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어느 사이트에서 "질문이"라는 아이디를 가지신 분이 저에게 퇴계학의 현대적 가치에 대해 질문을 주셨는 데, 다음은 그에 대한 답변의 글입니다. 게시판 용량에 비해 글이 넘쳐서 나누어 싣습니다.



퇴계학의 현대적 가치(1)- 하나의 試論 


질문이님은 퇴계학의 이론적 정합성은 별론으로 하고, 과연 우리의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퇴계의 철학이 우리에게 어떤 유용한 메시지를 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범삶적인 문제. 이런 표현이 가능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런 범삶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퇴계의 사상이 현실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시대의 구체적 현실문제는 퇴계 사상으로는 무리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여 이런 현실 문제에 대한 조사연님의 규정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데 그게 잘못된 것일까요? " 

사실 질문이님이 지적하고 있는 것은 제가 퇴계를 논함에 있어서 해명해야 할 궁극적인 과제요 실제로 또 추구하고 있는 바라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퇴계에 대해서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닐 것입니다. 제가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정암 조광조라든가 남명 조식, 아니 나아가 우리 전통사상 일반에 공히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럼 일단 제가 퇴계를 논하고 있는 저의 기본 마음가짐부터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제가 5백년 전의 퇴계를 오늘에 논하는 이유는 역사 속의 거목으로서 퇴계의 존재를 새삼 확인하고 오로지 숭배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역사 박물관의 특별한 골동품을 감상하듯 단순한 지적 호기심의 발로도 아닙니다. 퇴계에 대한 지식을 과시함으로써 전통사상에 대해 호의적인 분위기에 편승하여 무슨 지적 헤게모니를 노리는 류는 더더군다나 아닙니다. 
그렇다면 저의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퇴계의 정신이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의식과 실천에 영향을 주고 그리하여 질곡의 이 시대 현실을 넘어 바람직한 미래를 열어가는 데 의미있는 메시지로 살아나도록 하는 것, 바로 이것이 제가 추구하는 목적이라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제가 제시하는 퇴계상이 그 아득한 역사의 늪, 무수한 세월의 강을 뛰어넘어 오늘의 현실에 생생한 실천적 메시지를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퇴계학의 현대적 가치는 궁극적으로 제가 해명해야 할 과제인 만큼 여기서는 일단 개략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현대사의 지적 식민지 상황 극복 - 해방의 인문정신을 위하여 

해방 이후 한국인문학계는 서양철학 일변도로 흘러왔음을 님도 잘 아실 것입니다. "철학=서양철학"이라는 등식이 오랫동안 확고했던 상황에서 지난날 우리 정신사를 주도했던 동양철학,한국철학은 시대의 몰락에 따라 마치 속죄의 주홍글씨를 마빡에 붙이듯 철학이라는 보통명사 앞에 "한국","동양"이라는 말을 접두어처럼 붙이고 이 시대 정신사의 문간방으로 밀려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20세기 현실에서의 동양철학,한국철학 소외의 실례는 서울대 심재룡 교수의 글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가 83년도에 쓴 글에 의하면 우리나라 대표적 대학의 대표적 학과라고 할 서울대 철학과의 경우 당시 총원 14명의 교수진 가운데 동양철학(한국철학포함) 전공자는 단 3명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철학하는 자세들, 집문당,1986,320쪽 참조 - 2002년 현재도 사정이 나아진 것은 아닙니다. 총원17명 중 4명에 불과.) 

그러고 보면 오늘 우리의 지성의 풍토는 한 마디로 지적 식민지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치적으로는 독립했는지 몰라도 정신적으로 우리가 독립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퇴계는 사라지고 기지촌 지식인들만이 우글거리는 오늘의 현란한 지성의 거리에서 이렇게 토로하고 있는 목소리(전주 한일장신대 김영민 교수)도 들립니다. "수입과 유통, 주석과 복제는 넘쳐나지만 우리의 역사와 터에 기반을 두면서 생각의 자생력을 심도 있게 키워내는 학자는 찾기가 쉽지 않다." 그는 또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우리의 현대 인문학은 밑둥이 송두리채 잘린 채 썩어 가는 가지의 여기저기에 접붙인 수입 학문의 현란함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죽은 고목에 붙어 있는 화려한 버섯들처럼 그것은 고목의 뿌리와 세월의 힘에서 자생한 열매가 아닌 것이다." 

물론 우리의 사상이 정말 별볼일 없고 오늘 우리의 문제 해결에 아무런 메시지도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상황을 감수하고 적극적으로 서양철학을 추종하는 것이 마땅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대로 연구도 해보지 않고 지레 주눅부터 들어 우리의 전통사상을 폄하하고 내팽개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억울한 일 아니겠습니까? 

퇴계는 우리 인문학의 보고의 하나입니다. 제가 앞서 수군작님께 드리는 글에서 플라톤, 헤겔과 대비해 보았습니다만 우리 인문학의 자존심이기도 합니다. 
월드컵을 통해서 우리는 아시아의 자존심임을 선언하였습니다. 이제 인문학에서도 우리는 아시아의 자존심임을 확인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2) 현대사의 어두움, 그 인문학적 청산 

우리는 정치적으로는 오랜 독재를 극복하고 민주화 시대를 맞이하였지만 아직도 구시대의 그늘은 사회 곳곳에서 음습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새로운 시대로의 운행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군정종식은 정치적으로 선언되었을 뿐 철학적으로 선언된 바는 없습니다. 정치적 선언은 정치적으로 번복될 수 있습니다. 소위 "문민정부" 시절 또 "국민의 정부" 시절, 박통이 무덤에서 부활하고 5공이 다시 거리를 활보하던 것을 보십시요. 
구시대에 대한 보다 철저한 청산은 인문학적 노력을 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는 퇴계의 사상에서 그러한 메시지를 읽고 있습니다. 
퇴계가 살았던 시대는 조선의 16세기, 이른바 사화(士禍)의 시대였습니다. 시대를 장악하고 있던 훈구파 집단의 부정 부패 비리 전횡이 시대를 황폐화하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니까 퇴계의 사상은 훈구파 시대의 종언을 철학적으로 선언하는 의미가 있었다고 봅니다. 

(3) 서양철학의 어두운 면 극복 

저는 서양철학의 장점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우리 인문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서양철학과 적극적 대화를 통해 배울 것은 배우고 보완할 것은 보완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 옛날 원시 유교가 이웃 사상인 도교와 외래 사상인 불교와 만나 신유학(성리학)으로 도약했듯이... 신유학 제3의 물결은 서양철학과의 만남에서 온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양철학의 어두움은 우리가 직시해야 한다고 봅니다. 
수구 세력들은 지난 날의 독재를 고상한 서양철학 개념으로 포장하여 그 추악한 본질을 호도하고 있습니다. 

(4)철학의 역할 강조 

퇴계는 철학이 시대를 변화시킨다는 신념에 투철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퇴계는 일단 조선의 현실에 기반을 둔 철학을 굳건히 세우는 것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아마도 퇴계는 정암 조광조 등 선배 사림들의 실패가 그들 학문의 미성숙성에서 기인한다고 보고, 그에 대한 반성에서 철저한 철학적, 이론적 작업에 헌신하게 된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기서 철학이 현실의 변화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질문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퇴계가 말하는 학문이란 오늘날처럼 현실과 유리된 상아탑 속의 학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종의 소프트웨어로서의 학문을 이미한다고 하겠습니다. 
변혁을 꿈꾸는 자들에게 철학이 특히 의미를 가짐은 다음과 같은 측면 때문입니다. 
첫째는 어떤 철학적 고민에서 출발했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고, 실천의 선후와 완급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저항세력에 대한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철학에 기초한 명분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퇴계는 철학의 수립 그 자체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퇴계는 철학이 시대현실과 역사 속에 살아 숨쉬면서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로의 변혁을 이끌어 내는 견인차가 되도록 하는데 실천의 많은 부분을 경주하였다는 것이지요. 
즉 퇴계의 그 인문학적 실천의 내용은 이러하였습니다. 

①앞서 정의로운 사회로의 변혁을 위해 순교하였던 정암 조광조를 위시한 기묘명현들의 추숭운동에 적극적이었으며 그들의 정신을 철학적으로 형상화하였습니다(퇴계가 정암 조광조의 일대기 즉 "조정암선생행장"을 쓴 사람이란걸, 그리고 퇴계가 거기서 정암 조광조의 역사적 의의를 높이 평가하였다는 걸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②동시대 지식인들과는 "수많은 편지 쓰기"를 통하여 자신의 사상을 전달하고 사상적 교감을 나누는 한편 부수적으로 사림집단의 연대적 결속을 꾀하였습니다(이성원, "이황·이이 理氣論의 정치 사회적 성격에 관한 연구", 성신여자대학교 박사논문, 1998, 53쪽 참조). 

③자라나는 신세대들에게는 "교육"을 통해서 그들의 정신을 계발하고자 하였으니 그의 철학은 곧 미래를 위한 기획이기도 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퇴계는 우리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듯 결코 공리공담을 논하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퇴계가 훈구파시대에서 사림(士林)의 시대로 넘어가던 전환시대를 살아간 사람이라고 할 때, 퇴계의 사상은 말하자면 훈구파가 지배하던 그 질곡의 시대를 넘어 저 언덕(새로운 시대)에 대한 이상을 담고 있던 "전환시대의 논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퇴계가 꿈꾼 미래의 기획이 뜻대로 실현되었는지는 물론 의문이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퇴계의 사상은 "훈구파시대"를 철학적으로 종식시키는 의미가 있었음은 분명한 것입니다. 

(5) 인간이냐 제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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