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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이현보의 자는 비중(?仲), 호는 농암(聾巖), 본관은 영천이니 인제현감을 지낸 흠(欽)과 안동 권씨의 아들로 세조 13년 1467년 7월 29일, 현 안동군 도산면 분천동에서 태어났다.

영천에서 안동으로 이거한 후의 그 직계는 다음과 같다.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 헌(軒) 의흥현감(義興縣監) 파(坡) 통예문봉예(通禮門奉禮) 효손(孝孫) 인제현감(麟蹄縣監) 흠(欽) 현보(賢輔)
 
농암은 태어나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골상이 비범하였다. 특히 사냥을 좋아하고 학문에는 힘쓰지 않았는데, 19세에 향교에 가게 되어 이때부터 발분, 20세에는 홍귀달(洪貴達)의 문하에 가서 수학했으며 특히 정주학(程朱學)에 뛰어났다. 29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32세에 문과에 급제, 교서관권지부정자(校書館權知副正字)에 제수된 이래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36세에 사관으로서 탑전에 가까이 가서 사초를 쓸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주청해 연산군의 미움을 샀다. 38세에 대사헌 홍자아(洪自阿)의 진강(進講)이 착란(錯亂)되었다 하여 개차(改差)에 청했다가 금옥에 갇혔고, 안기역(安奇驛)에 유배되었다. 40세인 1506년 중종반정이 이루어져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환조(還朝), 42세에 어버이를 위해 외직을 빌어 영천군수가 되었다.

44세에 성친(省親), 명농당(明農堂)을 세웠으며, 46세에 농암 위에 애일당(愛日堂)을 건립하였다.



47세에 내직으로 옮기고 그 다음해에 밀양부사가 되었으며, 52세에 안동부사를 지냈고, 55세에 내직으로 옮겨다가 56세에 충주목사, 그 다음해에 성주목사가 되었다. 59세에 어버이가 늙었음을 들어 해관(解官) 귀향했으나 곧  입조하였고, 62세에 귀성했다가 곧 대구부사가 되었으며, 친노(親老)로 해직했는데, 그 이듬해에 평해군수, 이어 영천군수가 되었다. 65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고 삼년을 시묘하고, 67세에 형조참의ㆍ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68세에 경주부윤, 70세에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으나 곧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71세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시묘 중 부인상을 당했다. 73세에 형조ㆍ호조참판, 76세에 말미를 받아 귀향하니 이에 치사(致仕)가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강호의 생활이 시작되었고, 77세에 영지정사(靈芝精舍)를 건립하였다. 또 지중추부사에 특제(特除)되어 사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자헌대부상호군(資憲大夫上護軍)이 되었으며 또 정헌(正憲), 숭정(崇政)의 가자(加資)를 받았다. 89세를 일기로 1555년 2월 13일에 이하니 시호는 효절(孝節)이다.

8남 1녀를 두었는데, 농암 생존 당시 세 아들 희량(希樑)ㆍ충량(?樑) ㆍ계량(季樑)이 각기 봉화ㆍ안동ㆍ의흥의 원님이었다.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은 그 손서이고 시를 주고받은 인물만으로도 송재(松齋) 이우(李?)ㆍ온계(溫溪) 이해(李瀣)ㆍ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ㆍ눌재(訥齋) 박상(朴祥)ㆍ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ㆍ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ㆍ충재(?齋) 권벌(權潑)ㆍ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ㆍ음애(陰崖) 이자(李?)ㆍ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ㆍ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 외 당대 명사 여러 사람이 있었으며, 특히 퇴계와의 사이에 주고받은 시문이 많이 남아 있다.

농암은 임종시에

내 나이 90에 이르렀고,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며, 너희들이 모두 있어서 전혀 후회 없는 삶이었으니 죽음 또한 영광스럽다.

고 했다. 이 말은 그가 죽음에 임하여 그 한 생을 되돌아보고서 스스로 후회 없는 온전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퇴계는 〈근세의 명경(名卿)으로 복덕을 겸하고 능히 만절(晩節)을 온전히 한 이로 공을 앞설 사람이 없다.>고 했던 것이다.

사실 농암의 일생 동안에는 이른바 사대사화가 겹쳐 일어났다. 그 사이 농암 자신도 한 차례 귀양살이를 했고, 두어 번 해직을 당하기도 했으나 40년이 넘는 관직생활을 순탄하게 마무리 했다. 내직에서는 아낌없는 충언을 하였고, 직필(直筆)을 서슴지 않았으며, 외직에서 는 잘 다스렸고, 7~8군을 통해 전성(專城)의 공양을 하면서 부모를 위해 애일당(愛日堂)을 짓고 양로연을 베풀기도 하고, 구로회(九老會)를 열기도 했으며, 고관으로 치사하고 장수했으며, 또 세 아들로부터 전성의 공양을 받았으니 참으로 유복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 농암가



그 어려운 시기에 그토록 유복하게 지낸 농암이 조정에서는 원로로, 재야에서는 태산북두로 숭앙받았던 까닭은 농암이 남긴 5편의 부(賦) 중에서 「천하중용부 天下中庸賦」와 「홀부 笏賦」에서 찾아 볼 수 있다.

 >> 농암가5편



 

 

 

 

 

 

 

 

 

 >> 친필






사서 중에서 특히 『중용』의 위대함을 서로 설명한 「천하중용부」는 한대(漢代)사람들이 <중용의 인물>로 추대한 호광(胡廣)이 사실은 시중의 도에 어긋나는 반중용적인 인물임을 서술하고 당시사람들의 망령된 의논을 신랄히 비판하고 있는데, 이 작품을 통해서 농암의 지향함이 어떠한지를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33세에 쓴 「홀부」는 부(賦)로는 특이하게 명(銘)을 붙었는데 그 명은 다음과 같다.

  네 몸이 곧아 내 거동을 바르게 하고
  네 얼굴이 발라 내 생각을 바르게 한다.
  네 내 손에 있어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아
  내 마음을 공경하게 하고 내 얼굴을 바르게 하는 것을 오직 네 공이다.
  잡이면 있고 버리면 없으니
  너와 더불어 같이 하고자 한다.

이 명은 홀의 곧은 바른 모습을 그대로 본받아 내 몸과 마음을 바로잡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신유학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이 경(敬)인데 경은 주일(主一)ㆍ불기(不欺)ㆍ불만(不慢)ㆍ성성(惺惺)ㆍ불용일물(不容一物) 등 여러 가지로 설명되고 있으며 그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주자의 「명당실기 名堂室記」에서 지경(持敬)의 근본을 중용에서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자는

일찍이 주역을 읽고 두 말을 얻었으니 경이직내(敬以直內), 의이방외(義以方外)라, 학문하는 요체가 이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힘을 쓸 방도를 알지 못했더니 중용을 읽다가 수도지교(修道之敎)를 논한 것에서 반드시 계신공구(戒愼恐懼)로 처음을 삼는다는 것을 본 연후에 지경9持敬)의 근본 되는 것을 알았다.

라고 설명하였다.

경 공부의 시작은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는 것이란 것이 『중용』의 가르침이며, 이『중용』의 가르침이 「천하중용부」를 쓴 농암에게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여진다. 농암 행장에 나타나는 다음과 같은 모습이 이를 증명한다고 할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정침에 나가 종일토록 거처하였으며 주렴과 책상이 깨끗하고 비록 춥거나 덥더라도 그러하였다.

남을 위하는 데는 부지런하고 자기를 위하는 데는 치졸하였고 몸을 깨끗하게 가지고 넘치는 것을 경계하여 한 가지 경사가 있으면 근심이 낯빛에 드러나고 한번 벼슬이 오르면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즐겨하지 않았으며 이익을 탐내지 않고 욕심이 적어서 무릇 입고 쓰는 물건이 간소하여 화려하지 않아 서생과 다름이 없었다.
뜻을 얻으면 흔연히 술을 마시되 두세 잔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농암의 일상생활 모습은 유학사상의 요체인 경(敬) 공부와 그 실행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 같은 유학사상의 생활화가 농암의 덕행을 높이고 그 만절(晩節)을 온전히 하는 저력이었다고 본다.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2008-06-18 오전 9:44:52 / 김성규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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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8 오전 9:4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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