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과학(3) - "과학도 인간이 하는 겁니다"


저는 앞에서 "퇴계와 과학"이라는 주제 아래 포항공대와 김호길 박사의 사례를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글에서는 "제가 왜 김호길 박사에 대해 특별히 주목하였는가"라는 점과 관련하여 보충 설명을 드릴까 합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의 글은 포항공대와 김호길 박사를 무작정 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포항공대와 김호길 박사의 사례를 통해서 우리의 인문적 현실을 짚어보고 대안을 모색해보자는 것이 그 취지였다는 것입니다.

제가 김호길 박사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퇴계학 관련 연구 논저들을 스크린하다가 퇴계학부산연구원에서 발행하는 "퇴계학논총" 제1집(1995)에 실린 김호길 박사의 "퇴계학과 현대사회"라는 글을 발견하고부터였습니다. 글의 저자가 과학자라는 점이 일단 흥미를 끌더군요. 그런데 글의 내용을 보니 단순히 과학자라고 하기에는 퇴계학의 요체를 꿰뚫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김호길 박사의 이 글은 아래에 옮겨 놓았습니다 - 87번글 참조). 많은 사람들이 퇴계를 이론에만 깊이 천착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 것과 달리 그는 퇴계를 근본적으로 실천철학자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포항공대의 설립이 퇴계의 정신에 입각해 있다는 진술에 저는 눈이 번쩍 띄었지요. 도대체 그는 어떠한 지적 배경을 가지고 있을까...궁금하였지요. 그 이후 언젠가 "퇴계와 과학"이라는 주제로 한번 정리해볼 생각으로 김호길 박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해왔었습니다. 

무엇보다 김호길 박사의 사례는 <퇴계학은 퇴계학연구자나 한국학 내지 동양학연구자의 주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생생하게 증언해주고 있으며, 나아가 오늘날 퇴계학의 지평을 넓히는 데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과학이 처한 현실에서 볼 때 김호길 박사의 존재는 특별한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과학의 시대라고 할 만큼 과학은 우리 삶의 환경을 결정짓고 있습니다. 과학의 발전에 따라 우리의 삶도 급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 과학에 대한 무지와 홀대는 우리의 미래를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과학자들은 힘들게 공부하지만 사회에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IMF가 터졌을 때 가장 먼저 해고당한 사람들이 과학자들이었지 않습니까? 과학자들은 당장 현금을 가져다주지 못하기 때문에 해고 1순위였다는 것이지요. 
이공계 출신 학부모들마저 이렇게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내 자식은 희망없는 이공계에는 절대 보내지 않는다"(동이일보 2002,3,25). 
미래의 과학도들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과학고등학교가 의과대학 진학의 통로가 되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합니다.
과학자들이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김호길 박사도 생전에 "우리나라에서는 과학자들에는 별로 기회가 없고 국가나 사회의 리더쉽은 항상 정치나 경제,법률이나 공부한 사람들이 독점한다"고 개탄한 적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추념문집 233쪽 참조). 며칠전 서울대 화학과 김희준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중앙일보 1월 7일자) 노무현 정부의 정책방향을 결정하게 될 "인수위원회"에도 과학계 인사가 한 사람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얼마전 중국의 후진타오 체제가 출범하면서 새로이 임명된 상무위원(9명)들은 모두 기술관료 출신이라는 점과 크게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김호길 박사의 메시지는 이 땅의 과학도들에게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과학의 운명을 정치, 경제, 법학도 따위들에게 전적으로 맡겨서는 안된다는 것, 그리고 과학자 자신들도 과학이라는 성안에 안주하여 특별한 지위를 누리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어차피 변화는 과학을 알고 있는 과학자들에게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 시대 누가 과학을 이해하며 누가 과학자들을 변호해 줄 것인가. 이제 과학자가 나서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과학도들도 패기의 인문정신을 갖출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김호길 박사의 기본 신념이 바로 이것이었지 않습니까?
"과학도 인간이 하는 겁니다."

과학도들에게 인문정신이 중요한 이유는 과학의 속성과 관련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과학은 럭비공과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즉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지요.
날로 정교해지고 위력을 더해가는 전쟁 살상 무기라든가, 인간 복제의 미래,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에 따른 비인간화, 환경 파괴 등등...과학을 위한 과학이라는 미명 아래 가공할 세계가 도래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理氣論적으로 말하면 氣의 영역에 속합니다. 즉 氣는 善-惡 양면성을 갖습니다. 氣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理, 그것이 바로 인문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퇴계가 말하는 바, "氣發理乘 理發氣隨"의 메시지는 과학과 관련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김호길 박사가 퇴계학에 관심을 갖는 것이 단순히 개인의 교양 내지 지적 취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이상 조사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