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의 理發說과 율곡 그리고 우암 송시열


퇴계를 흔히 "동방의 주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분명 퇴계를 예우하는 말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거기서는 퇴계에 대해 주희철학을 충실히 이해해서 이 땅에 정착시킨 사람 그 이상의 의미를 읽을 수가 없습니다. 퇴계는 주희의 아류에 불과하다는 은근한 뉘앙스가 담겨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역시 그것은 주희라는 고정된 권위의 창문을 통해 들여다 본 퇴계의 이미지일 뿐입니다. 주체적이고 역동적인 퇴계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컨대 퇴계는 그저 문걸어잠그고 방안에서 "주자대전(朱子大全)" 펼쳐놓고 암호풀 듯 주희의 논리와 씨름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16세기 조선의 현실을 온 몸으로 부둥켜 안고 치열하게 고뇌하며 살았던 사람인 것입니다. 퇴계의 생애는 그러한 고뇌와 모색의 계절이었습니다. 그러던 40대의 어느날 주희가 "주자대전"을 통해서 퇴계에게 다가왔습니다(주자대전이 처음 인반된 것이 1543년, 퇴계 나이 43세 때였다고 합니다). 퇴계는 주희를 만나던 한여름날의 감회를 이렇게 표현했다고 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 속이 다 시원하여 저절로 서늘한 기운이 생겨서 더운 줄을 모르게 된다. 무슨 탈이 나겠는가."

그렇다고 그 때부터 퇴계가 주희가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퇴계는 주희를 만나기 전에 이미 나름대로 성숙된 사고체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학문적으로 일가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퇴계는 자신의 독자적 사유체계의 바탕 위에서 주희의 이론에 매료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것은 퇴계에게 있어서 주희 이론의 주체적 수용인 것이며 또한 창조적 전개의 가능성을 엿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理發說을 들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16세기 조선의 현실 속에서 주희 철학은 퇴계에 의해 재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해석하기에 따라 주희철학이 퇴계 안에서 "혁명적 성격"으로 변모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소견입니다.
이러한 퇴계의 변용에 대해서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의 김기현 박사는, 퇴계철학은 "재료는 주자철학의 것들을 사용하면서도" 설계도는 자기 것으로 하여 재건축된 것이라는 흥미있는 표현을 써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발설(理發說)로 귀결되는 퇴계의 성리 개념은 주자의 그것과는 합치되지 않는 난점을 낳기에 이른다. 하지만, 오늘의 시점에서 이것을 재조명해 볼 때는 오히려 퇴계야말로 독자적인 성리학 체계를 건립한 훌륭한 한국의 성리학자로 높이 평가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퇴계철학은, 재료는 주자철학의 것들을 사용하면서도 설계도는 도덕의 영역을 최우선시하는 신념에 맞추어 재건축된 건물이다."
<김기현, "조선조를 뒤흔든 논쟁-사단칠정논변은 무억을 남겼나?(상)", (길,2000), 170쪽>

그런데 사실 이러한 견해는 우리시대 일반 상식과는 어긋나는 주장임은 물론입니다. 흔히들 율곡과 비교하여 퇴계를 이야기합니다. 즉 퇴계는 주희를 존신(尊信)하여 오로지 주희의 뜻에 투철하고자 한 반면, 율곡은 그러한 퇴계를 넘어서 주희철학을 한국적으로(창조적으로) 토착화하였다고 일반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기는 율곡 자신 퇴계의 理發說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즉 율곡은 주자가 理와 氣가 양립하여 서로 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면 주자도 잘못이 있다고 덧붙여 말했다는 것입니다. "대저 발하는 것은 氣이고, 발하는 까닭은 理이니, 氣가 아니면 발할 수 없고 理가 아니면 또한 발하게 되지 못한다. … 성인이 다시 나온다 하여도 이 말은 고칠 수 없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理의 운동성"이라는 주자학의 근본 주제를 놓고 본다면, 우리의 상식과 달리 理發說을 취하고 있는 퇴계가 오히려 주희의 본류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반면 理의 운동성을 인정하지 않는(氣發만 인정) 율곡이 정작 주자학의 본류에 입각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펴낸 "강좌 한국철학"(예문서원,1998)에서 율곡에 대해, "어떻게 보면 그는 이황보다 본래의 주자학에 더 투철했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훗날 율곡학파 계열에서 주희에 철두철미하였던 우암 송시열(1607~1689)과 같은 사람이 나온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우암은 "인간 주자"(창작과 비평사,1996)라고 하는 주희에 대한 전기를 쓴 일본의 미우라 쿠니오 교수도 인정할 정도로 "주자에 대해서라면 일거수일투족 구석구석까지 모르는게 없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우암은 주희에 대한 이와같은 투철한 이해에 근거해서 퇴계의 理發說의 모순점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한편 17세기 율곡학파의 비판에 맞서 퇴계의 理發說을 강력히 옹호한 사람이 바로 소설 "선택"의 주인공 정부인 안동장씨의 세째 아들 갈암 이현일이었습니다).
주희에 대한 투철함을 넘어서 아예 "사문난적"이라는 말까지 유포시킴으로써 주자학을 교조화했던 사람들도 노론(서인)으로 통칭되는 율곡의 후예들이었다는 데서는 당혹감마저 느끼게 됩니다.
"강좌 한국철학"의 한 대목을 보기로 합니다.

"노론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의 학자들은 주자학적 세계관을 더욱 공고히 하면서 이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사상적 경향에 대해서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죄목을 씌워 이단으로 모는 등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더욱더 경직된 사상체계를 고착시켜 나갔다. 그 당시 사문난적으로 몰린 대표적인 인물은 윤휴와 박세당이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좌한국철학", (예문서원,1998) 174쪽>

율곡의 고결함과 경세적 실천성이 왜 하필이면 "사문난적"이라는 닫힌 사회의 논리로 변모하여 조선의 후반기를 슬프게 하였을까? 
그 율곡의 "경세적 실천성"의 의미있는 징표였다가 후예들을 교조적 주자학으로 이끌기도 한 논리적 연결고리가 바로 "기발(氣發)"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저는 사상의 아이러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상 조사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