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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의 자존심, 격조 있는 종가, 학봉종택”
천년불패의 땅 검제(金溪) 마을 이야기
 

오랜 세월 우리의 역사 가운데 있던 유교문화, 유학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구현하는 실천 이념이었던 유교문화는 안동 일대에 밀집되어 있는 수많은 종가, 서원, 재실 등 다양한 고건축물을 통해 특별히 안동지역에 많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도 향사를 지내고 있는 서원만 21개소에 이르고 1)불천위제를 지내는 곳은 47위에 이르니 그 숫자만 보더라도 유교문화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라 할만하다. 이러한 유교문화에는 퇴계 이황이라는 인물이 중심에 있다. 주자 성리학을 한국에 토착화시킨 인물이라 할 수 있는 퇴계 이황선생은 안동, 더 나아가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유학자이다.

특히 안동에서 전승되고 있는 수많은 인물 전설 속에도 유난히 후덕하고 인심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는 퇴계 이황, 퇴계 이황선생의 학맥을 이어 받은 양대 제자로 서애 류성룡 선생과 학봉 김성일 선생은 안동의 선비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학자이자 정치가, 임진왜란 시에는 나라를 구한 명장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안동의 선비들이 이어나갔던 학맥의 중심에도 두 사람은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살펴볼 수 있다.



이 두 사람 가운데 학봉 김성일 선생의 후손이 살고 있는 학봉종택은 검제 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검제는 학가산과 천등산이 자리잡고 작은 산봉우리를 이어가며 순하고 수려한 산줄기가 펼쳐진 곳이다. 지방지(地方誌)로는 가장 오래된 영가지(永嘉誌)에서는 검제마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안동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속명을 금음지(今音地), 또는 금계(金溪)라 이름하기도 한다. 예부터 천년불패(千年不敗)의 땅이라 불렀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1538∼1593년)이 임하(臨河)로부터 와서 살게 되면서 마을이 살기에 풍요로와 졌고 한 줄기의 시내가 마을 중간을 뚫어 흐르고 나이 많은 노인을 뫼시는 집이 많으니 노인촌이라 부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용암(?庵) 김헌락(金獻洛)이 쓴 금계지(金溪誌)는 마을 이름의 유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금계는 일명 금지(金池)라 한다. 구호를 금제(金堤)라 했는데 방언의 훈(訓)은 검(黔)이라 해서 속되게 부르기를 검제(黔提)라 했다. 혹은 이르기를 옛날에 시내가 나누어져 흘러 가운데로 열리면서 마을을 이루니 마치 거문고의 모양과 같아 금제(琴提)라 불렀다고도 한다...뒷날 의성김씨(義城金氏)가 번성하게 살게되니 금계(金溪)라 고쳤다.

이 금계마을의 중심에는 임진왜란 시 왜군과 싸우다 전쟁터에서 전사한 학봉 김성일 선생이 있다. 학봉 선생은 임금 앞에서도 할 말은 하고야 마는 강직함을 가진 인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학봉 종가의 후손들은 훗날 독립운동에도 힘써 전국에서 당일 성씨로는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가문으로도 유명하다.
 


- 중앙선 철로의 길마저 바꾼 큰 선비, 학봉 김성일

검제마을의 중심에는 학봉종가가 있다. 학봉 김성일 선생은 퇴계 선생의 학풍인 이기론이나 심성론을 그대로 이어 받아 수양과 실천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 학봉 선생이 사간원의 정언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사간원은 임금의 잘못된 정사를 직언하여 바로 잡는 일을 임무로 하는 관청이다. 학봉선생이 사간원에 있을 때 김규라는 이가 사간이 되었다. 김규는 왕실의 인척으로 그 자리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 학봉 선생은 임금에게 뜻을 전하여 인사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 잡기를 요청하였다. 이로 인해 김규는 간과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학봉 선생 자신도 다른 자리로 옮겨야 했다. 자신의 불리함을 무릅쓰면서까지 간쟁을 한 것이다.
앞서 있었던 노산군의 복위 문제와 아울러 이 일로 인해 그의 직성의 조정의 내외에 떨쳤음은 물론이다.  그 후에 임금이 “나를 전대의 제왕과 비교하면 어느 임금에 비교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먼저 정이주 라는 신하가 “요순 같은 임금이십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학봉선생은 “요순도 될 수 있고 걸주도 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요순과 걸주가 이처럼 비슷한가?”라고 되물었다. 그는 다시 “능히 생각하면 성인이 되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치광이가 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차고난 자품이 고명하시니 요순 같은 성군이 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만, 스스로 성인인 체하고 간언을 거절하는 병통을 갖고 계시니 이것은 걸주가 망한 이유가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불쾌해진 임금이 얼굴빝을 바꾸고 자세를 고쳐 앉자 분위기가 경직되면서 그 자리에 있던 신하들이 모두 떨었다.
이 때 유성룡이 나아가 “두 사람의 말이 모두 옳습니다. 요순이라고 대답한 것은 임금을 인도하는 말이고 걸주에 비유한 것은 경계하는 말이니, 모두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한 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제야 임금의 노여움이 풀어져 어려운 자리를 면할 수 있었다.
2)
이처럼 학봉선생은 강직하고 자존심 강한 선비로서의 모습을 벼슬 기간 동안 보여주었다.

학봉선생이 돌아가신 후 지역민에게 학봉선생이 어떤 인물로 인식되었는지는 중앙선 철로 개설 시의 일화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중앙선은 서울 청량리에서 경북 안동까지 이어지는 철도 노선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중앙선 노선을 처음 설계할 때, 철로가 학봉의 묘소가 있는 안동시 와룡면 이하동 가수천을 관통하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설계대로라면 학봉 묘소의 내룡(來龍)이 끊어지게 된다. 풍수적인 가치관에서 볼 때 이는 학봉에 대한 엄청난 불경에 해당하는 사건이다.
이런 계획을 알게 된 학봉의 제자들과 후손을 포함한 영남 유림 수백 명이 들고 일어나 조선총독부에 진정서를 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설계를 맡았던 일본인 책임자 ‘아라키(荒木)’도 학봉이 영남에서 존경받는 큰선비임을 알고 기꺼이 철도 노선을 수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학봉 묘소를 관통하지 않고 우회하도록 설계변경을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원래 계획에 없던 터널 5개를 새로 뚫어야 했다. 청량리에서 안동까지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유난히 터널을 많이 만나게 되는 것은 바로 학봉의 명성 때문이다.”

일제의 강압이 푸르던 일제 강점기, 터널을 5개 뚫으면서도 중앙선의 철로를 바꾸었던 것은 학봉선생이 영남 지역 유림들에게 어떤 인물로 인식되었는가를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일화라 할 수 있다.  물론 학봉선생이 늘 이렇게 강직하고 직선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임란 당시 진주성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언문 편지에는 아내와 자식들을 걱정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어 보는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지금 이 언문 편지는 학봉종택 내 유물전시관인 운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언문편지글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요사이 추위에 모두들 어찌 계신지 가장 사념하네.
나는 산음 고을에 와서 몸은 무사히 있거니와
봄이 오면 도적이 대항할 것이니 어찌할 줄을 몰라하네.
또 직산 있던 옷은 다 왔으니 추워하고 있는가 염려마소.
장모 뫼시옵고 설 잘 쇠시오. 자식들에게 편지 쓰지 못하였네. 잘들 있으라 하소.
감사라 하여도 음식을 가까스로 먹고 다니니 아무것도 보내지 못하네.
살아서 서로 다시 보면 그제나 나을까 할까마는 기필 못하네.
그리워하지 말고 편안히 계시오. 그지 없어 이만.
섣달 스무나흗날

 
학봉 종가의 가치는 비단 학봉 김성일 선생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퇴계 학풍을 이어받은 지조 있는 선비로, 임진왜란 때 왜적과 맞서 싸우다 순직한 명장으로 이름나 있지만 선생의 절의를 이어 받은 후대에는 파락호라 불리며 온갖 비난을 받았지만 사실은 독립운동 자금을 대는데 모든 재산을 댄 가짜 파락호 김용환 선생이 있었다. 독립유공자 열한 명을 배출한 의리와 충절의 가문 학봉종택은 아직도 그 당당함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 시조내력
 
금계 마을의 역사를 기록한 금계지에 따르면 고려말 조선 초, 이 곳에는 흥해 배씨, 안동 권씨, 경주 이씨, 원주 변씨, 진주 하씨 등이 각기 인척 관계로 출입이 빈번하였던 곳으로 전한다. 고려말에 배상지가 소야촌을 중심으로 서후 일대에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안동 권씨의 사위가 되어 금계에 옮겨온 후 이승직이 그의 사위가 되자 승직의 자손 시민 등이 이어 살았다.

권예의 조부 자겸이 배상지의 손서(孫壻)로 내왕하자 그 후예들이 세거하였다. 권덕황은 배씨의 사위로 금계에 내왕하였고 김성일과 장팽수 또한 그의 사위가 됨으로써 중년에는 이곳으로 옮겨와 살았다. 이처럼 조선 전기의 금계 마을에는 다양한 성씨가 세거하고 있었다. 

- 인심 좋고 격을 갖춘 아름다운 안동의 종가로 거듭나고 있는 학봉종택

현재 학봉종택은 종가문화를 살펴보기 위해 안동을 찾는 관광객이 방문하는 대표적인 종가가 되어가고 있다. 인근의 봉정사는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을 보유하고 있어 많은 관광객이 다녀가고 있는 실정이다. 

학봉종택은 조선후기 상류주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ㅁ자형의 사랑방, 안방, 문간방, 사랑마루 등으로 구성된 정침(正寢)과 운장각, 풍뢰헌(風雷軒) 및 세 칸의 사당 등을 합쳐 90여 칸, 2000여 평 대지의 규모이다. 학봉 생존 당시의 집터이기도 한 현재의 종택은 침수가 잦아 8대손인 김광찬이 1762년 현재의 위치에서 100m가량 떨어진 소계서당 자리에 지어 1960년대 초까지 살다가 1964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사랑채는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 둔 채 소계서당이라는 현판만 걸었다.

학봉종택 내에는 문중 유물 전시관인 운장각(雲章閣)이 있다. 운장각은 학봉선생의 유물을 보관ㆍ전시한 유물관으로 운장이란 말은 "저 넓디 넓은 은하수(倬彼雲漢), 하늘에서 빛나고 있네(爲章于天)."라는 시경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운장각에서 보존하고 있는 문서는 보물 905호와 906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는데 그 중 보물 제 905호는 학봉김성일종손가소장전적(鶴峰金誠一宗孫家所藏典籍)으로 56종 261책이 지정되어 있다. 지정된 전적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국조오례의』,『삼강행실도』등 28종 156책이 지정되었고, 필사본 중에서는『퇴계사전초』,『북정일기』등 27종 85책이 지정되었다.  이 전적류들은 임진왜란 이전의 활자체를 연구하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사를 연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또한 각종 고문서 중에서 보물 제 906호로 지정된 학봉김성일종가소장고문서(鶴峰金誠一宗家所藏古文書)는 17종 242점이 일괄 지정되어 있다.  종손가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은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교지, 교서, 유서, 재산분배기록인 분재기 등 10,000여 점이나 되지만, 그 가운데 서간문(편지글)과 제사에 쓰인 제문은 제외되었다. 지정된 문서를 보면 교서 1점, 교지 및 첩지 59점, 첩 4점, 시권 7점등이다.

이는 김성일 선생 개인의 전기를 파악함은 물론이거니와 의성김씨 가계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음력 4월 29일 거행되는 불천위제에는 수많은 유림과 후손 등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고 있다.

<학봉종택 정보>

대상

소재지

연락처

홈페이지

종목

학봉종택(금계
마을)

경북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856번지

054-852-2087

http://www.hakbong.co.kr/

경상북도 기념물 제 112호

* 길안내: 서울→영동고속도로→남원주I.C→서안동I.C→34번국도(예천방향)→송야교에서 좌회전(봉정사 방향 10㎞지점)→학봉종택

* 대중교통정보 : 안동초등학교 앞(51번 버스(봉정사행)

<소산의 볼거리>

구  분

대  상

정사 / 가옥

소계서당, 봉정사, 삼태사(三太師)묘소, 학가산 온천 등

종택

원주 변씨 간재종택

주변관광지

하회마을, 안동한지공장, 안동권씨동성마을(가일), 병산서원 등


1)안동대학교민속학연구소편, 『안동양반의 생활문화』, 2000, 347쪽.
2)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안동 금계 마을 - 천년불패의 땅』, 90~91쪽.

글, 사진 김은정
 


2010-02-03 오후 3:32:12 / 경북미래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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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3 오후 3:3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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