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이 글은 퇴계-남명 탄신 5백주년이던 지난해(2001년) 년말 몇몇 인문학 사이트에 올렸던 글입니다. 
이 글의 주제는 제 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오늘도 여전히 유효한 것 같아 여기에 다시 올리고자 합니다. 



"영호남의 정신문화적 화합을 위하여 - 김대중 대통령께 드리는 형식으로" 


지역감정의 최대 피해지역인 호남지역에서 대통령이 나왔을 때 우리는 적어도 지역감정의 해소에 대해서만큼은 어느 정도 진전이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골은 깊어져 가고 있고 대통령 님의 임기는 이제 1년여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정부의 언론정책의 은밀한 일면을 폭로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던 한겨레신문 성한용 기자가 쓴 책 서문에도 보면 역시 저와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참고 : 사실 이 책의 주제는 지역감정 해소 문제를 다룬 것인 데 조·중·동 등 도하의 유력 신문들은 자기네들한테 유리한 부분만 침소봉대하여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대었지요. 제목만 봐도 그 책의 주제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제목은 이것이었지요. "DJ는 왜 지역갈등 해소에 실패했는가"). 성한용 기자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김대중 정권이 지역문제와 관한 한 그 이전의 다른 정권과 뭔가 다를 것으로 기대했다. 1997년 대선 이전에 강준만, 황태연, 전인권 등 진보진영 논객들의 주장에 동의한 것이다. 약간의 편차가 있지만 그들은 대체로 호남 출신인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면 지역문제는 상당부분 해결할 수 있다고 '예언' 했다. 그런데 그들의 예언은 빗나갔다." 
<성한용, DJ는 왜 지역갈등 해소에 실패했는가, (중심, 2001), 9쪽> 

지난 11월 16일자 중앙일보에도 보면 민병관 기자가 "노트북을 열며"라는 칼럼 난을 통해 지역감정에 관한 아주 우울한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민병관 기자의 글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다음 중 신문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①정치흥정 ②괘씸죄 ③정경유착 ④무질서 ⑤부정선거 ⑥무역적자 ⑦국민정서 ⑧주가조작 ⑨정쟁(政爭) ⑩지역감정. <답>은 ⑩지역감정 입니다. 
한국언론재단이 운영하는 카인즈(www.kinds.or.kr) 라는 사이트가 있습니다. 언론보도 기사들을 주제어 별로 검색할 수 있어 기자들에게 유용한 데이터베이스입니다. 특정단어를 입력하면 그 단어가 들어간 기사 목록이 쫘 - 악 뜨거든요. 
이 사이트에서 10개 종합 일간지가 2000년 1월부터 지금까지 보도한 기사중 위의 단어들이 들어간 기사를 검색한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①19 ②194 ③469 ④478 ⑤925 ⑥930 ⑦1,093 ⑧2,488 ⑨3,215 ⑩6,347 
'정치흥정' 관련 기사는 19건에 불과한 반면 '지역감정' 기사는 무려 6천건 넘게 실렸던 것입니다." 

더욱 우울한 것은 압도적 다수의 청소년들까지 지역감정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과 그리고 그 개선에 대해서도 비관적으로 전망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의 미래를 열어갈 청소년들까지 이렇다니, 아아 정녕 우리의 미래마저 이토록 잿빛이어야 만 하는 겁니까? 
물론 이것은 김대중 대통령님 일방의 무능력에만 화살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워낙에 두터운 갈등의 벽 앞의 소수파 정권의 한계를 거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님의 뛰어난 정치력에 큰 기대를 걸고 있던 저로서는 이런 항의성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그래도 정치 고수쯤 되면 그런 소수파의 한계 같은 것을 초월할 수 있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하고 말입니다. 대통령 님께서는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김영사, 초판 1993 개정판 1998) 라는 저서 속에서 "정치는 예술이다" 라고 말씀하셨지요(214∼284쪽 참조). 소수파이면서도 장엄하게 지역통합을 이끌어 내는 것이야말로 진정 예술의 정치 아니겠습니까? 

저는 여기서, 저기 저 지난날 유고연방의 티토 대통령을 생각해 봅니다. 티토는 다민족국가로 이루어진 유고연방 내에서 소수민족 출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강력한 유고를 이끌지 않았습니까? (티토가 죽고 유고는 지리멸렬되고 코소보 사태라는 최악의 민족분쟁을 얼마 전에 겪었습니다) 티토 같은 사람이야말로 정치 9단이라 할 것입니다. 티토에게는 철학과 이념이 있었습니다. 소수파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바로 철학과 이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치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듯 지역감정의 연원을 역사 속에서 찾곤 합니다. 물론 어느 시대고 지역주의는 있었습니다. 특히나 우리 나라처럼 지리적 경계가 수 백년이나 한결 같았던 상황에서 지역정체성 차원에서의 지역주의는 있었다고 해야합니다(고영진, "한국에서 지역주의의 역사적 맥락", 사회연구 창간호, 2000년, 36쪽 참조). 또한 중앙정부 차원에서의 지역차별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지역간 갈등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순 현대사의 작품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것도 70년대 들어와서 고착화 된 현상입니다. 적어도 60년대까지만 해도 영남사람이 호남 땅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다거나 호남사람이 영남 땅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화제가 될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 지역갈등 구도를 생산한 주역이 누구인지인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대통령님은 그 구도의 최대 희상자이셨고 한편 반사적으로 수혜자적 측면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주역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 갈등구도의 상대방이었던 대통령님은 이제 무대를 떠나려 합니다. 어차피 떠나시겠지만 아아, "내가 집권하면 1년 안에 지역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던 호언장담은 어떡하고 떠나실 것입니까? (성한용 앞의 책, 표지의 글에서). 
200억의 국고와 500억의 기부금을 들여 갈등 생산의 주역 박대통령 기념관을 세우고 떠나시겠다고요? 무엇을 기념하시겠다는 겁니까? 에라 지역갈등 해소 못할 바에야 화끈하게 지역갈등 기념이라도 해야겠다 이런 것인가요? 정녕 지역갈등 해소를 위해서는 "정의의 원칙"까지 저버리는 그런 파국적인 방법 밖에는 생각나지 않으시던가요? 
결국 이러한 대통령님의 모습을 보고 한겨레신문 성한용 기자는 그 책의 결론 부분에서 이렇게 단언했는 지 모릅니다(334쪽). 
"지금까지 실패한 DJ가 남은 임기동안 지역갈등 해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없다." 

그러나 과연 성한용 기자의 단언처럼 오로지 절망적이기만 할까요? 저는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바로 그 방법을 말씀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아무도 거론한 적이 없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고려했어야 했던 방법입니다. 
이제 절망의 현실 앞에서 최후의 구원의 방법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정신문화적 접근방법 입니다. 
대통령님도 누차 강조하셨듯이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합니다. 문화의 세기답게 지역통합의 과제도 문화적 차원에서 그 해결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역사와 전통 속에서 통합의 생명줄을 찾자는 것입니다. 

많은 지식인들이 마치 자신의 역사 지식을 자랑이나 하듯이 지역갈등의 연원을 우리의 역사 속에서 찾곤 합니다. 예컨대 백제의 멸망이니, 훈요십조니, 정여립의 난이니 하면서 말이지요. 
물론 거기에는 타당한 일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전체적 맥락에서가 아니라 어느 한 부분을 확대해석해서 강조하는 식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들은 반면에 우리 역사 속의 더욱 강하고 장엄한 지역통합의 메시지는 간과하고 있습니다. 
백제의 멸망을 이야기하지만 원효성사의 통합의 메시지는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효(617∼686)는 통일기에, 그것도 통일(668) 이후에도 20여년을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 당시 누구보다도 분열사회상에 고뇌하였던 사람입니다. 그의 사상에 백제·고구려 유민들의 아픔이 반영되어 있으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원효의 사상 자체가 이러한 당대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장엄한 통합의 메시지라는 걸 도올 김용옥 만큼 분명한 어조로 말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그의 글을 잠시 인용하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南北으로 분열된 분단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南北의 분열은 南과 北의 사회 그 자체를 또 갈기갈기 찢어 놓고 있다. 이러한 분열의 시대일수록 우리는 통합의 논리를 요구한다. 나는 이러한 통합의 논리를 우리 나라 역사에 최초로 체계적으로 정립한 사상가가 바로 원효(元曉 : 617∼686) 라고 본다. 그는 당시 대당제국의 이데올로기인 天台·華嚴·唯識·老莊 등의 모든 사상을 두루 섭렵하여, 淨士로 표출되고 있는 신라고유의 토착정신과의 연계를 줌으로써 새로 등장한 통일신라의 정치질서에 화합과 통합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한 자이언트였다. 그가 삼국이 통합 되어가는 과정에서 생애를 보냈고 또 신라통일이 이루어진 후로도 18년이나 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볼 때, 그의 지적 관심의 소재는 확연히 나타나는 것이다. 그의 『十門和諍論』은 단순히 어떠한 교리의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분석될 것이 아니라 바로 통일신라가 안고 있었던 내재적 모순, 즉 唐制를 모방하여 郡縣制를 두어 中央集權체제를 실현하려고 하였지만 왕권의 절대성이 확립되지 않았고 그외로도 많은 귀족과 토호의 세력, 그리고 백제·고구려 유민들의 많은 문제점을 안고 고민하던 당시 분열사회상의 통합적 회통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로서 제공된 그의 말년적 종합노력으로 평가되어 마땅할 것이다." 
<김용옥,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통나무, 1996), 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