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과학 - 포항공대 스토리(2)

(앞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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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제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의문에 부딪힙니다.
첫째, 왜 그는 기존의 명문대학이 즐비함에도 특히 자신의 모교 서울대학이 여전히 위세를 자랑하고 있음에도 새로운 대학을, 그것도 지방대학의 설립을 꿈꾸었을까. 
둘째, 왜 그는 퇴계를 인생의 사표로 삼고 있으면서도 퇴계와 직접 관련된 학문, 말하자면 인문학을 하지 않고 자연과학자의 길을 갔을까.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논의의 핵심이요, 이 글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 모두는 그가 큰바위얼굴로 삼고 있던 퇴계의 생애와 사상에서 그리고 그러한 퇴계 정신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퇴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무은재 김호길의 생애와 정신 세계를 논할 수 없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퇴계도 오늘로 말하자면 서울대학(성균관) 출신이었습니다. 나중에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기도 했으니 서울대 총장 출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퇴계가 왜 풍기 군수 시절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의 사액을 소청하는 등 서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스스로도 예안 향리에다 계상서당,도산서당을 차리고 그것을 평생의 사업(퇴계는 스스로 "吾事"라고 표현)으로 자임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공직 은퇴 후 대학 총장(서원 원장)으로 말년을 품위있게 유유자적하기 위해서였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잠시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요.

퇴계가 살았던 시대는 조선의 16세기, 이른바 사화(士禍)의 시대였습니다. 시대를 장악하고 있던 훈구파 집단의 부정 부패 비리 전횡이 시대를 황폐화하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퇴계는 교육을 통해서 시대의 변혁을 도모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퇴계가 처음부터 교육에 주목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여집니다.즉 적어도 16세기 전반기까지만 해도 퇴계를 포함한 사림 세력은 현실 정치판에서 훈구 세력과의 직접적 대결을 통해서 변혁을 기획했음은 틀림없습니다. 그 하이라이트가 정암 조광조를 위시한 기묘사림들의 정치적 실천 행위였습니다. 기묘사화(1519)에 의해 크게 좌절하고 일시 후퇴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들이 현실 정치에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퇴계가 출사한 것도 34 때였으니 기묘사화 이후인 1534년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결정적인 전환의 계기는 소위 "여인천하" 그룹이 일으킨 을사사화(1545)라고 하는 또 한차례의 태풍이었습니다. 
“사화의 시대는 이젠 물 건너 갔겠지” 하는 시점에서 터진 이 을사사화가 사림士林들로 하여금 현실 정치판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결정적으로 돌리게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마침내 士林들은 현실 정치를 통해서는 시대의 새벽을 기대하기는 힘들다고 판단하고 근본적인 전환을 모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듭되는 사화로 인해 다수의 사림들이 죽거나 유배가는 상황에서 이제 士林들은 전략을 전면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거지요. 

그것은 실천 방법론상의 전환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당대 현실을 장악하고 있는 훈구파 집단의 두터운 벽을 직시하고, 소수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이고 급진적인 방식에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우회적이고 간접적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방향을 모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교육”이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철학으로 무장한 신세대 젊은이들을 교육함으로써 다음 시대를 기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교육을 통해 엘리트들의 저변 확대를 도모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교육이 중요하다고 할 때, 그럼 과연 퇴계는 자신의 모교인 성균관에다 희망을 걸었겠습니까? 물론 아니지요. 그 당시 서울대학인 성균관의 학풍이 오늘날의 서울대학처럼 고시(과거) 위주의 세속적 가치관에 찌들어 정신의 창도자로서의 역할을 기대할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퇴계가 풍기 군수 시절 경상 감사에게 올린 글인 "백운동서원의 사액을 소청하는 글" 중에도 당시 성균관에 대한 퇴계의 문제의식을 시사하고 있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저 국학(성균관)이나 향교는 중앙 또는 지방의 도시 성곽안에 있어서 한편으로 학령에 구애됨이 많고 한편에는 번화한 환경에 유혹되어 뜻을 바꾸게 하여 정신을 빼앗기는 것과 비교하여 본다면 어찌 그 공효를 서원과 같이 비할 수 있겠습니까?"(정순목, 퇴계평전, 59쪽)

결국 퇴계는 새로운 교육기관을 모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도로서 나타난 것이 바로 퇴계의 서원건립운동이었던 것입니다. 전국 각지에 산재하게 되는 서원을 통해서 광범위하게 배출되는 신세대 젊은 지성들에게 퇴계는 미래를 걸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퇴계는 이 서원이 국가의 공인을 받도록 노력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액제도입니다. 그러니까 서원이란 오늘날로 말하자면 국가가 공인한 사립대학이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조선 후기 서원의 폐해에만 주목하다 보니까 퇴계의 이런 서원건립운동의 의미를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육혁명이었습니다. 이 때부터 지방교육이 활성화되고 지방문화가 발달하며 인문정신을 갖춘 엘리트들의 저변 확대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조선 후기 서원의 폐해는 폐해대로 인식하더라도 퇴계의 이러한 혁명적 실천의 의의를 우리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 서울대학의 문제는 그대로 퇴계 시대의 성균관의 모습을 연상케하기도 합니다. 대학 자체가 거대한 고시학원화 한 몰골을 한번 보십시요. 서울대학에 인문정신이 살아있습니까? 서울대 철학과 출신의 대통령이 철학없는 정치를 했다는 것만큼 서울대의 문제점을 상징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무은재 김호길 역시 우리 시대의 미래는 오로지 교육에 달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를 걸기에는 오늘의 서울대학이나 그 아류를 좇을 뿐인 세칭 명문대학의 현실은 그저 한탄스러울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무은재 김호길을 지근 거리에서 보좌하였던 이재수 포항공대 총장 보좌역의 다음과 같은 글을 한번 보기로 하겠습니다.
"김호길 박사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셨고, 포항공대 교수의 대부분이 서울대 출신이다. 이런 연고와 분위기 속에서도 그 분은 서울대 이야기만 나오면 곧잘 흥분하였다. 특히 서울대 교수와 기자들 앞에서는 더 그러했다. 서울대가 우리나라 교육과 학문 발전에 제 역할을 못하고 있으니 포항공대가 그 역할을 대신함으로써 나라와 서울대 발전이 함께 이루어질 수 있다는 논리를 언제 어느 자리에서나 당당히 펼쳤다."("학장님,우리 학장님", 182쪽)
16세기 그 당시 퇴계의 문제의식은 그대로 우리시대 무은재 김호길의 문제의식이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퇴계의 생각이 혁신적이었듯 무은재 김호길도 오늘의 시대 상식을 뛰어넘는 혁명적 사고로 우리 시대의 문제의 본질에 직접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포항공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그 당당한 행보입니다.

첫째, 포항공대 스토리는 우리시대 건전한 발전을 가로막는 견고한 상식과 통념에 대한 도전과 승리의 기록입니다. 원칙과 정도를 지향하는 무은재의 패기와 모험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원칙과 정도" - 그것은 바로 퇴계의 理철학이 가르치는 정신이기도 한 것입니다.
지방소도시에다 새롭고도 이상적인 대학을 설립하겠다는 무은재의 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회의와 냉소를 보냈다고 합니다.
"서울을 떠나서는 일류대학을 세울 수 없다네."
"호길이, 자네가 제대로 된 박사 셋을 미국에서 데려다 1년만 이 포항에 붙들어 놓을 수 있다면 내가 술을 크게 한번 사지." 등등... 

둘째, 재단과 학사 행정의 철저한 분리(대학의 자율성 보장)는 우리나라 사학이 지향해야 할 모범적 사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를 완벽히 보장해준 초대 이사장 박태준씨의 공헌이 클 것입니다. 아마도 훗날 박태준씨의 정치 경제적 업적은 몰라도 포항공대에 관한 그의 기여는 높이 평가될 것입니다.

셋째, 대학입시에서 복수지원제도 도입을 주장하여 이를 실현시킨 점입니다. 당시 고려대, 연세대 등 서울대의 아류를 지향하는 대학들은 쫀쫀하게도 자신들이 입을 상처에 연연하여 복수지원제도의 도입을 주저하고 있을 때 포항공대는 과감하게 이를 주장, 실현하였다는 것입니다. 합격생의 많은 숫자가 서울대로 빠져나가는 수모를 겪었지만 결국은 수험생들에게 선택 기회의 폭을 넓힌 셈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포항공대가 진정 어디에 가치를 두고 있는가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하겠습니다.
역시 앞서 인용한 바 있는 이재수 총장 보좌역의 다음과 같은 글을 보기로 하겠습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우리나라 대학입시는 단판승부제였다. 그것은 우수학생이 한 번의 실패로 재수, 삼수의 길로 들어서야 했고 재수학원이 번창하는 등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엄청난 손실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제도였다. 이 비교육적 현실을 개선하고 학생들에게 대학선택권을 확대해 주기 위해 1994학년도부터 복수지원제가 실시되었다. 대다수 국민들이 모르고 있겠지만 복수지원제 도입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끝내 관철시킨 장본인이 바로 김호길 박사이다."("학장님,우리 학장님",184쪽) 

넷째, 교수 채용에 있어서 절대 독립을 지키는 등, 학사 운영에 있어 공정성을 확보하여 여느 사학에 있게 마련인 인사상 정실의 개입을 철저히 봉쇄하였다고 합니다. 대학 설립에 관한한 막강한 권한을 가진 설립자의 청탁에 대해서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음은 교수 임용과 관련하여 청탁을 하였다가 머쓱한 경험을 한 당시 포철 회장이자 포항공대 설립자인 박태준씨의 술회입니다.
"그는 매사에 원칙을 고수했고, 자신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