된 퇴계가 아니라 역동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퇴계의 모습을 복원해 내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는 견지에서는 퇴계는 주자학의 세계를 향해서 무조건 돌진한 사람이 아닙니다. 주희는 퇴계가 16세기 조선의 시대의 문제에 봉착하여 그 해결을 위해 암중모색하는 도중에 만난 안내자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주희는 어디까지나 안내자일 뿐 퇴계 자신이 개척한 빛나는 길은 따로 있다는 것이 바로 제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 핵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저의 입장에서는 "주자학자로서의 퇴계"라고 하는 기존의 고정된 이미지에서 퇴계를 해방시키게 됨은 물론입니다. 퇴계는 이렇게 해서 생명력을 가진 역사적 실체로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상 조사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