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선생님께


유교만큼 다양한 얼굴을 가진 사상도 없습니다.
공자 이래 2천여년, 사상으로서 생명을 유지해왔다는 것은 유교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리고 사람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해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유학의 역사를 한마디로 "이론 보완의 역사"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학자는 유교를 "천(千)의 얼굴을 가진" 사상이라고도 합니다. 그 사상적 스펙트럼도 수구, 보수에서 개혁, 혁명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그런데 K선생님은 유감스럽게도 그 다양한 유교의 모습에서 말폐적 모습을 가지고 유교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회변혁의 논리로서의 유교의 모습은 보지 못하고 유교를 오직 지배의 논리, 허위의식의 차원에서만 논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무 생각이 없이 조선시대 5백년을 성리학(주자학)이 지배한 시대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성리학의 지배이데올로기성을 비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맞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적어도 훈구, 척신들이 정국을 주도하던 16세기 중반까지는 성리학은 지배 이데올로기가 아니었습니다. 
주자학이 압도적인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주자학의 본격적인 텍스트라고 할 <주자대전>이 처음 인반된 것도 1543년(중종 38년), 퇴계의 나이 43세 때였습니다. 그 때는 훈구파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士林들 사이에서 다양한 사상이 모색되던 시대였습니다. 회재, 퇴계류의 理철학, 화담 서경덕을 중심으로 氣철학, 남명류의 실천철학(敬義사상), 양명학도 이미 들어와 있었고(윤남한,조선시대 양명학연구,집문당,1982 참조), 나흠순의 철학도 호평을 받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문정왕후는 불교 우대 정책을 펴고 있을 때였습니다. 
흥미있는 사실은 기묘사화(1519) 이후에는 성리학의 기본서라 할 “소학”과 “근사록”은 금서 비슷한 취급을 받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중연, 책의 운명,혜안, 48쪽,101~102쪽 참조). 국사학자인 서울산업대 김돈 교수의 박사논문(서울대)에도 보면 “소학"과 "근사록"을 끼고 다녔다고 해서 모두 기묘의 무리로 지목하며 비웃는 당시 士習의 폐단이 거론되기도 했다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16세기 전반 정치권력의 변동과 유생층의 공론 형성, 서울대 국사학과 박사논문,1993, 87쪽 참조). 

K선생님처럼 유교 내지 성리학의 지배이데올로기성을 지적하고자 한다면 "사문난적"이라는 슬로건이 일각에서 유행하던 17세기 이후를 거론하는 것이 오류의 위험성을 더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16세기의 성리학은 훈구파 시대를 극복하고자 하는 변혁의 논리 내지 전투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정암 조광조라든가 퇴계, 남명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맥락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님은 이러한 시대적 맥락은 싹 무시하고 이렇게 비판하고 계십니다.

"퇴계가 오늘날에도 되새길 만한 한국민의 정신적 지주가 되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입장에서 어떠한 긍정적 해석을 할만한 여지가 있는 선각자로 인정받으려면 당시 신분제 사회에서의 어떠한 계급혁파라던가 노비해방이라던가 하는 조치를 했다던가 이러한 것들을 할만한 사상적 분위기, 기반이 있어야 할진데 퇴계에서 과연 이러한 것들이 있었는가?" 

사실 퇴계는 님의 말씀대로 "신분제 사회에서의 어떠한 계급혁파라던가 노비해방이라던가 하는" 조치를 취하기는 커녕, 노비를 거느리고 살았던 분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노비를 거느리며 산 사람의 머리 속에서 나온 사상과 관념이 과연 현대 한국사회의 어떤 문제를 극복시켜 줄 수 있는지 정말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을 오늘의 잣대를 가지고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시대를 초월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헤겔도 그의 "법철학"에서 이렇게 말했지요.
"모든 사상가는 그의 시대의 아들이다."
퇴계 역시 당대의 현실에 많은 부분 지배받았던 인물이며, 단지 우리는 그의 <이념형>을 통해서 오늘에의 계승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 

만약 퇴계의 이런 부분을 가지고 비판하고자 한다면 인류사상에 실존했던 사상가 일반에 대해서도 동일한 시각으로 비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가령 플라톤의 경우 부유한 명문가 출신에다 노예제도를 찬성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화이트헤드는 말하기를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럼 제가 인터넷에서 만난 어떤 논객의 말처럼 "노비를 거느리며 산 사람의 머리 속에서 나온 사상과 관념이 과연 현대 한국사회의 어떤 문제를 극복시켜 줄 수 있는지 정말 모르겠다"고 하는 식의 논리대로라면 서양철학 자체가 우스운 꼬라지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왜 우리나라 서양철학전공학자들은 플라톤을 대단한 철학자라고 이야기하면서 즐겨 인용하는 것일까요? 퇴계에 대해서는 그리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서양철학에는 왜 모두들 헬렐레하는 것입니까? 

노비 문제를 가지고 퇴계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노비 소유자체를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노비제도 일반에 비추어 구체적으로 퇴계가 노비들을 대한 태도 기타 계급적 관점을 초월하는 부분이 있느냐 하는 것 등을 문제삼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퇴계가 노비제도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을 직접적으로 표출한 바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퇴계의 삶 전체를 관통해서 살펴보면 당시를 기준으로 할 때 (시각에 따라서는 파격적이라 할) 평등관을 증거해주는 사례들이 여럿 발견됩니다. 풍기 군수 시절 천민 대장장이 배순을 제자로 받아들인 사례라든가, 하인(유모)의 아이와 증손자를 똑같이 소중하게 생각했다는 사례(결국 퇴계의 증손자 창양은 젖이 부족해서 죽었다 함), 향약에서 자리 배치를 문벌이나 신분이 아니라 나이를 기준으로 했다는 것 등 지금 생각하면 사소한 것일지 모르지만 퇴계의 처신에는 남다른 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퇴계 일대기를 쓴 포항공대 (故) 권오봉 교수의 글에 보면 퇴계의 평등 지향적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퇴계는 첫째 인권을 존중하여 어진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양반이나 상인이나 차별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나 똑같은 예로서 대했다. 어떤 손님이든 모두 뜰아래에서 맞았으며, 자신의 신분이 높고 나이가 많다고 해서 자신을 높이는 일이 전혀 없었다. 
... 김학봉과 김설월당에 의하면 아무리 연소한 사람이라도 뜰아래 내려가서 맞아들이고 갈 때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한다. 퇴계는 귀한 손님이 왔다고 잘 대접하고, 아이나 미천한 사람이라고 차별하여 대접하는 일이 없었다. 
사람을 교제하는데 있어 가장 특징적인 사실은 누구나 균등하게 예우한 일이다...." 
<권오봉,퇴계선생일대기-가을 하늘 밝은 달처럼,(교육과학사,1997),222쪽> 

우리가 퇴계를 오늘에 논하는 것은 단순히 퇴계를 위대한 인물로 부각시킨다거나 정신적 지주 내지 선각자로 추앙하자는 게 아닙니다. 퇴계에게 16세기라는 제한된 시대를 넘어 오늘에도 타당한 어떤 "통시대적인" 메시지가 있느냐 그걸 포착하는 게 중요할 것입니다.
과거 전통사회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나 구체적인 시대의 양상은 님도 잘 아시다시피 물론 다릅니다. 하지만 <인간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퇴계의 사상은 바로 시대를 운영하는 인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지요. 
퇴계는 우리에게 인간 정신의 혁신이 없이는 황폐한 시대를 극복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 오늘 우리의 현실을 한번 돌아 보십시요. 
황폐한 정신문화,온갖 게이트로 표상되는 만연한 부정 부패, 공적 正義는 뒤로 가고 사적 利益에 혈안이 된 타락한 엘리트들의 군상, 正道를 잃어버린 언론,무기력한 지식인들,갈수록 벌어지는 빈부격차... 
이러한 시대에 K선생님께서는 다른 대안의 훌륭한 철학이라도 가지고 계십니까? 


11월 9일 조사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