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희와 퇴계의 차이 - 우주론 중심인가 인간론 중심인가


퇴계는 일찍이 "동방의 주자"로 불리워왔고, 그리고 퇴계 스스로도 주희를 존숭(尊崇)하고 주자학의 정통을 잇는다고 자부했음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퇴계가 "액면 그대로의" 주희를 추종, 답습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제가 앞에서도 일관되게 강조해왔듯이 사상이란 무엇보다도 사상가가 직면한 당대 현실과의 관련성 속에서 해명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퇴계를 고뇌하게 했던 16세기 조선의 시대 상황과 주희가 직면했던 12세기 중국 송나라의 시대 상황이 달랐던 만큼, 그들이 같은 개념을 사용하고 있을지라도 그 내포는 다를 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추론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저는 다음과 같은 두 분의 견해에 적극 공감하고 있습니다.

"퇴계철학은, 재료는 주자철학의 것들을 사용하면서도 설계도는 도덕의 영역을 최우선시하는 신념에 맞추어 재건축된 건물이다."
- 김기현, "조선조를 뒤흔든 논쟁-사단칠정논변은 무엇을 남겼나?(상)", (길,2000), 170쪽-

"퇴계는 표면적으로는 주자의 설을 그대로 따르는 것 같지만, 퇴계가 정작 자신의 주장을 할 때는 주자와는 다른 구도에서 理氣를 말한다. 퇴계는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에서 분명한 철학적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퇴계는 정주학을 자신의 관점에서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전개하였다..."
-최중석,"나정암과 이퇴계의 철학사상", 심산, 2002, 157쪽- 

저는 앞에서 이처럼 주희의 정통 노선과 구별되는 퇴계철학의 특징적인 면모를 理發說(理의 운동성 인정)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한편 저는 이러한 理發說에서 나타나는 주희와 퇴계의 차이에 대해서 이렇게도 해석을 해 봅니다.
즉 성리학은 '우주·자연과 인간을 관통하는 사유체계'라고 할 때, 주희와 퇴계의 차이가 나타나게 되는 것은 주희는 그 사유의 중심을 우주·자연에 두었고 퇴계는 인간에 두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퇴계는 말하자면 <인간정신의 창도력과 실천성>을 적극 강조하는 쪽으로 사유를 집중하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희의 사유의 핵심이 꼭 우주·자연의 형이상학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본다. 주희에게도 사유의 중심은 역시 인간에 있었고, 다만 주희는 좀더 이론적인 성향도 있었기에, 형이상학의 끈도 놓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사실 주희나 퇴계나 "유학자인만큼" 인간의 문제가 사유의 본질적인 과제였음은 차이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우주론 기타 형이상학은 인간의 이상과 실천을 담보하기 위한 이론적 장치라고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제가 주희와 퇴계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러한 것이 기본적 관점으로 전제된 차원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이를테면 그러한 전제 위에서 그들 각자가 성리학 이론을 세우는데 있어서 상대적인 입장의 차이 내지 시선의 차이에 주목하고자 한다는 것이지요.
제가 보는 주희와 퇴계의 그 상대적인 차이는 이런 것입니다.

주희는 불교와 도교의 스케일을 빌어 우주와 자연, 인간을 아우르 는 거대 담론의 수립 자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퇴계는 주희가 세운 거대 담론의 현실적 운용 내지 현실적 정착에 보다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주희와 퇴계 사이에는 "350여년의 시차"가 존재하고 있음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주자학은 우주와 자연, 인간을 아우르는 거대담론으로서 거의 완벽한 체계를 자랑하고 있었고, 또한 주희 사후에는 관학으로서 권위도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주자학의 가르침은 형식화, 박제화되어 현실과 많은 괴리를 노정하게 됩니다. 정신사적으로 이러한 괴리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흐름이 주자학계 내부에 일어나게 되는데 퇴계의 사유는 바로 그러한 흐름의 연장선 속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저는 바로 이 점에 특히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주희(1130∼1200)의 포부는 자신의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하여 불교·도교에 필적하는 아니 그들을 압도하는 거대 담론의 구축에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하여 주희가 "天卽理요 性卽理이다"라고 했을 때, 그것은 우주·자연의 시스템과 인간의 시스템은 그 논리 구조가 같다는 것 또는 인간은 곧 우주적인 존재라고 하는 선언적 의미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주희에게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인간 행위의 정당성의 근거를 우주·자연의 원리 속에서 찾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 매개 개념이 바로 "理"였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理는 자연계의 법칙임과 동시에 인간세계의 윤리적 규범을 의미한다고 할 것입니다. 즉 주희는 천지만물의 운행에 정해진 "이치(理)"가 있는 것과 같이 인간세계에도 지켜야할 "理"가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윤리적 규범의 객관성과 합리성을 보장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요컨대 이처럼 주희는 인간에 대한 그의 철학을 우주론 속에 정초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정신으로서 성리학이라는 거대 담론을 수립하는데 주된 관심이 있었다고 저는 본다는 것입니다. 제가 주희에 대해 말하기를 그 사유의 중심을 우주·자연에 두었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반면 퇴계의 경우는 주희와는 성리학 자체에 대한 입장이 달랐다고 할 것입니다. 즉 주희의 경우 스스로 성리학이라고 하는 거대 담론을 확립하는데 온 생애를 바쳤다면, 퇴계는 주희가 세운 거대담론을 하나의 의미있는 패러다임으로서 받아들인 상태에서 그 현실적 운용에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희 사후 퇴계에 이르기까지 350여년간의 주자학의 행보를 일단 개관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주희는 우주론, 인간론, 실천철학을 일관된 원리로써 설명하는 지극히 논리정연하면서도 거대한 사상체계를 일구어냄으로써, 유학을 불교·도교의 스케일에 필적하는 거대담론화 하고자한 그의 의도는 일단 성공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생애상으로만 보면 행복한 사상가라고는 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당시 남송의 정치 현실은 주희에게 우호적이지 못하였고, 주희는 말년에 자신의 사상이 "거짓 학문"(僞學)이라고 탄핵까지 받는 수모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희 생전에는 주자학이 지배적인 사상이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주희 사후에 재야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주자학이 점차 확산되면서 마침내 사상계의 주류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압도적인 권위를 누리게된 것은 1314년 원나라 정부가 과거제도를 부활시키면서 주자학을 과거과목으로 공식 채택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른바 관학의 지위를 누리게 된 셈이지요.
이제 주자학은 생전의 주희가 바라고 기획했던 대로 새로운 정신질서를 주도하는 사상으로 지배적인 지위에 올라섰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자학의 문제점 또한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는 것은 사상의 아이러니라고 할 것입니다. 하기는 어쩌면 이것은 주자학만의 문제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철학 아카데미 이정우 원장의 다음과 같은 말은 주자학의 관학화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철학은 한 사회를 지배하는 거대한 힘이 되었을 때마다 예외없이 고갈되어 버리곤 했다. 서구 중세, 성리학 시대, 스탈린 시대 등등이 그렇다. 철학이 제도화되는 순간, 권력을 소유하는 순간 철학의 생명은 다한다. 철학은 혼돈의 시대, 고뇌의 시대에 꽃피어 왔으며, 박해와 고독 속에서 열매를 맺어 왔다."
<이정우, 시간의 지도리에 서서, (산해, 2000), 27쪽>

말하자면 주자학이 추구하는 이념과 주자학이 지배하는 현실의 괴리가 부각되기 시작했다는 것이지요. 모두들 입으로는 天理를 외치지만 정작 그들의 실천은 주자학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이처럼 주자학이 관학으로 위세를 자랑하는 가운데 정작 주자학의 가르침은 형식화, 박제화 되어가고 있는 현실에 대해 반성하는 흐름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을 일반적으로 "심학화"(心學化)라고 하지요. 일반적으로 "심학"이라고 하면 인간의 행동 내지 실천의 전제로서 <마음>을 다스리는 게 중요하다고 보는 입장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인간 주체의 실천성을 강조함으로써 유학의 본래의 이상을 실현하자는 경향이라 할 것입니다.
그 흐름은 두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대체로 "심학화"하면 주희와 동시대 인물인 육구연(상산; 1139∼1192)에서 왕수인(양명; 1472∼1528)으로 이어지는 양명심학을 연상합니다. 하지만 또 하나의 흐름이 있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중국 사회과학원의 주월금(周月琴)여사는 이 두 흐름을 각각 주관심학과 객관심학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후자 즉 객관심학의 노선에 퇴계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퇴계 학문의 근간이 된 3대 텍스트의 하나로 "심경부주"라는 책이 있습니다. 바로 이 심경부주가 객관심학의 노선에 있었던 대표적인 테스트 였다는 것입니다 (참고; 퇴계의 3대 텍스트는 "성리대전","주자대전","심경부주").

심경부주는 <心經>에 부주를 가한 책을 말합니다. 즉 중국 송나라 때 학자인 진덕수(1178∼1235)가 사서삼경, 정주(程朱) 등의 글에서 마음에 관한 격언을 뽑아 모아 편찬한 책이 "심경"인데, 다시 명나라 때 정민정(1445∼1499)이 보충을 하고 상세한 주를 단 것이 "心經附註"라고 합니다.
이 심경부주는 주희 사후 세월이 흐르면서 모두들 입으로만 天理를 외칠 뿐, 주자학의 가르침은 형해화한 현실에 대한 반성적 흐름 속에서 등장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