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21세기에 등장하다


남명에 대해서는 퇴계의 경우와는 달리 이런 질문에서부터 시작할까 합니다. 
"왜 이 시대에 남명인가?" 
과거는 오늘에 의미를 가질 때만 진정 기억할 가치가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남명은 퇴계 못지 않은 그 의미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이상하게도 우리에게는 미지의 베일 속에 쌓인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역시 그 미지의 남명이 아득한 역사의 늪, 무수한 세월의 강을 뛰어넘어 오늘 우리들 기억의 현장에 생생히 되살아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명의 의미부터 밝히고 시작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하는 것이지요. 

저는 다음과 같은 목차를 통해서 남명이 이 시대에 던지는 메시지를 개괄해 볼까 합니다. 
① 남명과 그의 시대, 그리고 우리의 시대 
② 유교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치열한 유학정신 
③ 독립적이요 비판적이며 실천적 지식인의 전범 
④ "민암부"(民巖賦)를 통해본 남명의 저항성과 진보성 
⑤ 실학의 원류로 평가 받기도 하는 남명의 실사구시 정신 
⑥ 남명의 敬·義 사상에 담긴 법철학적 메시지 
- 검사의 철학 
이상의 각각의 주제는 독립적으로 다루어도 충분한 양과 내용이 되겠지만, 여기서는 첫머리글의 성격상 남명이 우리 시대의 문제 해결에 상당한 실천적 의미가 있음을 서론적으로 밝히는 데 (그리하여 저의 글을 읽는 분들에게 남명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데) 주력하고 일단 개략적으로 서술하고자 합니다. 


(1) 남명과 그의 시대, 그리고 우리의 시대 


우리가 남명을 외면하고 있는 사이에 갈수록 우리 시대는 남명의 시대를 닮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남명의 시대는 공도(公道)가 사라지고 정의(正義)가 무너진 시대였습니다. 시대를 운영하는 통치 엘리트들의 인간적 타락으로 특징지워진 시대였습니다. 이른바 훈척(勳戚) 패거리들이 나라를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던 때였지요. 
왕조시대, 어디까지나 임금이 정치의 중심이라고 할 때 임금부터 중심을 못잡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연산군의 난정(亂政), 그 순결한 정암 조광조를 죽인 중종의 정도(正道)를 벗어난 정치, 훈척(勳戚)들에 둘러싸여 제대로 목소리 한 번 내지 못했던 명종의 무기력함, 거기다가 정치를 실질적으로 담당하던 통치 엘리트들, 즉 훈구파로 통칭되는 당시 지배 계층들의 부패와 전횡, 인간적 타락이 시대를 황폐화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우리의 현대사 역시 무늬만 달리할 뿐 일련의 현대판 훈구파(공신)들에 의해 일관되게 장악되어온 역사 아닙니까? 얼마전 서울대 한영우 교수(한국사)가 동아일보(12월 7일)에 "들어라 功臣들아"라는 파격적인 제목으로 기고한 글의 내용은 그대로 남명의 시대를 연상케 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 한 대목을 보기로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공신이 많은 시대가 가장 혼란스럽다. 공신들의 자만심과 독선이 국가의 공공선을 해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신을 어떻게 제어하느냐가 공신정권의 최대의 과제가 된다. 폭군 연산군을 내몰고 중종을 세운 반정공신(反正功臣)보다도 공신과 싸우다 죽은 조광조(趙光祖)가 숭앙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광복후 우리 나라는 어쩌면 공신정권의 연속이었다. 건국공신, 혁명공신, 그리고 민주화공신들이 차례로 정권을 담당했다. 
그 공신들이 자신의 공을 잊어버리고 진정한 공공국가를 세우려 했다면 오늘날과 같은 뿌리 깊은 정치 불신은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영우 교수 외에도 역사 대중화의 기수인 재야 사학자 이덕일 박사(한가람 역사문화 연구소장)도 현대사를 공신들의 시대로 규정하고 그 일련의 공신들을 친일파공신, 군화공신, 등산화공신 등으로 명명한 바 있습니다. 
그가 3년전 이 정권 출범 초기에 신동아(98년 10월)에 "조선을 망친 것은 공신들이었다"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다음과 같은 글은 지금보면 상당히 통찰력있는 글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의 시대적 요구중 하나는 조선의 훈구파처럼 한국 사회 전반을 장악하고 있는 특권층을 정리하고 모든 국민이 평등한 국민국가를 수립하는 것이다. 
이른바 국민의 정부를 이끄는 인물들이 조선의 사림파와 같은 개혁 정치가인지 아니면 조선의 훈구파와 광복후의 군화, 등산화와 같은 수구 공신들인지는 5년후의 우리 사회가 답해 줄 것이다." 
<이덕일, 역사의 화두 '공신 척결' - 조선을 망친 것은 공신들이었다, (신동아, 98년 10월), 546쪽> 

하기는 5년까지 갈 필요는 무엇 있겠습니까? 촤근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만 보아도 이 정권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는 이미 판명이 났다고 할 것입니다. 
또 하나 남명의 시대를 결정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것은 SBS TV 드라마 "여인천하"(女人天下)입니다. 올해는 남명 탄신 5백주년이지만 공교롭게도 여인천하의 주역 문정왕후(1501∼1565) 역시 탄신 5백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남명과 문정왕후는 동갑내기였다는 것이지요. 
드라마는 문정왕후를 마치 대단한 여걸인 양 그리고 있지만 (여걸도 정의로와야 진정한 여걸입니다), 사실 문정왕후가 주도하던 여인천하 시대(1545∼1565)는 16세기 역사에 정통한 학자의 견해에 의하면 나라가 거의 망할 지경에 있었다고 합니다. 즉 경산대 김성우 교수는 최근에 펴낸 "조선 중기 국가와 사족" (역사비평사, 2001) 속에서 이렇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기(중종 후반 ∼명종 말기) 공적 영역의 마비 상황은 동양 전근대 사회의 왕조 말기에 나타나는 현상 바로 그것이었다고 생각된다"(484쪽). 그 유명한 임꺽정의 난(1559∼1562)이 일어난 것도 바로 이 여인천하 시대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남명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 여인천하의 주역 문정왕후를 반드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순히 탄신 5백주년을 맞는 동갑내기의 인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그 유명한 "을묘사직소(일명 단성소, 1555) 때문입니다. 
당시 조정에서는 남명을 회유하기 위해서 관직을 내렸는데 남명은 그것을 거절하면서 상소문을 올리게 됩니다. 거기서 남명은 조정의 실정을 통박하면서 문정왕후를 "궁궐의 한 과부"로, 임금 명종을 "선왕의 한 어린 아들" 에 지나지 않는다고 표현하여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남명이 "죽음을 무릅쓰고" 올린 그 상소문의 한 대목은 온갖 게이트로 얼룩진 오늘 우리 시대의 타락한 양상을 그대로 떠올리게 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 부분을 한번 보기로 하겠습니다. 

" … 전하의 나라일이 이미 그릇되어서,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고, 하늘의 뜻은 가버렸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자면, 큰 나무가 백 년 동안 벌레가 속을 먹어 진액이 이미 말라 버렸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어느 때에 닥쳐올지 까마득하게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에 이른 지가 오랩니다. 조정에 있는 사람 가운데 충성되고 뜻 있는 신하와 일찍 일어나 밤늦도록 동부하는 선비가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 형세가 극도에 달하여 지탱할 수 없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 쓸 곳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낮은 벼슬아치는 아래에서 히히덕거리면서 우선 주색만을 즐기고, 높은 벼슬아치는 위에서 어름어름하면서 오로지 재물만을 늘리며, 물고기의 배가 썩어 들어가는 것 같은데도 그것을 바로 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궁궐 안의 신하는 후원하는 세력 심기를 용이 못에서 끌어들인 듯하고 궁궐 밖의 신하는 백성 벗기기를 이리가 들판에서 날뛰듯 하니, 가죽이 다 해어지면 털도 붙어 있을 데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저는 이 때문에 은근히 생각하고 깊게 탄식하면서 낮에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한 것이 여러 차례이며, 크게 탄식하면서 아픈 마음을 억제하며 밤에 천장만 본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자전(慈殿)께서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한 아드님이실 뿐이니 천 가지 백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人心)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무엇으로 수습하시겠습니까? 냇물이 마르고 좁쌀비가 내리니, 그 조짐이 그 무엇이겠습니까? 노랫가락이 구슬프고 입는 옷이 흰색이니, <나라가 어지러울> 형상이 이미 나타났습니다. … " 
< 조식 지음,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편역, 국역 남명집, (이론과 실천, 1995), 243∼244쪽> 

그 "여인천하" 드라마에 남명이 등장하던가요? 
드라마 "여인천하"가 이 시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으니 태릉의 문정왕후로서는 탄신 5백주년에 이만한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국민들은 남명은 몰라도 문정왕후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요. 
16세기 그 때 문정왕후는 절대권력자였고 남명은 기개만이 재산인 포의(布衣)의 한 선비였을 뿐입니다. 5백년이 지난 오늘 문정왕후는 대중의 시대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역사의 조작·왜곡까지 서슴치않는 한 대중방송권력에 의해 화려하게 다시 등장한 반면, 인문학 위기의 시대 찾는 사람 거의 없이 남명은 쓸쓸한 새천년의 아침을 맞고 있다는 거지요. 
아아, 그런데 이 시대의 남명은 어디 있는가요? 


(2) 유교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치열한 유학정신 


남명을 알게되면 무엇보다 우리는 유교에 대한 상식적인 견해들을 수정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유교" 그러면 너무나도 자명한(뻔한) 사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동양철학 전공자도 아닌(연구자도 아닌) 순문외한인 사람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용감하게 외칠수 있는 것도 유교라는 것이 시대의 진보를 방해하는 너무나도 뻔한(공부 안해도 알수 있을 정도로)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유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