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經附註의 미스테리"


저는 앞의 몇편의 글에서 퇴계가 理의 운동성(理發)을 인정한 것이 주희 철학의 독창적 해석의 한 면모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이제 이런 질문도 한번 던져 봅니다. 
"그럼, 퇴계는 도대체 주자학과 어떻게 만났길래 그러한 해석이 나왔을까?" 
즉 퇴계의 학문 역정을 추적해 봄으로써 퇴계학문의 경향성을 파악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퇴계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퇴계가 처음부터 주자학에 심취, "조선의 주자"가 되고자 했던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심지어 이렇게 이야기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퇴계학의 꿈은 퇴계라고 하는 한 개성적 인간이 증발되어 버리고 그 자리에 주자가 대신 들어서는 바로 그 지점을 지향하고 있다. 독창성을 귀하게 여기는 우리 시대의 학문 이념과는 정반대로 그 같은 꿈의 실현이야말로 주자학도들에겐 최고의 학문 이념이었다. 잘 알려져 있으면서도 흔히 간과되고 있는 이 점은 퇴계학을 위시한 조선조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위해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주자학과 구별되는 퇴계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진덕, "퇴계 성리학의 자연도덕주의적 해석", 『퇴계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146쪽>

그런데 우리가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퇴계가 초년부터 주자학에 빠져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퇴계가 "주자대전" (朱子大全)을 통해 주희를 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은 43세 때였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즉 1543년(중종38)에 "주자대전"이 중국에서 처음 수입되어 인반(印頒)될 때, 퇴계는 왕명으로 주자대전을 교정하면서 처음 책을 구해 읽고 주희에 매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만약 최진덕 교수의 위의 인용문처럼 우리가 퇴계를 오로지 주희의 모방자 내지 아류라고 칭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먼저 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지요. 즉 퇴계는 주희를 만나기 전, 그러니까 불혹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 성숙된 사고 체계를 갖고 있었던 사람일텐데, 과연 주희를 만나고 나서는 그것을 완전히 청산하고 새로이 주희의 시스템으로 철저히 전환하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머리를 싹 비워버리고 철저한 주자학도로 거듭나기로 했느냐 하는 것이지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퇴계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느냐 하는 말도 될 것입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니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린도전서, 13장 9절∼11절).

이를테면 퇴계는 주희를 만나고 나서는 마치 어른이 되어 어린아이 때의 일을 버리듯이 그 동안의 사색을 다 폐기해버렸다는 것일까요?
하지만 사실 그런 것은 종교적인 차원이 아닌한 경험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란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과거 운동권 좌파 학생들이 마르크스주의에 막무가내로 빠져들었던 것은 우리나라의 권위주의적 교육제도가 만들어 놓은 "비주체적" 사유 공간에 터잡은 것이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오로지 일류 대학에 가기 위해 박터지게 쑤셔집어넣었던 지식도 자기 것이 아니었기에 내다버리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백지에 빨간 물감이 스며들 듯, 그 텅빈 공간에 마르크스주의는 너무나도 쉽게 자리를 잡을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례처럼 퇴계가 주희의 이론에 세뇌당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그것도 40이 넘은 나이에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퇴계는 자신의 독자적 사유 체계의 바탕 위에서 주희의 이론에 매료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것은 퇴계에게 있어 주희철학의 주체적 수용이라고 할 수있고, 또한 나아가 창조적 전개의 가능성까지 우리는 추론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의 이런 견해는 결코 혼자만의 생각은 아닙니다. 저와 같은 맥락에 서 있는 대표적인 견해를 하나 소개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바드 대학의 뚜웨이밍(杜維明) 교수의 견해입니다. 다음은 뚜웨이밍 교수가 퇴계학보(제 40호, 1983)에 기고한 글 속의 한 대목입니다.

"… 그에게 있어 주희는 유학의 권위자였다. 그러나, 퇴계가 주희의 全作을 접한 것은, 우회적인 경로를 통해서 그의 생의 후반기였기 때문에, 퇴계는 南宋의 대가의 저서를 초학자로서가 아니라 성숙된 학자로서 접근했다고 볼수 있다. 그리고 퇴계는 주희의 정통성을 맹목적으로 신봉할 만큼 『사회화』되지는 결코 않았었기 때문에, 주희의 사상에 있어 기본적인 철학적 전제들을 비판적으로 의식하고 있었다. 그가 주희를 받아들인 것은, 수동적 수용이 아니라 발견이었다. 그가 주희에게서 발견한 것은, 기본적으로는 그가 스스로 깨달은 것을 확인해 주는 것이었다."
<杜維明, "이퇴계의 知的 自我 定義의 한 고찰", (퇴계학보 제 40호, 1983년 12월), 24쪽>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문제는, 퇴계가 주자대전을 만나기 전에는 그럼 생각이 어떠했느냐 아니 주로 어떤 책을 읽고 있었느냐 하는 것이지요.
학자들은 퇴계 사유의 근간이 된 3대 텍스트로 "주자대전" 외에 "성리대전"과 "심경부주"를 들고 있습니다 (이상은, 퇴계의 생애와 학문, 예문서원, 1999, 83∼107쪽 참조).
성리대전은 퇴계가 19세 때 처음 접한 책으로서 퇴계를 성리학의 세계로 인도한 책이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주희철학과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즉 성리대전은 송대의 여러 성리학자들의 학설을 망라한 책으로서 성리학에 관한 백과전서식 텍스트라고 해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퇴계가 33세(23세라는 설도 있습니다) 때 성균관 유학시 접했다고 하는 "심경부주"라는 책입니다. 

저는 이 심경부주라는 책이 퇴계의 여러 미스테리를 푸는 데 있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심경부주는 <心經>에 부주를 가한 책을 말합니다. 즉 중국 송나라 때 학자인 진덕수(1178∼1235)가 사서삼경, 정주(程朱) 등의 글에서 마음에 관한 격언을 뽑아 모아 편찬한 책이 "심경"인데, 다시 명나라 때 정민정(1445∼1499)이 보충을 하고 상세한 주를 단 것이 "心經附註"라고 합니다.
이 심경부주는 주희 사후 세월이 흐르면서 모두들 입으로만 天理를 외칠 뿐, 주자학의 가르침은 형해화한 현실에 대한 반성적 흐름 속에서 등장했다고 합니다. 그러한 흐름을 학자들은 "심학화"(心學化)라고 말하지요. 이 심학화는 실천성을 강조하는 경향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양명학이 바로 심학화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심경부주는 바로 주자학과 양명학의 과도기의 산물인 셈이지요. 일본의 久留米 대학의 佐藤仁 교수는 이 심경부주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퇴계학보 제68집, 1990).

"<심경부주>는 신유학사상이 주자학에서 양명학으로 전개되어 가는 과도기의 산물이며, 양명심학이 성립됨과 동시에 역사적 역할을 끝내고, 그 후 중국의 사상계에서는 거의 돌이켜 보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일본에 있어서도 2번에 걸쳐 간행된 것에 비하여는 애독자는 별로 없었던 듯하다."

그러니까 중국과 일본에서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B급 텍스트였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심경부주를 퇴계는 아주 높이 평가했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퇴계는 이 책을 "神明과 같이 믿고 嚴父와 같이 존경하였다"(信此書如神明, 敬此書如嚴父)고 밝히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생을 마칠 때까지 퇴계는 이 책을 연구하고 실천에 옮겼다고합니다.
저는 이 심경부주에 대한 퇴계의 특별한 사랑이 퇴계철학의 한 특징을 밝히는데 열쇠가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주자대전을 만나기 이미 훨씬 전에 퇴계가 심경부주를 만나고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주자학에 대한 퇴계의 해석에 있어서도 이 심경부주를 통해 얻어진 사유가 일정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퇴계의 理發說도 이런 맥락에서도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저는 이것을 "심경부주의 미스테리"라고 부릅니다.


이상 조사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