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진보에 대한 단상


전통은 진보에 방해되는 것일까?
흔히들 조선시대를 전근대적 봉건적 가부장적 억압적 운운 하면서 조선시대에 비해 우리는 매우 진보된 사회요, 따라서 조선시대에서는 배울 것이 없다는 듯이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서양철학 전공자들은 우리의 역사가 단절되고 전통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과거의 전통사상으로 당면한 문제의 대안으로 삼는 것이 마치 과거로 현재를 전복하려는 퇴행적 음모인양 주장합니다. 말하자면 서양 사상 외에 우리 시대 인문적 대안은 없다는 것처럼 말이지요. 
전통에 적대적인 또다른 대표적인 집단은 소위 진보파 논객들입니다. 
그들은 마르크스의 다음과 같은 말을 즐겨 인용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가지만, 자신이 바라는 꼭 그대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 속에서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환경 속에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모든 죽은 세대들의 전통은 악몽과도 같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머리를 짓누른다."(브뤼메르 18일)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시대의 진보를 위해서 전통은 오로지 전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전통 속에서 전통의 재해석을 통해서 미래의 빛을 찾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오늘과 같은 대중사회에서 전통이 가지는 순기능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저의 논지는 이렇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어떤 형태로든 대중들의 동의 없이는 현실의 변혁을 이룰 수 없습니다. 대중들의 의식과 실천이 현실 변혁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특히 경계해야 할 것은 대중들이 아무리 지식 기반이 부족하고 우매하다고 할지라도 결코 그들을 무시해서는 안되며 건방지게도 조작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만하게도 계도자의 입장에서 대중들을 세뇌시킨다는 차원에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철인정치 스타일로 "나를 따르라'라고 하면서 대중들을 이끌어가는 전략이 아니라 깊이 고뇌하고 성찰해서 대중들에게 새로운 시대를 위한 정보를 제공하고 문제를 환기시킴으로써 대중과 함께 하는 변화를 꿈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중들과 정서를 공유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밑바닥 정서 중에 제가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역사와 전통"이라는 것입니다. 
흔히들 전통을 보수주의자들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에드먼드 버어크의 보수주의의 주요 내용이 전통에 입각한 점진적 변화인 점에서도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전통이 혁명의 옹달샘이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저 이베리아 벌판을 달리던 라 만챠의 기사 동키호테의 생명력의 원천은 바로 전통(기사도 정신)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중세의 기사도 정신은 결코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었으며 세르반테스도 시대에 뒤떨어진 케케묵은 정신을 풍자하는 의도였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동키호테 자신은 전통 속의 기사도 정신을 풍차로 상징되는 시대의 거악을 청소하고자 하는 정의의 관념으로 재구성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서구 정신사에서 르네상스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중세의 음울한 늪에서 벗어나 활기찬 인간의 시대를 이야기함에 있어 그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정신 속에서 그 단서를 발견하였다는 것이지요. 
그 르네상스라는 게 어찌 서구에만 있는 이야기이겠습니까? 
조선의 성리학 정신이 생명력을 상실한 19세기 수운 최제우의 정신을 통해서 우리의 전통사상은 장엄하게 부활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20세기 서구사회에서 마르크스의 정신이 쇄락해갈 때 이탈리아의 그람시는 자신의 조국 이탈리아의 뿌리깊은 인문주의 전통(비코 크로체 등)을 통해서 인간정신의 창도성을 강조함으로써 속류 마르크스주의의 무기력한 경제결정론을 극복하고 현대 미르크스주의에 생명력을 부여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컨대 새시대 변화를 꿈꾼다면 대중들 속에 잠재되어 있는 전통적 정서를 어떻게 새시대의 이미지로 전환하여 대중들의 공감을 획득하느냐가 하나의 의미있는 전략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즉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 전통에 창조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로의 이미지에 연결시키는 것 바로 이것이 요체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천원짜리 지폐를 통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고 있는 퇴계를 새롭게 해석한다면 그 대중적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서양철학 개념에 비교해서 우리의 사상도 풍부한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드러내 보이는 게 중요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소위 진보파 지식인들은 생경한 서양철학의 개념에만 젖어 있을 뿐 우리의 역사와 전통에는 무지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대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진보론은 진보론이 아닙니다. 공리공담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소위 진보파가 아직도 변방의 세력에 불과한 것은 분단상황 탓도 아니요, 조중동 등 공격적 보수파들의 득세 탓도 아닙니다. 바로 진보파 지식인 자신들의 무능력 지적 불성실 탓입니다. 
역사에 무지할 때 역사는 그들을 버립니다. 


이상 조사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