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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백점의 풍경화가 펼쳐지는 운치있는 종가, 양소당
소산마을 양소당(안동김씨)
 

검소하고 신의를 중시여기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 소산 이야기

전국에서 가장 많은 종가(宗家)가 있는 곳, 전국에서 가장 많은 불천위(不遷位)를 모시고 있는 곳 등 안동은 오랜 세월 한국의 문화를 대변했던 유교문화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대표된다. 이 유교문화는 혈통에 기반을 둔 마을 조직인 동성마을을 중심으로 그 모습을 갖추어 나가며 안동에는 현재에도 하회, 가일, 소산, 천전 등과 같은 동성마을이 전승되고 있다. 이 가운데 안동을 본으로 하는 ‘소산’은 하회마을과 인접한 곳으로 앞으로는 너른 풍산뜰과 매곡천(梅谷川)이, 뒤로는 소산(素山)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곳이다.

소산의 옛 지명은 영가지에 금산촌(金山村)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말로는 쇠미마로 부른다. 금산(金山)을 쇠금자의 쇠자와 뫼산의 뫼를 뜻하여 쇠미마로 부른 듯하다. 금산촌이라는 지명은 병자호란 당시 항복요구에 항서(降書)를 찢고, 긴 세월동안 심양(瀋陽)에 잡혀가 갖은 곤욕을 치르면서도 의기(義氣)를 지킨 선비인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에 의해 현재의 지명인 소산으로 바뀐다.

선생은 김씨의 집성촌인 이 마을의 이름을 금산촌이라하는 것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느낌이 드는 이름이라 온당 치 못하다." 고 해서 개명하였고 " 검소하고 신의를 중하게 여기는 씨족이 사는 마을이라는 이름이 좋겠다" 하여 소산으로 고쳐지었다고 전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마을을 감싸고 있는 소요산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도 하고, 소요산의 지형이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을 하고 있다고 해서 소산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수 백점의 풍경화를 볼 수 있는 곳, 안동김씨 종가 양소당

동성마을에 들렀다면 제일 먼저 보아야 할 곳은 종가, 그런데 이 소산에는 본관과 성씨가 같으면서도 시조를 달리하는 두 안동 김씨가 함께 살고 있다. 고려시대 명장이며 정치가인 김방경(1212~1300)을 시조로 하고 있는 선안동 김씨의 종가는 삼소재이고 고려 개국 공신으로 태조로부터 사성(賜姓)과 함께 태사(太師)라는 칭호를 받은 김선평을 시조로 하고 있는 후안동 김씨의 종가는 양소당이다.

오늘 우리가 찾게 될 양소당은 후안동 김씨의 종가로 흔히 안동 김씨라고 하면 이 후안동 김씨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흔히 이 안동김씨를 가리켜 “금관자(金貫子)가 서 말(3斗)”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관자는 조선조 때 정 3품 이상의 고관(高官)들의 망건줄에 달던 옥(玉)과 금고리를 뜻하는 것으로 안동김씨는 그만큼 많은 현관(顯官)을 배출시켰다는 것이다. 현재 양소당은 약 5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으로 여느 동성마을처럼 양소당도 마을 가장 안쪽 나지막한 구릉 아래 자리 잡고 있다.



종가가 있는 곳은 명당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대체로 종가는 주산(主山)이 끝나는 낮은 구릉에 자리하여 앞으로는 하천을 바라보고 있다. 가령 천전의 의성 김씨 종택도 지내산의 주맥(主脈)이 끝나는 낮은 구릉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굳이 풍수를 논하지 않더라고 양소당은 소산을 굽어 보고 있다. 사랑채 마루에 앉으면 넓은 풍산뜰이 펼쳐져 있고 마을의 곳곳과 연결되어 있어 그 운치를 더한다.

당호인 양소당의 또한 소산(素山)이라는 지명에서 따 온 것으로 영조 때 형조참의(形曺參議)를 지내고 영남 8대 문장가로 문명(文名)을 드높인 동야공(東?公) 김양근(金養根·1734~1800)이 230여년 전 지은 것이다. “소박하고 순수함을 길러서(養素), 풍속(風俗)을 순박(淳朴)하게 하고 가문의 기질(氣質)을 질실순고(質實純古)하게 만들겠다.”라는 염원을 담아 지은 것으로 안동김씨의 최초 문과(文科)입격자이자 성종 조에 대학자요 정치가로 대사간을 지낸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1431~1521)의 “오가무보물(吾家無寶物), 보물유청백(寶物惟淸白) : 우리 집안에는 세속적인 의미의 보물은 없다. 있다면 오로지 청백이라는 정신적인 보물이 있을 뿐이다.”라는 가르침에도 이러한 “養素"의 정신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현재의 종택은 목조와(木造瓦) 팔작지붕 집으로서 사랑채, 중문간채, 안채로 구성된 “口”자 형 몸채가 중앙에 자리 잡고, 그 오른쪽 뒤편에 사당(祠堂)이 배치되어 있다. 종가는 종가의 역할에 맞게 구성되어 있다. 종가의 역할은 봉제사(奉祭祀)와 접빈객(接賓客)으로 대표된다. 종가에서 이러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곳은 사랑채, 양소당의 사랑채도 오른쪽 사랑채를 돌출시켜 왼쪽에는 2칸의 방을 두고 오른쪽 전체는 넓은 마루를 꾸며 제례시에는 제청(祭廳)으로, 많은 손님이 오실 경우에는 손님을 대접할 수 있는 공간으로 사용된다.



양소당 사랑마루에 앉아 따뜻한 차와 함께 밖을 바라보면 그 운치가 남다르다. 봄이면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의 움트는 모습, 여름이면 햇볕 아래 아지랑이가 올라오는 모습, 가을이면 누렇게 익어 고개를 숙인 황금 들녘, 겨울이면 눈 내린 넓은 뜰의 모습 등 계절에 따라 변화를 만들어 내는 수백 점의 풍경화들이 펼쳐진다. 양소당, 그리고 안동의 고가에서 즐길 수 있는 즐거움, 그리고 운치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 여행을 통해 얻어진다.

시조내력
 
위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후안동 김씨의 시조는 고려 개국 공신인 김선평이다. 김선평은 26세에 고창(古昌: 안동의 옛지명)의 성주(城主)가 되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지리상 중요 성(城)에 26세의 젊은 성주였다면 필시 진골(眞骨)이었을 것이니 효공왕의 왕자(王子)로 추정된다. 신라 말 경애왕때 고창군(古昌郡: 안동)의 성주(城主)로 서기 927년(신라 경순왕 원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 경애왕을 살해하자, 930년(경순왕 4)에 권행(權幸:안동권의 시조), 장정필(張貞弼:안동장 시조)과 함께 향병(鄕兵)을 모으고 왕건을 도와 고창(안동)군에서 후백제(後百濟)의 견훤군(甄萱軍)을 토벌하여 병산대첩(甁山大捷)의 전공을 세웠다. 이 병산대첩에 관해서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그 전설은 다음과 같다.

“ 후백제 견훤은 지렁이의 화신으로 모래땅에 진을 치고 신변이 위태롭게 되면 지렁이로 변해 모래 속으로 들어가버려 웬만해선 그를 물리칠 수 없었다고 한다. 삼태사(왕건과 견훤간의 전투시 왕건을 도운 권행, 김선평, 장길 등 고려 건국공신)가 왕건을 도와 현재의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견훤은 그 동쪽 낙동강변 모래땅에 진을 쳐 대전하였다. 싸움이 수십 번 계속되었는데 끝이 나지 않고 견훤은 싸움을 하다 불리해지면 모래 속으로 기어들어가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에 삼태사들은 전략을 세워 흐르는 강을 막아 못을 만들어  못 속에 소금을 수없이 넣어 염수를 만들어 놓고 접전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싸움이었다. 견훤은 점점 불리해지자 당황하여 지렁이로 둔갑하더니 모래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삼태사는 이때다 하며 염수의 못물의 터트렸다.  소금물이 흘러내리니 아무리 둔갑한 지렁이일지라도 견딜 재주가 없었다. 견훤은 겨우 목숨만 건져 패주하여 안동땅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또 하나의 전설은 현재 안동에서 전승되고 있는 동채싸움의 연원을 알 수 있는 것으로 “지렁이가 화(化)한 견훤이 안동으로 쳐들어 왔다.

이를 안 삼태사(三太師)는 지렁이를 물리칠 궁리를 하다가 동채를 만들어서 견훤이 진을 치고 있는 병산(안동북쪽 와룡)으로 나아갔다. 이 때 견훤은 마침 지렁이로 변하여 강가 모래벌에서 뒹굴고 있었다. 견훤을 잡을 수 있는 썩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삼태사는 지렁이를 몰아 넣어서 두 동채머리 사이에 끼워 죽였다. 견훤을 물리치던 동채싸움이 하나의 풍속이 되어서 정월 대보름날이면 동채를 만들어서 지렁이를 잡던 식으로 싸움을 한다고 전한다.” 현재 동채싸움은 중요 무형문화재 제24호(1969.1.1)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명칭이 "안동차전놀이"로 되어 있다.

왕건이 고려(高麗)를 개국할 무렵 그 전공으로 城主 김선평공은 대광(大匡), 권행과 장길은 대상(大相)벼슬을 받았고 삼한벽상공신삼중대광사아부(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師亞父)의 관작칭호를 받았다. 안동 김은 이 때부터 본관(本貫)을 안동(安東)으로 하였다. 이후 안동은 안동부(安東府)로 승격되고 중앙권력과의 유대관계를 계속적으로 이어가게 된다. 현재 안동시내에는 삼태사를 모시고 있는 태사묘(太師廟)가 있어 현재까지도 매년 향사를 지내고 있다.

새로운 문화체험의 장소로 거듭나고 있는 양소당

현재 양소당에는 안동 김씨 31세손인 김해일 종손과 종부가 살고 있다. 종손은 몇 해 전 서울에서 하던 개인사업을 정리하고 종가로 내려와 종택을 활용한 고가체험과 전통문화를 대내외에 전하는 데 힘쓰고 있다. 지역에 있는 문중 어르신들과 함께 안동 김씨와 관련된 책을 만들어 종가와 마을을 홍보하고 종가를 일반인에게 개방하여 한옥에서 느낄 수 있는 멋과 운치를 전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방송을 통해 안동김씨 종가인 양소당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음식인 돼지족편과 녹두누룩으로 만든 동동주를 소개한 바도 있다.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휴식을 안겨 줄 양소당은 벽채가 황토인 것은 물론 바닥까지도 황토로 되어 있으며 소나무 장작으로 군불을 땔 수 있기 때문에 진정한 한국의 온돌 문화를 느낄 수 있고 잔디가 펼쳐진 후원에는 예쁜 그네가 있다. 종손이 종가를 개방하기까지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의 온기를 필요로 하는 종가와 그 종가문화와 종가에서의 경험을 통해 새 힘을 얻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종가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을 배제하기 보다는 함께 나누는 방향을 택했다고 한다. 아직은 양소당은 찾는 이들이 많지는 않지만 한 사람, 한 사람 양소당을 찾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접하는 것이 행복하다는 종손이다.

<양소당 기본정보>

대상

소재지

연락처

홈페이지

종목

양소당(소산
마을)

경북 안동시 풍산읍 소산 1리 218번지

김해일(종손)054-858-5620
011-260-9565

http://blog.naver.com/kimhaeil1797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 25호(1981년 지정)

<이 외 고택체험 정보>

* 상세객실요금정보

객실명

기준 / 최대인원

객실정보(서비스시설 등)

요금
(평일/주말)

큰 사랑채(방 2)

8~10명

사랑마루, 툇마루, TV, 냉장고

8만/10만

작은사랑채

5~6명

툇마루, TV, 냉장고

5만/6만

안채(큰방/건너방)

10~12명

대청마루, TV, 냉장고

10만(방2개)

문간채

3~4명

 

4만/5만

* 조식제공여부 : 토스트, 우유, 커피, 계란(무료제공)

* 길안내: 서울→영동고속도로→남원주I.C→서안동I.C→34번국도(예천방향)→풍산읍→916번지방도로(하회마을방향)→소산마을내양소당

* 대중교통정보 : 안동초등학교 앞(76번 버스(구담행)
                 안동시외버스터미널 건너편(46번 버스(하회행)

* 그 외 고가를 소개하는 정보 :
  편의시설 - 수세실 화장실(남, 여 각 1동)
             식당(간단한 취사가능, 온수(샤워가능), 세탁가능)
             그네, 벤취, 스톤테이블 등

<소산의 볼거리>

구  분

대  상

자연경관

삼구정 주변 소나무 숲

정사 / 가옥

삼구정, 청원루, 동야고택, 비안공 구택

종택

양소당, 삼소재

주변관광지

하회마을, 안동한지공장, 안동권씨동성마을(가일), 병산서원 등


 글, 사진 김은정


2010-02-10 오전 11:15:07 / 경북미래문화재단
©2023 andong.net
2010-02-10 오전 11: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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