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이 글은 동양철학 관련 대중 학술지인 "오늘의 동양사상" 제6호(2002년 봄 여름호, 예문서원간)에 실렸던 글입니다. 



퇴계(3) ; 일부 서양철학전공학자들의 동양철학관 비판



앞에서 논자는 퇴계를 중심으로 한 논의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일반론적 의미에서 우리사회 저변의 "전통문화에 대한 무지와 주체적 자긍심 상실"이라는 오늘의 비극의 인문적 현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행히 최근 이러한 현실을 반성하고 자생적 인문학을 외치는 목소리가 있음을 소개하였고 이들에 대해 매우 못마땅해하고 있는 서양철학 전공자들의 반박 논리의 허구성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그럼 이제부터는 보다 구체적인 논의를 통해서 서양철학 전공자들의 사유체계의 적실성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아래에서는 "일부 서양철학전공학자들의 동양철학관 비판"이라는 제목하에 다음과 같은 순서로 논의를 전개하기로 한다.

1. 논쟁의 한쪽 당사자 입장에 서서
2. 서양철학전공자들은 우리의 전통사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3. 서양 철학 전공자들의 주장(1): '한국적 인문학 성립의 관건은 주체적 문제의식이다'에 대하여 - 퇴계의 사례를 원용하여
4. 서양 철학 전공자들의 주장(2): '그러나 전통사상은 현대의 문제 해결에 별 도움이 안 된다'에 대하여 
5. 생산적 논쟁의 기초: 지적 성실성 - 퇴계의 교훈



1. 논쟁의 한쪽 당사자 입장에 서서 


논자는 전통 사상 연구 진영에 몸담고 있으면서, 현재는 특히 조선시대 16세기의 퇴계·남명 사상의 현대적 해석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논자가 동양 철학계를 대변하는 입장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다만 나름대로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느낀 서양 철학 전공자들의 동양 철학(전통 사상)관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함으로써 다수 서양 철학 전공자들에게 동양 철학(전통 사상)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자 할 따름이다. 

무릇 진정한 의미에서의 논쟁은 논객들 서로가 상대방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동·서양 철학계의 경우에는 대체로 입장 차이가 아주 대조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측면이 있다. 먼저 동양 철학계를 보면 학자들 중에 서양 철학의 의의를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동양 철학의 현대적·창조적 해석을 위해서는 서양 철학의 성과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반적 경향이다. 예컨대 고려대 이승환 교수는 "우리에게는 이론 축적의 기반이 없기 때문에 앞으로 서양철학에서도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퇴계학의 중진학자인 서울대 금장태 교수는 퇴계학과 관련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퇴계의 삶과 철학,서울대출판부,1998,259쪽). 

"나아가 현대의 서양 철학 이론에 의한 퇴계 철학의 이론적 문제점과 한계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요구된다. 한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음으로써 그 한계의 극복 논리를 창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퇴계 철학의 이해에서 서양 철학의 도입이 단순하게 유사성·일치성을 확인함으로써 퇴계 철학의 탁월성을 입증하는 데 머물기보다, 마치 풀무간의 망치처럼 쇠를 더욱 단단하게 불리는 데 쓰여지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에 비하여 서양 철학계 내에서는 동양 철학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학자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대체로 "동양 철학은 고리타분함 그 자체이다"라든가 "전통은 이미 단절되었고 그 단절된 전통 속에서 오늘날 의미 있는 메시지를 찾기는 힘들다", 혹은 "설사 의미 있는 메시지가 있다 하더라도 서양 철학으로 다 설명할 수 있고 포섭가능한데 굳이 낡고 고리타분한 개념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등의 이유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서라면 동·서양 철학계 간의 생산적인 논쟁은 기대하기 어렵다. 적어도 생산적인 논쟁이라면 서로가 무언가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주고받고 하는 맛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말이지만 서양 철학 전공학자들의 동양 철학에 대한 편향된 시각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서울대 심재룡 교수가 80년대에 쓴 글에도 보면 동양 철학에 비우호적인 한 서양 철학 전공학자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서울대 대학원의 석·박사과정에 동양 철학 과목을 개설하는 과정에서 갑론을박하는 도중의 에피소드 하나를 그는 소개하면서, 그때 한 서양 철학 전공교수가 "동양 철학이란 한갖 역사적 유물(just a history)이 아니겠는냐고 실눈을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고 쓰고 있다. 서울대학의 사례는 아니지만 심지어 '동양 철학'이라는 명사조차 성립할 수 없다는 극언까지 서슴지 않는 학자도 있었다고 한다(이상 "한국에서 철학하는 자세들",집문당,1986,320쪽 참조). 이런 점에서 볼 때, 동·서양 철학계가 서로 생산적인 논쟁의 파트너로서 21세기 인문학의 새장을 열어 가는 데 있어서는 무엇보다 동양 철학에 대한 서양 철학 전공자들의 인식 변화가 요청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과연 그들 서양 철학 전공학자들의 동양 철학관은 구체적으로 어떤 논리에 입각해 있으며, 또 어떤 문제점들을 안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기로 하자. 그전에 미리 예비적으로 다음과 같은 점들은 분명히 해 두고 싶다. 

첫째, 논자가 앞으로 서양 철학 전공자들의 동양 철학에 대한 무지에 대해 비판적으로 언급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차피 소위 전공이라는 이름 아래 조각조각 나누어진 우리의 학문적 현실에서는 전공간의 소통과 대화 부족이라는 우리 인문학 현실의 구조적 문제부터 먼저 문제삼아야 할 것이다. 또한 동양 철학의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는 동양 철학 전공학자들의 책임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논자가 비판을 통해 의도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무지에 대한 비판 그 자체가 아니라 무지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데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둘째, 서양 철학 전공자들에 대한 논자의 비판이 소위 인문학 위기에 편승하여 동양 철학의 우위를 노리는 헤게모니 담론으로 비치는 것을 경계하고자 한다. 어디까지나 논자의 비판은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생산적 논쟁의 파트너로서 서양 철학 전공자들의 의식 변화를 촉구하는데 목적이 있을 뿐이다. 

셋째, 논자는 서양 철학 전공자들이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집단이라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 즉 서양 철학 전공자들의 동양 철학에 대한 견해는 한결같지 않다는 것이다.(특히 이 점에 대해서는 인터넷에서 만난 몇몇 서양 철학 전공자 여러분께서 많은 깨우침을 주었다.) 결국 논자가 문제 삼는 것은 '일부 서양 철학 전공자'의 견해에 대해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임에도 논자가 상당한 비중을 두고 비판적으로 문제삼는 이유는 그들의 주장이 우리 인문학 현실에 미치는 실질적 영향력이 결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연구자 집단 내부에서 그들이 지니고 있는 현실적인 파워가 동양 철학과 서양 철학의 진정한 만남을 더디게 하는 걸림돌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넷째, 동양 철학 중에서도 논자의 관심 분야인 '전통 사상에 대한 서양 철학 전공자들의 태도'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러한 점들을 미리 염두에 두고 읽어주기를 바란다. 



2. 서양 철학 전공자들은 우리의 전통 사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서양 철학 전공학자들이 우리의 전통 사상을 서양 중심적 입장에서 자의적으로 곡해·폄하하고 우습게 여긴 지는 무척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색을 하고' 우리의 전통 사상과 관련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공개적인 매체를 통해 표명하게 된 것은 아마도 최근의 일이 아닌가 한다. 
그 계기는 90년대 들어 일부 서양 철학 전공학자들의 식민성을 통박하면서 우리의 역사와 전통에 기반한 자생적 인문학을 주장하는 일군의 전투적 논객들의 등장이었다. 논자는 이들 논객들의 작업이 20세기의 황혼녘에 우리 정신사에 던진 특별한 의미는 그 주장이 담고 있는 메시지 자체보다, 일부 서양 철학 전공자들로 하여금 그 동안 음성적으로만 표방하고 있던 우리 전통 사상에 대한 견해를 공식적으로 드러내게 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로 인한 서양 철학 전공학자들의 공식적인 견해 표명은 이를테면 요즈음 유행하는 말로 일종의 커밍아웃(coming-out: 자기 정체성 드러내기)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릇 논쟁의 시발은 의견 표명에서 시작된다고 할 때, 서양 철학 전공학자들의 동양 철학(전통 사상)관에 대한 표명은 아주 의미 깊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글은 바로 서양 철학 전공학자들이 앞에서 말한 전투적 논객들의 비판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드러낸 주장과 논리에 주목하는데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판적인 논객들의 등장은 그 동안 비판의 무풍지대에서 그야말로 안온한 헤게모니를 누리고 있던 그들로서는 여간 당혹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서양 철학계의 독주를 견제해야 할 동양 철학계는 소수파였고 그리고 무기력한 점이 있었다. 무엇보다 '철학=서양철학'이라는 등식이 오랫동안 확고했던 상황에서 그들은 전통 사상의 존재에 대하여 그저 무시하기만 하면 족했을 뿐, 인문학적 의미에서 영향력을 가진 실체로서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 옳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나름대로 "근본주의의 덫에 걸리지 않고 문제 자체를 설명하기 위하여 서양의 다양한 이론들을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