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氣論적 역사인식과 서양의 역사철학과의 차이 - 진보 개념의 허구성 


흔히들 말하기를 동양에는 역사철학이라는 게 결여되어 있다고 합니다. 글쎄요. 
그것은 옳은 이야기일 수도 있고 틀린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철학이란 걸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반적으로 역사철학은 이렇게 정의됩니다.
“역사의 진행과정과 진행방향을 어떤 원리로서 파악해 보려는 관심이나 사변.” 
여기서 만약 역사를 움직이는 원리로서 인간 외적인 모종의 법칙이나 초월적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라면 동양에는 역사철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옳은 이야기일 것입니다. 

아니 다시 말해 그러한 의미처럼 인간정신을 “초월한” 역사 자체(다시 말하면 역사적 현실의 “독자적” 가치)를 관념하는 것이 역사철학이라면 유교철학 자체가 그러한 역사철학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리학의 기본 구도는 "초월-내재(天卽理-性卽理)"의 구도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역사를 오로지 “인간의 작품”으로, 그리고 그 원리를 인간 내재적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한다면 동양에도 역사철학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또 말하기를 동양에는 진보사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기도 합니다. 사실 이것은 앞에서의 역사철학에 관한 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보란 초월적인 역사 개념을 전제할 때 가능한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진보한다는 것은 역사 밖에 역사의 목표를 설정할 때에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역사철학이란 것이 초월적인 역사 개념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현실의 변화(氣)와 그와 관계하는 인간 정신(理)의 대응 내지 그 궤적을 주용 주제로 하는 것이라면 성리학에서 말하는 理氣論이야말로 훌륭한 역사철학 그 자체가 아니냐 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구적인 초월적 “역사” 개념에서 해방된다면, 통설과 달리 동양에도 역사철학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진보라는 개념은 인간 정신 저 너머 역사의 神이란 걸 상정하는 서구적 사유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시대 다수의 지식인들은 “역사철학”이라든가, “진보”라든가 하는 개념이 주는 고상한 뉘앙스에 도취해서 애초부터 그러한 개념 자체가 존재할 여지가 없는 동양적 사유를 마치 저급한 사유인 양 멸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동양적 사유에서 보면 “진보”란 허구에 불과한 것인데도 말인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가장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도올 김용옥입니다.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 역사는 발전하지 않는다. 역사는 전개될 뿐이다. 역사는 흐를 뿐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역사’라는 것은 시간의 비가역성 위에 그려진 인간 삶의 양태의 연속이다. 역사의 주체는 氣이다. 그러나 氣 그 자체는 역사성을 갖지 않는다. 氣는 生滅할 뿐이다. 氣는 움직이지 않는다. 氣는 그대로 있을 뿐이다. 우리가 움직임이나 변화를 말할 수 있는 것은 氣의 社會에 관한 것이다. 社會를 구성하는 氣들간의 관계 방식의 차이를 시공간 축에서 연쇄시킨 것이다. 역사의 주체는 氣이지만 역사 그 자체는 氣가 전개하는 우주 속에서의 理의 모험에 관한 것이다. 그 理의 모험을 진보나 발전이라는 말로 기술한다는 것은 조악한 妄言이다.” 
<김용옥, "氣哲學 序說", (과학사상, 99년 가을), 11쪽> 

서양의 진보사관이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는 역사의 神을 예정하고 있다는 것은 대표적인 진보론자들의 주장을 검토해 보면 확인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역사철학 일반의 창시자라고 평가하기도 하는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경우에는 모든 사람이 구원 받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神國)”로 향해가는 길에는 그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으며, “자유의 의식의 진보”를 이야기한 헤겔(1770~1831)에게는 “절대정신”이 바로 역사의 神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헤겔을 물구나무 세운 마르크스(1818~1883)의 경우에는 “경제법칙”이 유토피아(공산주의)로 인도하는 역사의 神이었습니다. 

한동안 세계사의 한편에서는 진보의 환상에 열광하기도 했었고 우리의 80년대도 그러하였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늘의 현실에서는 진보에 대한 열정이 (결국은 허구에 대한 열정이겠지만)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최근에는 대담하게도 아예 “역사의 종말”을 외치는 사람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이 역시 초월적인 역사 개념을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보사관의 논리 구조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역사의 神이 이제 할 일을 다 했다는 선언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의 종말”을 써서 화제를 불러 일으킨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논리 구조가 헤겔, 마르크스 등 진보론자들의 그것과 한 통속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의 저서 속의 다음과 같은 대목이 그러한 점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헤겔도 마르크스도, 인간 사회의 진화는 한없이 계속되는 것은 아니며, 인류가 그 가장 심오하고도 근본적인 동경을 충족시켜주는 형태의 사회를 실현했을 때 인간 사회의 진화는 종말을 맞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즉 두 사람 모두 ‘역사의 종말’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헤겔에 있어서 역사의 종말은 자유주의 국가인 반면, 마르크스에게는 공산주의 사회였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이상훈 옮김, “역사의 종말”, (한마음사, 1997), 9쪽> 

물론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선언이 자연적인 인간 세상이 다 끝났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의 神이 관여할 만한 큰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생각컨대 인류에게 있어 중요한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하는 후쿠야마의 주장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그 논리 구조 자체가 초월적인 역사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성리학적 세계관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황당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리학의 세계에서 인간은 어떠한 초월적 개념에 의해서도 일방적으로 규정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주변화의 과정에 자신의 인간성을 발휘하여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것은 역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동양인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고 체계는 전적으로 서구인의 그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역사의 종말을 논한 후쿠야마에 대해 성리학적 세계관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역사는 영원하다.” 

한편 이처럼 성리학이 역동성의 근원이라 할 역사의 神이라든가 진보 개념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할 때, 그렇다면 성리학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미지근한 사상 체계가 아니냐는 회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라고 해야 합니다. 
허구의 진보 개념은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대신 혁명(또는 개벽)이라는 주제를 뜨겁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 성리학입니다. 혁명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혁명은 서구적 혁명 개념과는 차원을 달리 합니다. 서구적 혁명 개념이 체제나 제도의 급격한 변화(외견상의 정치세력의 변화나 계층 갈등 구조의 변화)를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성리학에서의 혁명은 보다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인간 정신이 주도하는 총체적인 삶의 질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무엇보다 인간 정신의 변화(우주적 질서로의 고양)를 그 내용으로 합니다. 거기에 급진성은 요건이 아닙니다. 또한 실천 윤리(敬)를 강조함으로써 절차적 정당성의 확보도 그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실천 윤리는 서구적 혁명 논리에서는 무시되고 있습니다. 
서구적 혁명이 단속적이라면 성리학적 혁명은 영원한 것입니다. 
서구적 혁명을 칼 포퍼의 개념을 따라 “닫힌 사회의” 혁명이라고 한다면, 성리학이 추구하는 이러한 혁명을 저는 일러 이렇게 부릅니다. 

“열린 사회의 혁명” 


이상 조사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