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퇴계학부산연구원에서 펴내는 학술지 "퇴계학연구논총" 제1집(1995)에 수록된 무은재 김호길 박사의 글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그가 단순히 과학자라고 하기에는 퇴계학의 요체를 꿰뚫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퇴계를 이론에만 깊이 천착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 것과 달리 그는 퇴계를 근본적으로 실천철학자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포항공대의 설립이 퇴계의 정신에 입각해 있다는 진술에 저는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퇴계학과 현대사회"


제가 오늘 퇴계학부산연구원과 국제퇴계학회부간지부에 계신 여러분 앞에서 퇴계학과 현대사회란 제목으로 말씀드린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동시에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저 개인에게는 퇴계학은 가학으로서 제 조부 수산秀山은 퇴계의 도통을 이은 서산西山선생의 문하생이며 도산의 우석友石 이탁李鐸 고모부께서 제게 가학家學을 이어받으라는 명을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 재조가 유학을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되어 자연과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마는 고모부의 하명을 잊기 힘들어 때때로 유학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 후 40년이 지난 시점에 여러 전문가들을 모시고 퇴계학에 관하여 소견의 일단을 피력할 기회를 갖고보니 영광과 함께 송구한 마음을 가지게 됨을 여러분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습니다.

퇴계선생께서 돌아가신지 4백년이 넘었습니다. 선생의 자명自銘에 "我懷伊阻 我佩誰玩"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선생께서 가지셨던 패물은 4백년이 지난 시점에서 우리 나라 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완상하고 있으며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의 노력으로 앞으로 4백년 뒤에도 선생의 패물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저를 이 자리에 부르신 여러분들의 의도는 전문가보다는 비전문가로서 전문적 지식보다는 상식선에서 퇴계학을 조명하고 퇴계학을 지식 차원으로부터 실천 도덕 차원으로 저변확대를 꾀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비전문가이기에 다소 무식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큰 허물이 되지 않을 것이므로 안심하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퇴계학을 전공하시는 여러분들께서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월천趙月川(월천 조목;1524~1606)은 "세상에서 퇴계를 말하는 이는 더러 있어도 퇴계가 실천했던 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조월천의 이 말은 오늘 우리가 퇴계 연구를 위해서 반성해 볼 기준을 주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퇴계는 첫째로 주자학을 계승 발전시킨 학자로서의 퇴계입니다. 주자서절요, 주자행장집주, 심경주석, 이학통록, 계몽전의, 천명도설 등 저서와 문인들과의 왕복서한을 보았을 때 퇴계가 조선대 최고의 유학자임을 의심할 사람은 없습니다. 퇴계 연구의 주류가 학자적 측면에서의 퇴계에 있으며 지식 위주의 현대 교육의 입장에서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둘째로 경세가로서의 퇴계 연구를 들겠습니다. 퇴계는 대사성, 대제학 등의 내직과 단양, 풍기 등의 군수를 역임했습니다. 유도의 이상이 수기修己 치인治人에 있으므로 퇴계의 경세가적 측면도 치인의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 과제가 되어야 하며 이 분야 연구에 더 많은 업적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퇴계는 시인 또는 문인적 측면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최근 한시의 번역 및 주석이 시작되었습니다마는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실천도학자로서의 퇴계의 인간상 여구입니다. 조월천이 퇴계를 참답게 아는 사람이 드물다는 말은 곧 퇴계를 문인이아 학자로서 알 뿐 실천도학자로 또는 성자로서의 퇴계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학자나 문인이나 경세가로서가 아니고 실천도학자로서 전국의 유학적 풍화를 이룩한 데 있습니다. 이 분에의 연구로서 최근 권오봉 박사의 업적을 높이 평가해야겠으며 또한 더 많은 연구가 이룩되어야 하겠습니다. 

유학을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 합니다마는 爲己에서 좀은 의미의 爲己와 넓은 의미의 爲己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격치성정格致誠正은 좁은 의미의 爲己 즉 좁은 의미의 자기완성이며, 격치성정格致誠正으로 수신修身을 이룩한 이후에 제가濟家 치평治平은 넓은 의미의 자기완성입니다. 허무적멸의 道에 비하여 유도가 가지는 두드러진 특성은 인륜을 중시하고 가정을 주시하며 제가濟家와 함께 치평治平으로 보다 더 큰 자기완성을 목표로 하는 데 있습니다. 학자적 측면의 퇴계 연구는 격물치지 성취도를 본다고 할 수 있으며, 퇴계의 사생활을 연구하는 것은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濟家를 보는 것이며, 내외직 및 서원 창설 등 우리는 퇴계의 치평治平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전체를 통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誠과 敬으로 일이관지한 것에 퇴계의 참 모습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퇴계학 연구는 퇴계학만이 아닌 퇴계 생활연구를, 그리고 퇴계학을 참답게 이어 받는 것은 퇴계의 학문과 함께 생활신조를 이어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 발전된 사회에서 4백년전의 퇴계사상을 연구하는 것은 4백년전 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우리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는 자유와 다양성이 강조되는 사회로서 온갖 종류의 사상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육에 있어서도 현대의 공교육은 다양한 사상을 소개하는 지육知育에 치우쳐 있고 어는 한 사상을 행동규범으로 뚜렷하게 제시하는 덕육德育은 시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도人道라는 의미에서 실은 반인도反人道가 행해지고 있으며, 가정보다는 개인이 사회의 기본 구성요소가 되어 어린이, 노인 문제 뿐 아니라 사람들의 정서생활에서 많은 문제를 낳고 있습니다. 물질적 생활은 향상되었습니다마는 사회 혼란은 증가되어 가는 추세에 있습니다. 서양이 걸어가고 있는 이 문제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면 우리 조상들이 수백년간 지켜왔던 퇴계 사상을 현대적으로 조명하는 데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는 것이 유익한 일이겠습니다.

첫째로 퇴계학의 핵심은 敬을 위주로 하는 실천도학實踐道學에 있으며, 仁義가 무엇인지 알고 仁義를 실천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천명도설에 보면 "天卽理也"라 하고 理의 내살은 誠이며 진실무망한 것이라 했습니다. 사람은 天이 낳은 것으로 따라서 天理에 따라야 하며, 하늘이 인간의 본성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단四端으로 인욕을 누르고 天理를 지키는 데서 사람이 사람다와진다고 했습니다. 天理를 지키기 위해서는 정시靜時에 존양存養을, 동시動時에 성찰省察을 꾸준히 해야 하며, 잠시라도 이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서 敬으로 일이관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4백여년 전에 天을 理라고 본 것 즉 天은 곧 자연법칙이며 자연법칙은 진실무망하다는 생각은 여타 종교에서 기도를 통하여 자연법칙도 바꿀 수 있다(기적)는 생각에 비하여 훨씬 더 발전된 사상으로 저는 보고 있습니다. 자연법칙이 불변인 것 같이 사람이 지켜야 할 道理를 찾아내어 그것을 몸소 실천한 데서 퇴계의 위대성이 존재합니다. 매사를 조심하고 敬을 항상 유지한다면 모든 일을 제대로 하게 될 것입니다. 측은한 마음은 仁의 端으로, 불행한 사람, 어린이, 노인에게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대한다면 노사문제도 정치문제도 사회복지 문제도 어려움없이 해결될 것입니다. 부모형제를 저버리고 친구를 배신하면서도 기도에 의하여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논리를, 논리로서만이 아닌 실천도학으로 감복시킬 수 있는 점에서 퇴계학의 현대적 의의를 되새길 수 있겠습니다.

퇴계선생은 사회개혁을 위하여 급격한 정치개혁보다는 교육을 통한 장기적 개혁에 중점을 두었으며 공교육보다는 자율서을 가지는 서원 창설에 힘써 교육의 도시 편중에서 서원을 지역적으로 확산시켜 학문 발전이 지역상 균형있게 된 것은 퇴계의 공로라고 이우성 교수가 지적했습니다. 교육을 통한 사회의 장기적인 면에서의 개혁과 교육의 지방화 운동은 우리 사회에서 깊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지방에 명문대학을 세움으로써 국토의 균형적 발전을 이룩한다는 포항공대의 설립취지도 선생의 서원운동과 일맥 통한다 할 수 있겠습니다.

광복전 도산 안창호의 교육을 통한 나라의 독립도 선생의 교육중시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서양에서 발전된 민주사회제도는 이익추구를 인간행동의 근본으로 보고 이익과 이익의 대결에서의 균형이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정부조직에서의 삼권분립, 노동조합 對 자본주 드의 관계가 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사상은 전통적 유도를 이어받아 人性은 근본적으로 착한 것이며, 인간이 절대선을 추구하고 절대선을 실행함을 강조하는 데 있습니다. 서양사상이 보다 더 실천적인 면이 있습니다만 너무 이익문제를 강조함으로써 人性이 본래 착한 것을 잊어버릴 염려가 있겠습니다. 이익문제 일변도로 나간 것이 공산사회나 서구사회의 문제점이 되지 않는가 저는 생각하며, 절대선의 문제를 현대에 한번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퇴계학을 전공하지 않은 제가 전문가 여러분 앞에서 분수에 맞지 않은 말씀을 드린 것 같습니다.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선생이 끼치신 風化가 많이 남아 있으며 우리 사회의 원동력이 선생의 풍화에 연유한 것 같습니다. 선생이 중시했던 것을 우리가 중시하게만 된다면 우리 사회와 아울러 인류의 행복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좁은 소견을 피력했음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