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어느 사이트에서 "질문이"라는 아이디를 가지신 분이 저에게 퇴계학의 현대적 가치에 대해 질문을 주셨는 데, 다음은 그에 대한 답변의 글입니다. 글이 넘쳐서 나누어서 싣습니다. 후반부 글입니다.



퇴계학의 현대적 가치(2)- 하나의 試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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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계속)


(7) 지식인의 역할 

퇴계의 사상은 16세기 당시 시대를 황폐화하고 있던 훈구파 집단을 극복하기 위해 "깨어있는" 지식인(士林) 집단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하는 바탕 위에서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퇴계가 理의 운동성(理動,理發,理到)을 주장했다고 하는 것은 지성의 맥락에서는 인문정신 내지 지성의 적극성, 패기를 강조한 뜻으로 저는 보고 있습니다. 
또 그와 더불어 퇴계가 敬의 정신을 강조했다는 것은 올바른 지성에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의 윤리, 실천의 윤리로서 "지적 성실성" 도 함께 강조했다는 메시지로 저는 읽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지식인들을 보면 지성의 패기도 없고 지적으로도 성실하지 못합니다. 
퇴계의 메시지를 교훈삼아서 우리 시대 지식인들은 각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8) 영호남의 정신문화적 화합 

퇴계는 영남 출신이지만 특히 호남의 선비들과 인연이 깊었던 사람입니다. 아니 호남의 선비들을 빼고는 퇴계의 삶과 사상을 온전히 논할 수 없습니다. 저는 퇴계와 호남의 선비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오늘날 영호남의 정신문화적 화합의 메시지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봅니다. 

퇴계의 생애와 사상을 조망해보면 특히 세분의 호남 선비가 눈에 들어옵니다. 전남 장성의 하서 김인후, 전남 광주의 고봉 기대승 그리고 전남 영광의 수은 강항이 바로 그 분들입니다. 
하서 김인후는 퇴계가 청년시절 성균관 유학시절 만났던 사람이며, 퇴계가 노년에 만났던 사람으로서 그 유명한 사단칠정 논변의 파트너 고봉 기대승이 있습니다. 그리고 퇴계가 죽어서 학문을 통해서 만났던 수은 강항이 있습니다. 만약 오랫동안 호남 땅에서 유배 생활을 했던 다산 정약용도 광의의 호남선비로 분류된다면 역시 다산과 퇴계의 관계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신문화 차원에서 영호남의 지역화합을 모색한다면 저는 퇴계와 호남의 선비들 간의 그 아름다웠던 관계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퇴계와 호남의 선비들과의 관계를 잠시 개괄해 볼까 합니다. 

①하서 김인후(1510∼1560) 

전남 장성 출신 입니다. 
퇴계보다 9살이나 연하이지만, 퇴계가 성균관 유학시절 "유일하게" 학문적 인격적 교감을 나누었던 사람이 바로 하서 김인후 라고 합니다. 퇴계 년보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이 당시 선비의 기풍이 부박하여 선생의 행동거지가 법도가 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비웃곤 하였으나 오직 마음을 허락하여 상종하는 사람은 하서 김인후 한 사람 뿐이었다. … " 

②고봉 기대승(1527∼1572) 

전남 광주 출신 입니다. 
그 유명한 사단칠정 논변의 파트너가 바로 이 고봉 기대승 입니다. 퇴계 부친(진사 이식)의 행장을 썼으며 퇴계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퇴계의 모갈명(묘비에 쓰는 글)을 짓기도 했습니다. 퇴계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마지막으로 조정을 떠날 때 선조 임금이 조정에 쓸만한 인재가 누구냐는 물음에 퇴계는 고봉을 천거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퇴계와 고봉은 26세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학문적 동반자였으며 삶 자체에서 서로가 믿음과 존경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관계였습니다. 
특히 퇴계와 고봉간에 무려 8년간에 걸쳐 안동과 광주를 오고간 사단칠정논변은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과정이 더욱 아름다웠던 논변이었다고 합니다. 
30대 초반의 젊은 고봉의 예의를 극진히 갖추면서도 권위에 주눅들지 않는 패기와 퇴계의 개방적 자세가 우리 정신사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빛나는 논쟁을 만들어 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찌기 하바드대학의 뚜웨이밍 교수도 "주희의 理철학에 대한 퇴계의 독창적 해석" (퇴계학보 35집, 1982) 이라는 글 속에서 퇴계와 고봉간의 사단칠정 논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퇴계로 하여금 주희의 철학을 해명하고 재정립하는 데 있어서, 다시 말해서 참으로 독창적인 해설을 하는 데 있어서 방향을 결정하게끔 한 중요한 요인은 사단과 칠정에 관한 기고봉과의 유명한 토론으로 몰고 간 그의 체계적인 탐구이다. 퇴계가 고봉의 사려깊은 연구를 받아들여(자신의 학설을 정정한 것은) 중국의 선유(先儒)들에 있어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특징적 전개였다. 
1175년 아호사에서 있었던 주희와 육상산 사이의 역사적 토론조차도 퇴계·고봉 간에 오간 서신과는 문답의 질로 보나 두 사람 사이의 진지하면서도 개방적인 마음자세의 교환으로 볼 때 거의 비교가 불가능한 것이다." 
아아, 지금도 퇴계의 묘소에 고봉은 비문으로 서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③수은 강항(1567∼1618) 

저 굴비로 유명한 전남 영광 출신 입니다. 
퇴계사후 우계 성혼을 통해 학문으로 퇴계를 만났다고 합니다. 수은이 우리에게 특별히 기억되어야 할 것은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가서 퇴계학을 일본에 전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아베 요시오, 김석근역, "퇴계와 일본유학", 전통과 현대, 1998, 106쪽 참조). 일본에서는 주자학파의 계통을 "퇴계 이황 → 우계 성혼 → 수은 강항"이라는 계보로부터 시작한다고 하니 수은 강항이 미친 영향이라는 게 어떠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최영성, 한국의 유학사상사Ⅱ, 아세아문화사, 1995, 465쪽 참조). 

그러고 보면 퇴계는 하서가 있어 서울생활이 외롭지 않았고, 고봉이 있어서 그의 생각과 사상을 보다 풍부하고 깊게 정리할 수 있었으며, 수은이 있어 그의 사상을 멀리 바다 건너 일본 땅에까지 전파할 수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렇듯 퇴계의 생애와 사상에 있어 호남의 선비들은 단지 스쳐지나가는 인연이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로 호남 선비들과의 인연을 빼고서는 퇴계를 온전히 논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참고: 다산 정약용을 광의 호남의 선비로 분류한다면 다산과 퇴계의 관계도 주목할만 합니다. 즉 다산은 "도산사숙록(陶山私淑論)을 써서 스스로 퇴계의 정신과의 만남을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전남 나주 출신으로서 화담 서경덕의 제자이기도 한 사암 박순은 퇴계의 행장을 쓰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더욱 더 그 골이 깊어만 가는 지역갈등의 현실 앞에서 퇴계를 비롯한 우리 역사 속의 선인들의 교훈을 되새기게 됩니다. 
16세기 퇴계와 호남의 선비들이 지역을 초월하여 역동적인 교섭을 할 수 있게한 그 매개는 무엇이었을까요? 
퇴계가 하서와 고봉과 교감을 나누었을 때, 그것이 단순히 인간적 만남의 차원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 분들 만남의 바탕에는 올바름, 정의에 대한 믿음에 있어 서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돌아봅니다. 우리의 지역갈등이 심각하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정신문화가 황폐하다는 것이며, 인간다움을 상실했다는 뜻도 됩니다. 
올바름과 正道가 사라지고 공도(公道)와 정도(正道)가 더 이상 우리의 길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사람들간의 만남의 기준에서 정의가 아니라 이익이, 원칙이 아니라 술수, 타협이 아니라 야합, 공도(公道)가 아니라 사도(私道)가 우선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의에 기초한 집단이 아니라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패거리 집단이 여론을 주도하고 나라를 이끌고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영호남 화합의 명분으로 박대통령 기념관을 건립한다는 데 대해서는 절대 반대하고 있습니다. 박대통령은 물론 긍정적 업적을 남 기신 분이기도 할 것입니다. 즉 경제적·물질적 측면에서 근대화를 이룩하신 분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신문화의 진작에는 소홀하신 분이고, 무엇보다 정치의 正道를 저버리신 분입니다. 목적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정당화된다고 생각하신 분입니다. 박대통령 치하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슬픔과 고난을 당했습니까? 박대통령은 무엇보다 오늘의 이 심각한 지역갈등 구도를 생산한 주역이었습니다. 박대통령을 기념하기 전에 그 나쁜 유산을 청산부터 하는 것이 순서라고 저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9) 개혁 주체 세력의 자격 

개혁을 실천하는 자는 스스로도 개혁적이어야 하고, 민주주의를 외치는 자는 스스로도 민주적이어야 하고, 정의의 칼을 집행하는 자는 스스로도 정의로와야 하고, 정론을 부르짖는 언론인은 스스로도 정론을 실천해야 하고, 지성을 논하는 지식인은 스스로 지적성실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퇴계의 敬의 정신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10) 법철학적 메시지 

법철학적 맥락에서 볼 때 남명의 철학을 "검사의 철학"이라고 한다면 퇴계의 경우는 "판사의 철학"으로 구성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서구적 정의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평균적 정의·배분적 정의 개념과 "각자에게 그의 것을 주라"라고 하는 스토아학파의 정의론에서 부터 현대의 존·롤즈의 정의론에 이르기까지 간단없는 흐름이라 하겠지만, 대체로 서구적 正義개념은 사회적으로 공정한 상태의 실현이라고 하는 객관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겠습니다. 정의를 실천하는 인간 자신의 문제는 논의의 중심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퇴계와 남명에게 正義는 곧 인간의 문제입니다. 
이런 비유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앞에 케이크가 있다고 합시다. 
서구적 정의관에 의할 때는 케이크를 어떻게 공정하게 잘라서 공평하게 분배하느냐가 주요 주제일 뿐, 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